248. 가시 돋친 고슴도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248. 가시 돋친 고슴도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리마는 노바 경찰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로 걸어갔다.
이반 황제의 명령으로 동부 공업 지구가 건설되고 공업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는 일자리를 찾아 노바로 밀려오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주택이 작고 복층으로 지어졌다면, 그 전에 있던 노바의 주택들은 하층민이 사는 비좁은 판잣집을 제외하면 그래도 마당이 있을 정도로 큼지막했다.
특히 도심에 있는 주택가는 어느 정도 부유한 평민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차가 다닐 정도로 골목도 넓고 마당에는 정원을 꾸밀 정도의 여유로운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바에는 이런 중산층 주택가가 여럿 남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집은 낡았지만, 넓은 마당과 정원이 딸린 집을 구하기 어려운 요즘에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리마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도 이런 주택이 아니었다.
하층민의 집은 아니지만, 복층으로 지어져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있는, 공업 발전 이후에 지어진 다세대 주택이었다.
담장 너머로 잘 다듬어진 정원수와 이제 곧 활짝 펴기를 기다리고 있는 봄의 꽃망울이 보였다.
다른 때였으면 이 주택가를 지나면서 이런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그의 발걸음은 다급했다.
그는 넓은 마당에 낡은 자동차가 한 대 주차돼 있는 주택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전정가위로 정원을 정성껏 가꾸고 있다가 들어오는 그리마를 쳐다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리마는 그를 보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중년인은 분명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몸매, 비록 다리를 절고 있지만 전정가위 하나만으로 이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리마는 당황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큰일이 생겼소. 당장 만나야겠소.”
“알았소.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정원을 가꾸고 있던 중년인은 전정가위를 도구함에 담은 뒤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홀로 우두커니 남은 그리마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이곳은 스텐커가 그리마에게 알려준 안전 가옥으로, 그리마가 울름 남작의 협작을 이기지 못해 그의 사무실을 알려 준 뒤에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마는 스텐커의 새로운 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이렇게 하는 게 나나 자네, 둘 다에게 더 이로우니까.”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과 알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리마는 스텐커의 말을 옳다 여겼다.
정원을 가꾸던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떠난 뒤에야 그리마는 여유를 갖고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귀족 저택에 댈 수는 없지만, 넓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 낡아서 오히려 품격이 느껴지는 건물.
이런 안전 가옥을 여러 채 마련했다는 말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선배는 대체 얼마나 돈이 많은 걸까?’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런 안전 가옥을 여러 채 구입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받기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일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살벌한 사람들을 부리고 다니고, 멋진 집에 살고··· 경찰로 사는 것과는 비교하지 못할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전에도 궁금했지만, 이제 더욱 궁금하고 겁이 났다.
자신을 찾아와 협박한 울름 남작을 체포할 때는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오베론 공작의 심복 울름 남작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아 온 것이다.
몇 가지 혐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혐의를 증명할 증거도 확보했다.
신이 났다.
자신을 위협한 자에 대해 복수했다는 통쾌함도 물론 있었지만, 어떤 귀족, 어떤 권력자도 증거가 있으면 체포할 수 있다는 경찰로서의 자부심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온 명령 한마디에 풀려나고 말았다.
역시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의 세상이야!
평등은 개뿔, 개나 줘 버려!
좌절감에 사로잡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보복을 받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다시 놀라운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울름 남작, 애첩의 집에서 사망!
그리마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일에 끼어든 것인지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가 봄의 기운이 움트는 정원에 앉아 누군가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갔던 자동차가 들어왔다.
스텐커가 차에서 내렸다.
“선배!”
“들어가서 얘기하지.”
“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고, 정원을 가꾸던 남방군 출신 기사는 다시 전정가위를 들었다.
***
“울름 남작이 죽었습니다.”
“음!”
스텐커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을 뿐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경찰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궁금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울름 남작이 마시던 술과 술잔을 수거해 본청으로 보내왔죠. 깊이 조사할 것도 없이 그 술을 핥은 개가 죽어 버리더군요.”
“그렇군.”
“그리고 가정부가 행방을 감췄습니다.”
“가정부가 술잔에 독을 탄 게로군.”
“실행이야 가정부가 했겠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사주나 협박을 받았겠지요.”
“그렇겠지.”
“누굴까요?”
그리마는 질문을 던지며 스텐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우리 조직’에서 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렇게 빨리 알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 마침 울름 남작의 사망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죽이라고 지시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럴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베론 공작이 자신의 치부를 많이 알고 있는 심복의 입을 막기 위해서 죽였을까?
이 또한 자연스럽지 않았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므로 경찰에서 풀려난 뒤 곧바로 죽는다면 누구보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사람이 바로 오베론 공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는 바로 스텐커 - 우리 조직 - 의 소행인 것이다.
스텐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아니야.”
“그럼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함구령이 내려지고 사망 원인이 나오기까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말하기가 좀 그래.”
“······.”
“다른 경로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
“범인은 누구죠?”
스텐커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루트 오베론.”
“네?”
“오베론 공작의 둘째 아들. 물론 직접 실행한 건 아니야. 지시를 한 거지.”
“세상에!”
“증거를 찾기는 어려울 거야. 그러니 잡아들일 수도 없어.”
그리마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스텐커가 추가로 설명해 주었다.
함께하는 동지로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 정보 공유는 필요했다.
“루트 오베론은 아버지한테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에 불타고 있어. 복수를 하고 잃어버린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어 하지. 그에게 최상의 보상이란 바로 아버지의 힘을 차지하는 거야. 그러려면 일단 아버지 곁으로 바싹 다가가야 해. 그래서 아버지의 측근부터 치운 거야.”
“······!”
“이런 일에는 경찰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어. 말했다시피 증거가 남지 않을뿐더러 증거가 있다 해도 가장 큰 권력자의 가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쩌겠어? 개입하는 즉시 정치적인 사건이 돼 버리는 거야.”
“하아!”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아. 오베론 공작의 심복이 죽었어. 원인을 몰라. 그렇다면 공작은 황제를 의심하게 될 테고 황제는 그런 공작을 괘씸하게 생각하겠지. 오베론 공작 가문은 크게 흔들리게 되겠지.”
오베론 공작 가문은 황제도 조심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흔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황제 또한 타격을 받을 수 있지만, 스텐커는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리마는 오베론 공작이 저지른 잘못들과 그의 심복인 울름 남작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협한 일로 인해 오베론 공작에 대한 반감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현직 경찰이 그러하듯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에게 타격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협조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루트 오베론이 자네에게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당분간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는 일에 집중할 테니까. 섣불리 경찰을 건드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그건 다행이지만······.”
“자네는 울름 남작 사망 사건 조사와는 관련이 없을 테니, 아예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좋아. 동부 공업 지구 사태와 관련하여 울름 남작과 그 부하들을 조사한 일에 대해서는 증거를 확실히 확보하고 있어. 나중에 다시 써먹을 일이 있을 테니까.”
“루트 오베론을 조사하거나 감시할 필요는 없겠어요?”
“지금은 날뛰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아.”
“···알겠습니다.”
“조만간 경찰 인사가 대대적으로 단행될 거라는 소문이 있어.”
“네?”
나도 모르는 경찰 인사를 스텐커가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마는 갑작스러운 인사 소식에 깜짝 놀랐다.
스텐커는 상무대신과 만나고 온 바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지만, 굳이 출처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동부 공업 지구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잖아.”
“그야······.”
“이번 인사에서는 경찰 안에 남아 있던 귀족들이 대거 옷을 벗고 평민 출신들이 승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허!”
그리마는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공식적으로 인사 결정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야. 그러니 그동안 실적을 많이 올리는 게 좋겠지.”
“실적을 올리라고 해도 갑자기 어디서······.”
“유흥가 쪽이 어때? 전쟁 이후 그쪽 경기가 완전히 죽어서 암흑가 조직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고 극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고 하던데. 경찰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뭐,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장은 오베론 공작과 관련된 일은 거리를 두는 게 좋아. 공작도 심복이 사망한 일로 이만저만 화가 나지 않았을 테니까. 가시 돋친 고슴도치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그러니 민생 안정을 위한 폭력배 소탕에 힘쓰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많은 일들이 비밀스럽게 가려져 있어 답답하고 의심스러웠지만, 자신이 나아갈 방향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올 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가 일어나고 울름 남작을 체포하고 그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여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승진이라는 말은 새로운 기대를 품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스텐커는 정원을 지나 대문을 나서는 그리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남방군 출신 칼잡이와 눈인사를 하고는 차를 타고 안전 가옥을 떠났다.
“마젠스 자작에 대해서는 파악했나?”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의 조수가 즉시 대답했다.
“오베론으로 보낸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음.”
스텐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루트 오베론이 벌이고 있는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루트 오베론이 보고할 리는 없었다.
그를 풀어 줄 당시에 위협이나 협박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핵심 인물을 그냥 놓아줄 수도 없었다.
그에게 원한이 깊은 남방군 출신 반란 파일럿들이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마침 루트 오베론을 잡을 때 함께 붙잡아 2년 동안 가두고 심문한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경호 기사 군터와 비서 레톤.
경호 기사는 귀족 출신으로 오랫동안 검을 수련해 왔다.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인내심, 충성심이 강한 경우가 많다는 남방군 출신 반란 파일럿들이 조언에 따라 경호 기사를 제외하고 비서를 포섭했다.
레톤은 자신들이 황제 산하의 비밀 요원이라는 말과 2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감금 생활, 실제로 건네준 1만 골드라는 거금과 장래 관직에 대한 약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언제 배신할지, 루트가 레톤을 언제까지 신뢰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는 루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텐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기사님께 알려야겠어.”
울름 남작의 사망은 정국에 큰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루산의 지시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스텐커는 루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루산은 그 편지를 받지 못했다.
편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아라드 변경으로 가느라 변경 8구역을 떠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