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견고한 마음을 두드려 본다
254. 견고한 마음을 두드려 본다
아라드 변경의 오래된 개척촌은 강렬한 남방의 햇살에 퇴색된, 높은 바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괴수를 막기 위해 쌓은 이 고전적인 변경 구조물 아래쪽에는 두껍게 쌓인 이끼와 자르고 잘라도 계속해서 올라오는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쉬고 있던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은근히 땅을 흔드는 멕 나이트의 걸음에 놀라 성벽 위로 쪼르르 올라갔다.
호른은 이 개척촌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내려 했다.
예전에야 이 개척촌이 괴수와 만나는 최전선이었겠지만 지금은 변경의 가장 후방으로 최전방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애물단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양의 물자를 빠르게 실어 나르기 위해 도로를 크고 반듯하게 내려 해도 이 성벽에 둘러싸인 개척촌이 막고 있어 빙 둘러 새로운 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괴수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개척촌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아라드 왕국에서 시작한 도로는 변경 초입에 있는 이 개척촌을 관통하지 못하고 성벽 밖을 빙 돌아 서쪽으로 이어졌다.
반듯하고 평탄한 도로 대신 언덕을 오르내리고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새 도로를 만드는 수고를 하게 되어 효율적인 변경 개척을 방해했다고 호른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래서 변경으로 들어오는 생필품 지원 대상에서 이 개척촌을 제외해 버렸다.
“단장님께서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옛 개척촌을 그대로 두면 통행에 소요되는 시간과 수고가 늘어납니다. 하지만, 말을 안 듣는다고 멕 나이트로 성벽을 밀고 개척촌을 짓밟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굴복하게 되겠지요.”
003을 조종하는 루산은 호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개척촌의 오래된 성벽 밖으로 돌아갔다.
이 개척촌은 그동안 밀려온 수많은 피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멕 나이트를 동원해 이 일대의 괴수를 모조리 소탕했기 때문에 이제 괴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순식간에 안전한 변경 후방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러한 변화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해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가시를 돋워 변화에 맞서다 도태되는 것이다.
비단 이 오래된 개척촌뿐이 아니었다.
필센 제국의 귀족들도 이반 황제가 선도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 저항하다 멸문을 당했고, 마지못해 수용한 귀족들도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문의 재산을 사업으로 전환하지 않은 경우에는 가세가 크게 기울고 말았다.
루산은 문득 클라크와 동부 공업 지구 사태가 떠올랐다.
그것이 한 번 불고 사라지는 돌풍인지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강력한 태풍의 전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바람이 불었다.
어쩌다 보니 그 바람 한가운데에 있었던 루산은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벽 쪽으로 다가가 개척촌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성벽을 두드렸다.
쿵! 쿵!
003의 단단한 주먹이 성벽을 두드릴 때마다 진동과 함께 굉음이 울렸다.
성벽에 붙어 있던 도마뱀과 작은 곤충들이 놀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 채 부리나케 달아나고, 성벽에 둘러싸인 옛 개척촌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굉음이었다.
[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바이크도 루산의 이상한 행동에 놀라 물었다.
[견고한 마음을 두드려 보는 중이야.]
[네? 이 마을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지. 변화는 두려운 거니까.]
[우리 대장님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니까.]
그러면서도 바이크는 루산을 따라 성벽 가까이 붙어 움직이며 성벽을 쳤다.
쿵! 쿵!
[나도! 나도! 마음을 두드려 볼래!]
시에나도 동참했다.
쿵! 쿵!
그러자 이스타드 변경에서 온 초보 파일럿들도 형을 따라하는 꼬마들처럼 괜히 선배 파일럿들을 따라해 보게 되었다.
쿵쿵쿵쿵!
멕 나이트 십여 대가 성벽을 두드리며 지나가자 개척촌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성벽 밖을 지나가는 파일럿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직 루산만이 개척촌 사람들의 반응을 궁금해했지만, 거대한 멕 나이트의 걸음으로 성벽을 돌아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고 개척촌을 지나자 이내 잊어 버렸다.
그러나 개척촌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새롭게 우리 변경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외부인들이 자기들 말을 안 들으면 멕 나이트로 부숴 버리겠다고 위협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 같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으음······!”
“하아······!”
“저기···, 사실 변경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오고 나서 우리 마을 주위에 괴수가 사라졌지 않습니까? 서쪽으로도 새로운 개척촌이 수없이 지어지고 있다고 하고, 멕 나이트도 엄청 많고······. 또 식량과 온갖 생필품을 실은 수레들이 계속 지나가는데 우리 마을에는 들르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성벽을 트고 길을 내는 데 협조하는 것도······.”
“그건 안 되오!”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건······!”
옛 개척촌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나간 루산은 알 수 없었다.
***
옛 개척촌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도로 옆에 아라드 변경의 풍경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공장 건물이 있었다.
바로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나 연료·윤활유 생산 공장이었다.
규모는 레이크 시티에 있는 것의 2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꾸준히 증설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루산과 함께 온 멕 워커들이 등에 짊어지고 온 물건 대부분이 이 공장 설비였던 것이다.
루산이 왔다는 소식에 칼리슈가 달려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기사님!”
“칼리슈 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두 사람은 방벽과 철조망으로 이중으로 둘러싸인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 앞마당에서 나무 그늘 아래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멕 워커의 하역 작업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부에서 큰 전공을 세우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루산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칼리슈는 자신의 영웅의 활약상이 과소평가되는 것에 분개한 소년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고 기사님 덕에 가능했던 일이겠죠. 우리 연구소에 또 커다란 수익 사업을 안겨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전장에서 손상된 멕 나이트 수백 대를 재조립해서 보내는 거 말이에요.”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죠.”
레이크 시티 정비 공장을 키우고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벌인 일이라 자꾸 칭찬을 받으니 루산은 무안했다.
그럼에도 칼리슈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연구소에 큰 도움을 주신 것은 사실이니까 자신의 공을 너무 깎지는 마세요.”
칼리슈.
루산이 처음으로 만난 마법사이자 마법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걷어 낸 마법사.
원수를 알아내는 데 가장 큰 단서를 주었을 뿐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순박한 마법사.
가프 마법 연구소의 대표로 있는 가라로슈의 제자이며 향후 가프 마법 연구소를 책임질 후보 중 한 사람이라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사실상 루산이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루산이 복수를 위해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을 풀어 준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가프 마법 연구소의 수익 1퍼센트를 주신다는 걸 거절하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우리 연구소에 해 주신 일은 그보다 훨씬 큰데······.”
칼리슈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루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대신 가프 마법 연구소의 명예 마법사가 되었잖아요.”
칼리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돈 들어갈 일이 많지 않습니까?”
“많죠. 그래도 칼리슈 님이 아라드 변경에 식량을 대 주신 덕에 큰 어려움은 넘기는 중입니다.”
사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아라드 변경으로 밀려온 피란민을 위해 식량을 대 줄 의무가 없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변경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괴수 부산물의 가공과 유통을 담당하고, 변경을 통치하고 개발하고 괴수를 사냥해 부산물을 납품하는 일은 변경 8구역이 담당하기로 비밀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아라드 변경 본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변경으로 들어오는 피란민의 수가 너무 많아 아라드 변경 본부에서 다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칼리슈가 가라로슈에게 편지를 써 지원을 호소했던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당장 도움을 준다면 우리는 향후 광대한 변경 구역에서 안정적으로 괴수 부산물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칼리슈의 성품을 아는 루산은 꼭 이익을 위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루산은 민망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 않도록 얼른 화제를 돌렸다.
“처음 개발권을 획득할 때만 해도 마나 연료 공장을 이곳에 짓는 게 당연했는데, 지금 보니 위치가 많이 아쉽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사냥터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어요.”
“개척 도시로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다섯 개의 개척 도시에 소규모로 하나씩 지으면 사냥터와도 가까워 마나 손실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생산 시설의 규모를 줄이는 건 쉽지 않아요.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가공 설비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소규모로 한다는 건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면 관리할 인력도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곤란하죠.”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현재는 개척 도시가 안정되지 않아 우리가 거기로 들어가면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렇지 않아도 개척 도시가 안정되면 이전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간 개척 도시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낭비가 너무 크니까요. 현재 다섯 개가 있는 최전방 개척 도시 중 가운데 있는 도시로 옮길 생각이에요. 다만 지금과 같은 난민촌 분위기에서는 옮길 수 없어요.”
칼리슈가 무겁게 말했다.
마법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생산물은 무척 고가이고 구하기 어렵다. 호기심과 탐심이 발동하여 마법 연구소의 담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 연구소는 외따로 떨어진 채 높은 담장과 강력한 경비 병력으로 시설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난민촌이나 다름없는 개척 도시로 이전하면 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루산은 칼리슈의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가프 마법 연구소는 코부스 지방에서 레이크 시티로 마나 연료·윤활유 생산 시설, 레오파드 생산 시설을 옮긴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민간 도시 속으로 들어오는 데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던 것이다.
개척 도시로 생산 시설을 옮기면 괴수 부산물 가공품 생산 효율이 크게 올라갈 테니 양쪽 모두 이로운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개척 기지를 안정화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죠. 무리하지는 마세요.”
칼리슈의 현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산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전에 괴수 목장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여기로 오는 길에 들렀더니 이제 정상적인 생산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하루 생산량이 20드럼은 될 거랍니다.”
“와! 그 정도면 현재 레이크 시티로 들어오는 물량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네. 그래서 그쪽에도 차라리 생산 공장을 짓는 게 더 효율이 높지 않나 싶은데요. 이동 거리를 계산할 때 원료를 나르는 것보다 생산품을 나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칼리슈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고려할 부분이 많아요. 생산량이 꾸준한지 일정 기간 살펴볼 필요가 있고, 마나 연료봉 용기를 그쪽으로 나를 때의 비용이나 설비가 고장 났을 때 수리 문제, 책임자를 그 먼 곳에 이주시켰을 때 일어날 문제도 따져 봐야 하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일대에 괴수 목장 가능 부지가 여러 개 있다고 하니 레이크 시티 생산량을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인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기사님. 그 문제에 대해서 스승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업 상 나눌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다음부터는 아니었다.
좀 더 비밀스럽고 은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루산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형 거미 있잖습니까. 8족 반구형 산악 운반차인가 하는 거 말이에요.”
“네. 있죠. 그런데 그건 왜······?”
“가프 연구소에 몇 대나 있나요?”
“한 대 있죠.”
“아!”
루산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쉽다는 뜻인지 알았다는 뜻인지 모호했다.
칼리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변경에서의 안전 때문이라면 멕 나이트가 훨씬 안전했다.
대형 거미는 외판이 두껍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을 나르기 위해서라면 비효율적이었다.
멕 워커나 수레가 동일한 무게를 나르는 데 더 저렴했다.
루산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사람을 운반해 볼까 해서요.”
“누구를요?”
루산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칼리슈는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