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솔직한 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262. 솔직한 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루산은 꽃다발과 포도주, 쿠키 두 봉지를 샀다.
처음 바덴의 집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선물이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루산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바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괜찮아요.”
사실 그녀도 잘 몰랐다.
결혼이 처음이라.
어쨌든 어설픈 두 사람은 소박한 선물을 구입해 차에 싣고 법원 근처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었다.
한편 빵집에서 빵을 만들고 있던 바덴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점점 가까워지는 차 소리를 듣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던 바덴의 말 때문이었다.
“오늘 오후에 중요한 손님이 올 거예요.”
“중요한 손님? 누구?”
“그냥 그렇게 알고 계세요.”
바덴이 나간 뒤로 그녀의 부모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바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업상의 만남을 집에서 가진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딸의 말투와 표정에서 두 사람은 직감했다.
“설마 결혼할 사람이 있는 건가?”
“갑자기 결혼까지야 가겠어요?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이 있어 소개하겠다는 말이겠죠.”
“그게 그거지.”
“어쨌든 다행이에요. 이 나이 먹도록 혼자 지내는 게 걸렸는데.”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나이 먹었다고 무조건 결혼하라는 법이라도 있어? 괜찮은 놈이어야지.”
“어이구! 이 양반, 바덴이 결혼한다고 하면 울겠네, 울겠어.”
“······.”
“우리 바덴이 어련히 괜찮은 놈으로 골랐을까. 결혼할 남자 데려왔다고 하면 인상 쓰지 말고 어른답게 인자한 미소로 맞아 줘요. 알았어요?”
“······.”
“알았냐고?”
“알았다고!”
그러나 바덴과 함께 차에서 내려 꽃다발과 이런저런 꾸러미를 챙겨 들고 빵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루산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덴의 아버지 굼머스는 얼굴이 굳었다.
바덴의 어머니도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루산이 자작 가문의 장자로, 바덴을 고용하고 있는 보스이며, 현재 변경 구역에서 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덴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부자라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얼굴도 잘났고 몸도 탄탄한 젊은이가 돈까지 많으면 좋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냥 귀족 가문도 아니고 자작 가문의 장자라는 점에서 일단 크게 걸렸다.
이반 황제가 아무리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다지만, 고위 관리, 고위 군인, 큰 사업가들은 거의 다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었다.
신분은 엄염한 현실로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덴이 비록 노바 대학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똑똑하고 재산을 크게 불려 줄 정도로 사업을 야무지게 경영해도 작위가 있는 귀족 가문에서 평민을 며느리로 맞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은 신문 연재소설 아니면 연극에서나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90퍼센트 비극으로 끝이 난다.
10퍼센트는 행복한 결말을 맺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행복해지는 것이고 이야기 전체에서 시련으로 점철돼 있는 삶게 된다.
딸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었다.
게다가 변경이라니!
루산과 바덴이 변경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다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변경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괴수가 활보하고 인생의 막다른 길에 도달한 사람들이나 가는 끔찍한 곳이었다.
애지중지 키워 온 자랑스러운 딸이 변경에서 괴수를 사냥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과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루산이 변경 생활을 청산하고 노바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아니면 바덴이 변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인가?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 괴수의 먹이가 될지 모르는 곳으로 딸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요, 기사님. 들어오시지요.”
어쨌든 바덴의 어머니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루산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아직 결혼 때문에 왔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네, 잘 지내셨습니까? 여기 꽃다발······.”
“아! 고마워요.”
네 사람은 집으로 들어가 거실에 자리 잡았다.
바덴의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둔 다과를 내왔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루산이 가장 먼저 그 침묵을 깼다.
“바덴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
“······!”
오늘 이런 자리가 되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루산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바덴의 부모는 충격이 더욱 컸다.
부모의 이런 반응을 본 바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루산은 열차를 타고 오는 내내 이 순간에 할 말을 연습해 왔기에 이 당황스러운 분위기에서도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이야기에 두 분은 당황하셨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난 것을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도움을 받았다, 인생에서 성공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만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결혼하고자 합니다. 부디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외운 티가 조금 났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바덴의 부모는, 어쨌든 결혼을 하겠다고 용기를 내 찾아온 루산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루산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열심히 외운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되찾기는 했지만, 사기로 가문의 재산을 모두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사취한 자들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양가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리고 당분간 결혼 사실을 숨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휴가를 내고 왔기 때문에 결혼식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적어도 5일 안에는 마쳐야 합니다. 쉽지 않겠지만,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루산은 숨김없이 최대한 솔직하게 - 물론 걱정을 끼칠 수는 없어서 오베론 공작과 관련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 이야기를 한 것이고 시간이 없어 급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은 바덴의 부모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우리 딸이 무슨 죄가 있어서 결혼 사실을 숨기고 도둑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오!”
굼머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결혼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는데 5일 안에 결혼을 한다고? 아무리 그쪽이 귀족이라지만, 이렇게 무시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오해가 있으신 것 같······.”
“오해고 뭐고, 나는 세상에 알리지도 못하는 결혼을 시킬 생각이 전혀 없소!”
굼머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바덴의 어머니는 남편이 화를 내자 오히려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원래 딸을 가진 아빠들은 애지중지 키운 딸이 결혼한다고 하면 무척 서운하다고 해요.”
“···그렇습니까?”
“게다가 바덴은 무척 특별한 딸이죠. 이렇게 똑똑하고 예쁘고 귀한 딸이 결혼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들일 부모가 있겠어요?”
“그건······!”
“돌아가세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녀 역시 이미 속이 상한 상태.
루산에게 단호히 말했다.
루산은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루산이 일어나 바덴의 어머니에게 말하고 바덴을 쳐다보았다.
바덴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루산은 마음이 아팠지만, 이 자리에서 어떻게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바덴이 루산을 따라 일어났다.
등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 좀 하자.”
“···배웅만 하고.”
루산과 바덴은 입을 꾹 다문 채 집 밖으로 나왔다.
“미안해요.”
루산의 말에 바덴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사님, 솔직한 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누가 기분 좋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요?”
“그래도 잘하셨어요. 시간이 없는데 더 나은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사님이 워낙 강하게 충격을 준 덕분에 제가 차분하게 설명하기가 쉬워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일을 망친 것 같아 어찌할 바 모르던 루산은 그제야 안심했다.
“오늘은 돌아가세요.”
바덴이 자동차 열쇠를 루산에게 내밀었다.
루산은 주저하다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덴은 루산의 손에 열쇠를 넘겨주고는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어 두 팔로 그의 몸을 꽉 껴안았다.
마치 절대 놔 줄 수 없다는 듯.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는 듯.
루산은 조금 상처 입은 마음이 완전히 아물었다.
그가 바덴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당신과 당신 부모님께 충격을 줘서 미안해요.”
그의 품 안에서 바덴이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께 잘 설명해 드려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루산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그의 정장 상의에는 바덴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잘 해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날 차례였다.
***
황궁 북쪽에 자리한 고급 주택가는 흔히 고급 주택가라고 불리는 다른 지역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로부터 황궁에 근무하는 고관들이 살거나 작위가 높은 지방 영주들이 상경할 때 머무는 집들이라 크기와 세련됨이 남달랐던 것이다.
한마디로 고위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봄을 맞아 저택마다 고용된 정원사들이 나무와 꽃을 가꾸고 꽃밭을 유행에 맞게 바꾸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 저택은 아예 대규모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정원을 손보는 것은 물론이고 창고와 별채, 안채까지 대대적으로 손을 보느라 많은 차량과 인부들이 저택 안팎을 오가고 있었다. 멕 워커도 여러 대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색 자동차 한 대가 활짝 열린 대문을 통과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렸다.
루트와 그의 비서였다.
작업을 지시하던 루트의 호위 기사 군터가 서둘러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루트는 그의 인사를 받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요란하게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여기 사는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군터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차라리 이게 낫습니다.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이 집을 고치고 집기와 가구를 완전히 새로 바꾸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으니까요. 이렇게 북적여야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도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물건들이 많이 들어와도 눈에 띄지 않지요.”
그 말에 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윗사람이 질책을 해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하는 점은 군터의 장점이고, 자신이 오해했음을 인정하고 부하의 말을 수용하는 것은 루트의 장점이었다.
“몇 명이나 들어왔나?”
“지금까지 30명입니다.”
“물건도?”
“네. 30대가 들어왔습니다.”
“가 볼까?”
“모시겠습니다.”
군터가 별채로 이동했다.
평범한 것 같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들이 별채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고 있었다.
군터가 문을 열고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아직 정리가 덜 된 것처럼 커다란 나무 상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군터가 지하로 가는 문을 열고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루트와 그의 비서가 그 뒤를 따랐다.
마나 등이 환하게 밝혀진 지하는 무척 넓었고 천장도 매우 높았다.
보통 건물 3층 높이는 되는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지하실에서 덜 마른 석회 냄새가 났다.
군터가 지하실 한 공간을 열자 전신 갑옷보다 크고 정교한 금속 갑옷들이 등에 커다란 배낭 같은 짐을 메고 죽 늘어서 있었다.
루트가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파워 아머 30대인가?”
“네! 훈련은 여기 지하실에서 하게 됩니다. 소음을 확인해 봤더니 이 정도 깊이에서 훈련하면 저택 바깥에서는 들리지 않더군요.”
“잘했어. 유사시 이동은 어떻게 하지? 그냥 착용하고 달리는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방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
“별채에 주차장을 붙여 짓고 화물 자동 마차를 구입해 안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을 치는 겁니다. 대원들이 파워 아머를 착용한 채 올라타면 화물 마차가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죠. 그러면 주의를 덜 끌고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파워 아머 무게가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이것을 여러 대 실으면 차 바닥이 버틸 수 있어? 그리고 어지간한 크기가 아니면 여러 대를 싣지 못할 텐데?”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동 마차 회사들을 다 돌아보니, 붐붐 자동차라는 회사에서 대형 화물차를 만들고 있더군요. 아직 출시는 안 했지만 곧 선보인답니다. 그 차라면 파워 아머로 완전 무장한 우리 대원 20명을 태울 수 있습니다.”
“20명이라. 상당히 큰 자동 마차로군.”
“네. 사장 말로는 우리 군과 보급 물자를 싣고 아우로라 대륙을 누비기 위해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 꿈이 크군그래.”
“저도 감탄했습니다. 어쨌든 초도 물량은 우리가 구입하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10대를 구입할 생각입니다.”
“좋아! 잘하고 있군.”
“감사합니다.”
루트는 별채를 나와 요란한 공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다 자동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처음과 달리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달려온 자동차 한 대가 루트가 탄 자동차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루산이 타고 온 바덴의 자동차였다.
루산은 루트가 나온 저택 바로 옆에 있는 보름스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