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너에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
261. 너에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불심 검문을 진행하던 무장 경찰의 모자 위로 꽃잎이 할랑할랑 춤을 추며 떨어졌다.
지은 죄도 없이 겁을 먹고 있던 젊은 남자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감돌았다.
“왜 웃어? 내가 우스워?”
“아, 아닙니다.”
얼른 웃음을 수습하고 표정을 굳힌 젊은 남자의 머리 위에도 꽃잎이 팔랑팔랑 흔들리다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무장 경찰도 가슴에 낀 차가운 얼음이 사르르 녹았다.
“노바 대학 다녀?”
“네? 네!”
“시위 같은 거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알았어?”
“네!”
“가 봐!”
“고맙습니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몰라도 꽃잎 덕분에 불심 검문을 가볍게 통과한 남자가 경찰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멀어졌다.
무장 경찰이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짓다가 이내 엄격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표적을 향해 다가가 다시 불심 검문을 진행했다.
사방에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만개한 봄꽃은 몇 달째 지속되고 있는 경찰의 엄격한 검문검색으로 잔뜩 주눅 든 노바 사람들의 가슴마저 들뜨게 했다.
노천카페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클라크의 머리와 어깨, 마음에도 봄의 꽃잎은 떨어졌다.
그러나 클라크는 꽃잎이 떨어진 자리가 아팠다.
자기만 비겁한 도망자가 되어 이 찬란한 봄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간의 힘은 지난겨울의 기억을 희미하게 했고, 이 정도의 아픔쯤은 며칠 자고 나면 아무는 어린 시절 무릎 상처처럼 견딜 만했다.
여전히 그날의 일들이 간간이 꿈으로 재생되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기는 했지만.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클라크는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냈다.
<수학의 바른길>
표지에 ‘명문대 합격생들이 선택한 최고의 수험서’라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는 두꺼운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펼쳤다.
클라크는 종잇장을 넘겼다.
연필로 그은 밑줄과 틀린 문제에 체크해 둔 표시, 이해하지 못해 접어 두었던 자국이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남아 있었다.
클라크는 원래 수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수학을 못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잘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 그리고 문학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보는 책은 늘 역사책 아니면 문학책이었다.
그러던 것이 동부 공업 지구 사태 이후에 바뀌었다.
수학 공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이렇게 외출할 때에도 짬이 날 때는 수학책을 봤다.
수학이 좋았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확실한 정답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정답 없는 세상에 유일하게 확실한 정답이 있음을 알려 주는 과목이라 좋았다.
집중해서 수학 문제를 풀 때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좋았다.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꽃잎들이 허공에 흩날리다 클라크의 머리와 어깨, 등에 붙었다.
개중 몇 개가 책 위로 떨어졌다.
클라크는 글자와 숫자를 가린 꽃잎을 밖으로 쳐내며 간간이 페이지를 넘길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칼과 어깨에 묻은 꽃잎을 털어 내며 말을 걸기 전까지는.
“누가 이런 데서 수학 공부를 하니?”
몰입이 깨진 클라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쳐다보았다.
루산이 바덴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사님!”
루산이 노바에 온다는 것과 이곳에서 점심 약속을 잡았으니 꼭 오라는 이야기를 아침에 바덴으로부터 들었지만, 루산의 얼굴을 보자마자 클라크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고용 관계를 끝내겠다고 루산이 차갑게 말한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두려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클라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바덴을 위해 의자를 빼 주고 클라크를 마주 보고 앉았다.
“이렇게 좋은 봄날에 꽃비를 맞으며 수학책을 보고 있는 학생이라니, 묘하게 멋지구나.”
루산의 말에 클라크가 얼굴을 붉히며 책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그제야 루산과 바덴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루산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고, 바덴은 백화점에서 바로 산 듯한 깨끗하고 세련된 연분홍 원피스에 빨간색 브로치, 자주색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마치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차려 입었는데 결혼하는 주인공들보다 훨씬 눈에 띄는 커플 같았다.
종업원이 다가오자 바덴이 알아서 주문을 했다.
루산이 클라크에게 말했다.
“그래도 너에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
“네? 뭘요?”
“우리 결혼해.”
클라크는 얼른 루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껌벅이며 루산과 바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요?’
클라크가 눈으로 묻자 바덴이 수줍은 미소로 그렇다고 알려 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식을 올리기로 했어. 내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나중에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야.”
“···네.”
클라크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릴 적 막연히 동경해 온 동네 누나를 다른 남자가 가로채 간 데 대한 미움과 질투, 공허함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자랐다.
바덴을 좋아하지만 여자로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크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와 가장 가까운 여자가 결합함으로써 졸지에 외톨이가 돼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식사가 나오고, 차를 마시고, 공부와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클라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꽃비를 맞으며 웃고 있는 루산과 바덴은 아름다웠다.
클라크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짙은 상실감과 고독감에 휩싸였다.
얼른 명문대 합격생들이 선택한 최고의 수험서 <수학의 바른길>을 보고 싶었다.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려는 것인지 몰라도 노바는 변경 개척촌 출신 소년에게 유독 잔인한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
클라크는 다시 공부하러 노바 대학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바움 대학은 두 번 다시 가지 않기로 암묵적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에 노바 대학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크를 태워다 준 루산과 바덴은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동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갔다.
“공부는 잘하고 있죠? 물어보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어요.”
“잘 참았어요, 루산.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까 클라크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요.”
“우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놀라고 당황해서 그랬을 거예요. 왜 있잖아요, 형이나 누나가 결혼한다고 하면 동생들은 괜히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
바덴의 말에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누나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서운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두 사람은 노바 대학 교정을 걸었다.
여기도 머리 위로 꽃잎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바덴은 이 대학을 다니던 추억과 차오르는 행복감에 저도 모르게 루산의 팔짱을 꼈다.
꽃이 주린 배를 채워 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은 확실했다.
루산은 자신의 팔에 바덴의 가느다란 팔이 감기고 부드러운 가슴이 살짝 닿자 가슴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그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호흡을 고른 뒤 화제를 돌렸다.
“파르나 시에 집을 구하겠다고요?”
“그럴까 생각 중이에요. 노바와 변경 8구역은 너무 멀잖아요. 파르나 시가 그 중간쯤 되고, 열차도 통과하고, 또 풍경도 예쁘고···, 무엇보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당신이 휴가를 나올 날을 미리 편지로 알려 주면 가서 기다릴게요.”
사실 바덴이 파르나 시에 집을 마련하려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었다.
파르나 지방은 너른 농토와 얕은 언덕들이 많아 예로부터 식량과 과일이 풍부한 땅이었다.
바덴이 장차 필센 제국 전역으로 농업 기지 사업을 확대할 때 첫 번째 대상지로 꼽은 곳이 바로 중부에 자리한 파르나 지방이었던 것이다.
게다나 파르나 남쪽에는 각종 소비재를 만드는 작은 공장들이 많았다.
규모가 큰 공장들을 주로 운영하는 바덴으로서는 충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지방인 것이다.
그러나 나중이라면 몰라도 굳이 지금 그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 센스는 있었다.
감이 부족한 쪽은 오히려 루산이었다.
“중간이라고 해도 열차에서 하루 이틀은 자야할 텐데, 당신이 그런 고생을 하는 건 마음에 걸려요.”
여기까지는 바덴을 흡족하게 했다.
“그리고 전보다는 자주 본다고 해도 몇 번이나 보겠어요? 며칠을 위해서 집을 산다는 건······.”
지나친 낭비가 아닌가?
이 말까지는 차마 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다행히 바덴은 루산이 살아온 삶과 그의 성격을 조금은 아는 사람이었고, 이런 일로 토라지거나 투정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며칠 안 되는 날을 혼자서 열차만 타다 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당신이 휴가를 낼 때마다 서로가 절반씩 양보하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3일은 늘어난다니까요.”
바덴의 말이 너무나 예뻐 루산은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바덴.”
“정말요? 그럼 파르나에 예쁜 집을 지을 거예요. 노바에도 한 채, 레이크 시티에도 한 채.”
“우리는 집 부자가 되겠군요?”
노바로 오기 직전에 새로운 빚을 235만 골드나 지고 왔는데 며칠 살지도 않을 집을 세 채나 짓느냐고 타박하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루산도 그 정도까지 감이 없지는 않았다.
이번 이야기는 농담이었다.
“당신이 노바에 오거나 내가 레이크 시티로 갈 때 매번 호텔에서 지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레이크 시티에는 호텔도 없고······.”
“그렇다면 레이크 시티에 호텔을 지으면 되겠군요?”
“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앞으로 사업가들이 더 많이 방문할 테니 호텔이 있으면 확실히 좋을 것 같아요. 변경 투어를 위해서도 좋고. 반달 호수 근처, 경치 좋은 곳에 호텔을 짓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뜨면 거대 괴수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광경, 상상만 해도 재밌지 않아요?”
“투숙객이 기절하겠군요.”
“그게 바로 변경 여행의 묘미죠. 부자 손님들은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하기 위해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한답니다. 이 별장 사장의 말을 믿고 투자하세요, 기사님.”
“그 별장, 지금 폐업하지 않았나요?”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세요.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으로 인해 잠시 쉬고 있지만, 지금 재개장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답니다. 엄청난 성과를 보여 드릴 날이 머지않았어요!”
“오호! 자신만만하시군요.”
“그럼요! 인생은 자신감이거든요. 의기소침한 사람에게 누가 투자하겠어요? 이렇게 투자자를 꾀는 거랍니다, 기사님.”
“이런! 어쩌죠? 벌써 당신한테 넘어간 것 같아요! 얼마면 되겠어요?”
팔짱을 꼭 낀 두 사람은 진담 반 농담 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꽃잎이 날리는 봄날의 교정을 걸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자마자 두 사람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수백 대의 멕 나이트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루산이지만, 결혼 허가를 받으러 가는 길은 두려웠다.
평범한 결혼이 아니기에 긴장감은 더욱 컸다.
바덴 역시 마찬가지.
정부 고위 관리든 중요한 거래처 사장이든 누구를 만나도 주눅 들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할까 두려워 차마 시동을 켜지 못했다.
그때 루산이 운전대를 쥐고 있는 바데의 손을 잡아 주었다.
바덴이 고개를 돌려 루산을 쳐다보았다.
“걱정 말아요, 바덴.”
“네, 걱정하지 않을게요.”
바덴이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노바 대학 정문을 통과했다.
자동차가 지나간 공간을 메우기 위해 꽃잎들이 춤을 추며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