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공단 사장도 나쁘지 않지
258. 공단 사장도 나쁘지 않지
“각하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니트라 공작은 루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기세였다.
“챠콜 레인저 3중대를 아라드 변경 정찰대 소속으로 완전히 바꾸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루산은 아라드 전쟁에서 가프 용병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챠콜 레인저 3중대를 아라드 변경 치안 유지를 위해 빌린 적이 있었다.
부르사 왕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을 변경 소속으로 확실히 돌리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를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키워 아라드 변경에서 멕 나이트 파일럿이 빠져 나가 생긴 공백을 메워 볼 생각이었다.
적국의 멕 나이트가 아닌 괴수를 상대하는 데는 일반인을 선발해 키우는 것보다 훈련이 잘된 레인저를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아라드 레인저, 이스타드 출신 젊은 파일럿들이면 부르사 왕국으로 빠져나가는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질적인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수적으로는 충분했다.
“허허, 나는 잊고 있었는데······.”
니트라 공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 별일 아니었다.
이미 변경에서 근무하고 있는 레인저 일개 중대를 단지 소속만 바꾸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겠소. 바로 조치하지요.”
“감사합니다, 각하.”
그러나 니트라 공작에게는 루산이 크든 작든 부탁을 해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역시 루산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는데 마침 먼저 부탁을 해 와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노회한 애국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필센 제국에서 동맹국에 참전 요청을 해 왔기 때문에 우리 군도 조만간 아우로라 대륙으로 원정을 떠나야 하오. 혹시 알고 계시오?”
“그렇습니까? 저는 북부 전선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북부에 가지 않았어도 필센 제국군 내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루산의 말에 니트라 공작은 살짝 실망했으나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군은 사실 원정을 떠날 형편이 아니오.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오. 마음 같아서는 참전 요청을 거절하고 싶은데, 필센 제국이 우리나라를 구해 준 것은 사실이라 그럴 수가 없지요. 그래서 말인데······.”
니트라 공작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병력을 보내더라도 후방에서 수송 부대나 경비 부대 역할을 하는 쪽으로 빼 줄 수는 없겠소?”
“네?”
“아라드 왕국은 작은 나라요. 멕 나이트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아우로라 연합의 멕과 공이 가져다 준 레오파드로 어찌어찌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르면서 파일럿 자원이 단기간에 급격히 감소했어요. 전쟁은 유능한 파일럿들을 잡아먹고 그 자리에 솜털도 못 벗은 애송이들을 앉히고 말았지 뭡니까. 참으로 민망한 부탁이지만, 윗선에 이러한 사정을 말 좀 해 주시오. 필센 제국에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라 공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부탁하는 것이오.”
니트라 공작의 비공식적인 부탁을 듣고 루산은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에게는 이런 부탁을 들어줄 권한이 없었다.
아니,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필센 제국 정부나 군부에 속해 있지를 않았다.
그런 척해 왔을 뿐.
이제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필센 제국군 특수 부대 요원 역할로 인해 곤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루산은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도출해 내느라 머리를 팽팽 돌렸다.
이윽고 루산은 짐짓 실망한 듯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
“필센 제국이라고 사정이 특별히 더 좋겠습니까?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해 동맹국 어느 나라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바로 필센 제국입니다. 1만 이상의 멕 나이트 파일럿과 그보다 많은 멕 워커 파일럿, 200만의 장병들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필센 제국은 크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니 그들의 목숨은 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까?”
“아, 그런 말이 아니고······!”
니트라 장군이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물론 압니다. 아라드 왕국의 사정이야 제가 누구보다 잘 알지요. 국토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수백만의 백성들이 피란을 떠났고, 복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도움을 드리기 위해 왔지 않습니까?”
“하아! 내가 어리석은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오. 부끄럽소. 사과하리다.”
이 나라의 실권자가 자신의 이기적인 발언을 즉석에서 사과하자 루산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 저는 명령을 받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파일럿이지 부대 배치, 작전 계획 수립에는 전혀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권한이 있더라도 방금과 같은 부탁은 들어드리기 어렵습니다.”
니트라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만약 제가 어느 전선에서든 작전을 수행하다 근처에서 아라드 왕국군을 보게 된다면 기꺼이 협력하여 아라드의 용맹하고 순박한 기사들이 아깝게 목숨을 잃는 일은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루산이 동방으로 간다 해도 드넓은 동방 전선에서 아라드 왕국군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사실상 실행할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간절한 니트라 장군은 그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루산이 아라드 왕국에 와서 얼마나 대단한 전공을 세웠는지 알고 있는 그는 나중에라도 루산이 아라드의 젊은 기사들을 지켜줄 것만 같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니트라 장군은 루산의 손을 꼭 잡고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그것이 루산의 가슴을 짓눌렀다.
말은 참으로 무거운 것이라 당장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라도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트라 장군과 헤어진 루산은 수도를 떠나 아라드 변경으로 돌아갔다.
칼리슈가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 생산 시설에서는 멕 워커에 괴수 부산물을 실었다.
이곳에서는 괴수 혈액으로 마나 연료, 윤활유를 생산할 뿐 다른 부산물은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8구역에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다른 마법 연구소에 팔거나 자체 소비하도록 실어 나르는 것이다.
칼리슈와 작별한 뒤에는 아라드 변경을 지나며 챠콜 레인저 3중대에서 적절한 인원을 선발하여 멕 나이트 조종 훈련을 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레오파드를 아라드 왕국군에 넘겨주고 홀가분해진 이스타드 변경 출신 초보 파일럿들도 남겨 챠콜 레인저 출신들과 함께 훈련하도록 했다.
“현재로서는 몇 명이나 동방으로 떠날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 레보르크는 동방으로 떠나기에 적합한 요원들을 순위를 매겨 명단을 작성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레보르크가 묵직하게 대답했다.
“레보르크가 빠져 있는 동안 아라드 변경 전투 요원 지휘는 오토가 맡습니다. 이스타드 출신, 레인저 출신, 그리고 피란민 출신 가리지 말고 철저히 훈련시켜 놓으세요.”
“알겠소.”
오토가 짧게 대답했다.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에게 뒷일을 당부한 루산은 아라드 변경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다시 원시의 땅을 뚫고 레이크 시티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처럼 많이 걷는 사람은 없을 거야.]
[덕분에 건강하잖아.]
[하긴 그래서 내 허벅지가 네 허리통만 하긴 해.]
[야! 내 허리 봤어? 훨씬 가늘거든! 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비교해? 그리고 자꾸 여자의 신체 부위를 거론하면서 네 건강을 자랑하는데, 발정 났어?]
[바, 바, 발정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정나미가 싹 가시게 하냐? 그 고운 입에서 나올 말이야?]
[고운 입? 너 요새 사용하는 단어가 재수 없어. 알아?]
[치! 안 통하네.]
[뭐라고?]
[농담이야, 농담! 너한테 관심 없거든? 괜히 발끈하고 있어.]
바이크와 시에나가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루산은 미소를 지었다.
동방의 부르사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일단 레이크 시티로 돌아가면 노바로 가서 바덴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발걸음만 아니라 마음도 가벼워 저도 모르게 실없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 허벅지가 너보다 굵다.]
[네? 뭐라고요, 대장님?]
[···아니다.]
누구보다 많이 걷고 많은 괴수를 사냥해 온 루산은 누구보다 허벅지에 자신이 있었다.
바덴을 만날 날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
루트는 공작을 대신하여 오베론 지방을 순시하는 길에 오베론 공단으로 가서 마젠스 자작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순시 차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반갑소.”
“공단 운영 상황은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게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보고를 시작할까요?”
루트는 고개를 저었다.
“마젠스 자작의 능력이야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 건 됐어요.”
마젠스 자작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루트를 쳐다보았다.
루트는 2년 가까운 감금 생활의 여파로 여전히 예전의 체형으로 돌아오지 않아 홀쭉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빛이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마젠스 자작이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때 루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가문에서도 몇 없을 거예요. 자작도 모르지 않습니까?”
“네? 네. 솔직히 모릅니다.”
“황제에게 붙잡혀 2년 동안 고문과 심문을 당하며 지냈습니다. 이 몸이 증거죠.”
루트는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젠스 자작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후훗! 어쩌겠어요? 오베론 공작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세상에······!”
“그동안 내 행적과 오베론 가문이 해 온 일에 대해 꼬치꼬치 묻더군요. 다 대답했습니다.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모두 다 말했죠.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더군요.”
루트의 눈에서 다시 한번 불똥이 튀었다.
“굳이 죽일 가치를 못 느꼈는지 아니면 나를 죽였을 때 발생할 문제를 거북하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를 풀어 주더군요. 뭐, 우리 가문에 대한 일은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죠.”
마젠스 자작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루트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그들이 나의 복수심을 얼마나 키웠는지는 모를 겁니다. 알았더라면 풀어 줬을 리가 없죠.”
“······!”
“나는 나를 버린 공작님과 나를 감금해 고문한 황제에게 복수할 겁니다. 이 가문을 차지하고 이 나라를 차지할 겁니다!”
마젠스 자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죠. 나나 당신은 오베론 공작께서 거사를 일으켜 이 나라를 차지하리라 믿고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 온 사람들 아닙니까?”
“으음!”
마젠스 자작이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오베론 공작의 최측근이었다.
울름 남작이 겉으로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면 마젠스 자작은 오베론 가문의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고 통솔해 온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런 그가 오베론 공단 사장이라는, 남들이 보면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오베론 공작을 따라 노바로 가지도 못하고 오베론 지방을 다스리는 대리인으로 남지도 못한 채, 한직으로 밀려난 이유는 오베론 공작이 거사를 포기하고 황제 밑에서 재상이 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오베론 가문의 핵심 재산 중 하나인 오베론 공단 사장을 겸하고 있었지만, 거사가 일어난 뒤에는 황제가 된 오베론 공작을 측근에서 보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작이 그 길을 포기하는 바람에 여전히 공단 사장 자리를 맡고 있었고, 수도로 올라간 공작은 그를 불러올리지 않았다.
마젠스 자작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오베론 공작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 많은 일을 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오베론 공작님이나 바트나 야망이 딱 그 정도였던 것이지요. 황제에게 겁을 먹고 움츠러든 개가 된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그래서 당신한테 제안합니다. 내가 이 가문을 차지하고 이 나라를 차지하는 일을 도우세요. 당신이 오베론 공작님을 위해 15년 이상 해 온 일이 헛되지 않도록 해 줄 테니까.”
루트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마젠스 자작을 바라보았다.
마젠스 자작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루트가 실망 어린 눈으로 마젠스 자작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단 사장도 나쁘지 않지. 그럼 여생을 편히 누리다 가시구려.”
그 말이 마젠스 자작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루트의 눈에서 뜨거운 분노와 냉정한 결단을 읽었다.
지금 이 자리는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루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공자를 따르겠습니다!”
한때 오베론 지방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소문났으며 오베론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해 오고 오베론 공작의 거사를 강력히 지지했던 마젠스 자작이 루트 오베론에게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