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조국에 충성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64. 조국에 충성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산은 군부무로 차를 몰았다.
평시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전시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감찰실의 오스카 빈켈 감찰관을 만나러 왔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십시오.”
루산은 서둘러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과 함께 위병에게 내밀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루산은 면회 대기실에 있는 긴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전쟁 통에 군인이 전사하는 것은 시골 농가에서 키우던 닭이 배고픈 살쾡이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겪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과거 자신을 가르친 기사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 사위로 삼으려 했던 아이젠 자작.
헤어진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없는 동안 줄리아와 집사람을 돌봐 주면 좋겠구나. 거리가 있으니 당연히 직접 들러 살펴 달라는 말은 아니야. 다만, 편지로라도 안부를 묻고 잘 지내는지 확인해 줬으면 좋겠구나.”
“······.”
“사실, 집사람이 몸이 많이 안 좋거든.”
“네? 어디가요?”
“심장이 안 좋아.”
“아······!”
루산은 아이젠 자작이 자신과 줄리아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지만, 장모가 될 뻔했던 아이젠 자작 부인이 파혼의 충격으로 심장병을 앓는다는 말에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산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물론 일부러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 자작의 부탁을 들은 뒤로 아라드 전쟁에 개입했고, 그 뒤에는 북부에서 벌어지는 이스타드 전쟁에 반년 넘게 뛰어들었다.
변경 8구역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라드 변경, 괴수 목장에 다녀오고, 노바에서 일어난 동부 공업 지구 사태에 본의 아니게 깊숙이 관련되어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렇듯 변명거리는 충분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덴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자연스럽게 줄리아에게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루산은 그것이 미안하고 마음이 쓰였다.
아이젠 자작의 사망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마 줄리아 집으로 바로 가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그나마 군부에 몸담고 있어 확인이 가능할 것 같은 오스카를 만나러 온 것이다.
면회실에 걸려 있는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뀌어 갔다.
한참 후 군무부 감찰관 오스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작님!”
루산을 부르는 말이었다.
“오스카 경.”
루산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오베론 공작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도 터졌나 싶어 오스카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전선 상황과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아! 그러면 자리를 옮기시죠.”
오스카가 위병소에서 외부인 출입증을 받아 루산에게 주고 군무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필센 제국의 힘을 상징하듯 거대한 군무부 건물 앞에는 장군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마차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명령을 전하고 서류를 전달하는 전령들이 말을 타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곳에도 봄은 황홀하게 찾아와 꽃잎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꽃 냄새가 진동했지만, 루산은 느끼지 못했다.
군무부 정원이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노바의 다섯 비경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제국 기사 아카데미 시절에 군무부에 견학 왔을 때 들은 적이 있었으나 그 기억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오스카는 매점에서 음료수 두 병을 구입한 뒤 정원에 있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 아래 벤치로 루산을 이끌었다.
오스카가 루산에게 음료수 병을 내밀었지만, 루산은 병뚜껑도 따지 않고 물었다.
“북방군 3군단장 아이젠 자작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오스카는 루산과 아이젠 자작의 관계를 몰랐다.
그러나 아이젠 자작이 유능한 장군이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북부 전선을 잘 방어해 왔으며 기어이 역습을 가해 필센 제국 북부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스카가 음료수 병을 따려다 말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
루산이 탄식하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모릅니다만,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오스카가 얼굴로 날아드는 꽃잎을 손짓으로 흩어 버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달 전에 자작님을 만났을 때 북부 전선이 치열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이스타드 전쟁에서 승리한 뒤 북방군은 모든 전선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에 반격을 가했다.
북방군 3군단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적의 총사령관 굴다크 공작을 추격했고, 다른 군단과 지원 병력들도 일제히 공세로 돌아서서 아우로라 연합군은 결국 철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필센 제국으로서는 아우로라 연합군이 무사히 돌아가 재편되도록 허용할 수 없었고, 아우로라 연합군으로서는 최대한 병력을 살려 돌아가야 했다.
필센 제국이 해군을 동원해 철수를 막는 방법도 있지만, 만약 해군이 해전에서 패한다면 이미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동방군, 남방군, 네세베르 공략군에 대한 지원에 차질이 생겨 그 많은 병력이 고립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대규모 해전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아우로라 연합군이 철수하기 전에 육상에서 섬멸하는 것이다.
대군의 철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 북방의 골칫거리 오베리 왕국으로 쳐들어가 항구를 점령해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반대로 아우로라 연합군은 철수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오베리 왕국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철저히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국의 존망이 걸려 있는 오베리 왕국은 더욱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오베리 왕국 공략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북방군에 떨어진 명령은 적의 철수를 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방군은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우로라 연합군은 그걸 이용한 거죠. 오베리 왕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북방군 3군단을 악착같이 막고 있던 아우로라 연합군과 오베리 왕국군이 어느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답니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대요. 아이젠 자작님은 당연히 의심하셨답니다.”
깊숙이 끌어들여 포위 섬멸을 획책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두고 오베리 왕국 땅을 천천히 수색하면서 진입하면 결국 적이 주력 병력이 철수해 버리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었던 거죠. 북방군 3군단은 철수를 막기 위해 신속하게 항구로 전속 진군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군단장님, 이렇게 진군해서는 우리가 포위되어 전멸당할 수 있습니다!
군인이기에 적의 철수를 막으라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혹시 모를 아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지원 부대를 다 빼고 전투 부대만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고 합니다.”
지원 부대는 뒤에 남고 멕 나이트 파일럿은 전원 간편식만 지참하고 전속으로 이동한다!
“사방으로 흩어진 아우로라 연합군과 오베리 왕국군은 북방군 3군단을 넓게 에워싸 포위망을 좁혀 나갔고, 결국 포위하는 데 성공한 것이죠. 굴다크 공작이 직접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해 맹공을 가했다고 하더군요.”
도망치기만 해서는 철수할 수 없다! 철저히 깨부숴라!
“북방군 3군단은 그 와중에도 속도가 빠른 기체를 이용해 적들이 포위해 온다는 사실을 적의 예상보다 빠르게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은 철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3군단을 철저히 괴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워낙 많은 병력을 동원했기에 포위를 알아차렸을 때는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북방군 3군단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1군단, 2군단과 합류하려고 남쪽을 뚫었죠.”
병력을 보존해야 한다! 내가 1전단과 함께 뒤를 막을 테니 남쪽을 뚫고 1군단, 2군단에 합류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명령이다! 가라!
“포위에 동원된 아우로라 연합군과 오베리 왕국군 기체는 약 1200대, 북방군 3군단은 약 500대. 300여 대가 부서지고 200여 대가 달아났다고 하더군요.”
북방군 3군단 1전단은 괴력을 발휘하여 적의 멕 나이트 300여 대를 기동 불능으로 만들고 전멸했다.
대파된 기체는 많지 않았지만, 철수 때문에 고칠 시간이 없었기에 결국 버리고 떠나야 했다.
그런데 이때 파괴된 북방군 3군단의 멕 나이트는 1전단의 기체를 제외하면 거의 다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멕이었다.
파일럿의 숙련도와 체력이 크게 떨어지는 이스타드 해방 전선의 병력이 아우로라 연합군의 끈질긴 추격전에 거의 궤멸되고야 만 것이다.
그 사실을 루산은 나중에야 알았다.
“북방군 1군단, 2군단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적이 이미 전열을 갖춘 채로 항구가 있는 동쪽으로 물러나고 있어서 더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답니다. 그 뒤로 두어 차례 전투가 더 있었지만, 이미 북방군은 상당한 병력 피해를 입었고 적은 기세가 올라 더 싸우기가 어려웠답니다. 결국 아우로라 연합과 오베리 왕국의 멕 나이트 전력 대부분이 철수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루산에게는 아우로라 연합의 병력이 어떻게 됐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젠 자작의 사망을 군 관계자의 입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루산이 무겁게 한마디를 꺼냈다.
“···그렇군요.”
“우리 군으로서는 참 아까운 장군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닌데······.”
북방군 3군단장 아이젠 자작이 굴다크 공작군의 강력한 공세를 끈질기게 막아 냈기에 필센 제국은 북서부 국경을 뚫리지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전쟁이 제국 본토로 번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루산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루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네······.”
오스카는 루산의 얼굴빛이 너무 어두워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루산이 몸을 돌려 위병소 쪽으로 걸어갔다.
오스카가 배웅을 위해 따라가려 했지만, 루산이 사양했다.
루산이 앉았던 자리에는 오스카가 건넨 음료수 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스카는 멀어지는 루산의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벤치에 놓여 있는 루산의 음료수 병을 따서 다시 내려놓았다.
생전에 인연은 없었지만, 존경하는 장군에게 받치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봄날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꽃잎이 떨어지는 만큼 무수히 많은 목숨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
위병소 면회실로 들어온 루산은 외부인 출입증을 반납하고 신분증을 돌려받았다.
그때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
“이게 누구야! 루산 아니야?”
루산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정복을 차려 입은 30대 전후의 장교였다.
“어?”
“루산 보름스 맞지? 이게 얼마만이야?”
그가 손을 내밀자 루산도 엉겁결에 손을 뻗어 악수했다.
“블란트?”
“맞아. 다행히 잊지 않았구나! 영광인데? 하하하!”
루산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소문은 들었어. 변경으로 갔다며? 근데 여기는 무슨 일이야? 다시 군에 복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용무라도 있는 거야?”
“사람을 좀 만나러······.”
“그렇구나.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길게 이야기는 못 할 것 같고, 끝나고 나오면 저녁이라도 같이 할까? 기다릴 수 있어?”
“나도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는데, 어쩌지?”
“아, 그래? 어디 살아? 이게 내 주소야.”
블란트가 위병소에서 종이를 빌려 얼른 주소를 적어 루산에게 건네주었다.
“볼 수 있을 때 보자고. 동방으로 떠나기 전에 친구들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아직 떠나지 않은 친구들 모아 볼까? 나올래?”
그러나 루산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나중에 보자.”
“어? 그래.”
“그럼 이만······.”
루산이 먼저 몸을 돌려 위병소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블란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흥! 변경 기사 주제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냐?”
그러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절이라면 모를까.
블란트는 위병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 군무부 전략실로 갔다.
“근위대 2전단 1전대 캡틴 블란트 베른카슈,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아우로라 대륙 모형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던 전략실의 장군과 장교들이 그를 째려보았지만,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전략실장이 말했다.
“귀관이 그 베른카슈로군.”
‘그’라는 말은 블란트에게는 자부심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명령서 떨어졌으니까 길게 끌 건 없겠지. 귀관에게 신형 기체 전단을 맡긴다. 동방군에 배속되는 특별 부대지. 전단을 맡긴다 하여 전단장이 되는 건 아니야. 뭐, 하는 거 봐서 30대 초반에 전단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가? 설마 30대 초반에 장군이 될 기회를 줘서?”
‘당연하지!’
블란트의 마음에는 그것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조국에 충성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좋아. 최대한 빨리 신변을 정리하고 동방으로 떠나게.”
“알겠습니다!”
블란트 베른카슈.
루산 보름스의 1년 선배로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 줄곧 근위대에서 근무하다 이제 고대하던 전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남들은 전선을 두려워하는지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전쟁은 능력을 마음껏 드러내 더 빨리 성공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