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중간은 없다
267. 중간은 없다
자동차 밖에는 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이 산뜻하게 불고 있었지만,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루산은 줄리아가 바덴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오파드 간편식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던 바덴은 포장지와 마스코트 인형 도안으로 쓸 레오파드 그림을 얻기 위해 변경 8구역으로 화가 세 명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줄리아가 포함돼 있었다.
그때 줄리아를 만나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미술 수업을 하며 지내다 변경 8구역으로 출장을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루산은 깜짝 놀랐으나 그뿐이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에서 무명 화가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는 것은 바덴의 편지 - 업무 보고 성격이 강했다 - 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줄리아가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그곳에 취직하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줄리아에게 바덴을 알려 주기도, 바덴에게 줄리아를 알려 주기도 어색했다.
“바덴, 당신 회사에 전 약혼녀가 취직했어요.”
“줄리아, 네가 취직한 회사가 사실 노바 역에서 너를 만났을 때 내가 키스했던 여자가 운영하는 회사야. 내 재산 관리인이지.”
줄리아도 바덴도 자신과 특별한 남녀 사이가 아니었기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은 자신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숨기고 속인 모양새가 돼 버렸다.
바덴이 그렇게 추궁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자신의 전 약혼녀가 줄리아 아이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상황이 고약하게 돼 버린 것이다.
변명을 하기도 그렇고 아무 말도 안 하자니 오해를 살 만한 난감한 상황.
루산은 이 상황이 불쾌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인이 될 뻔했던 아이젠 자작의 사망과 장모가 될 뻔했던 자작 부인의 심각한 건강 상태, 수면 부족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하여 바덴의 질문이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줄리아 아이젠 맞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말하면서도 루산은 자신의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스스로 놀랐다.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덴은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다가 한참 후에야 떠듬떠듬 되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요?”
“그래요. 무슨 문제가 있죠?”
이미 내친걸음, 루산은 물러서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줄리아 아이젠은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에서 일한다고요.”
“······.”
“용감한 나라에서 일한다고요.”
“······.”
“내 밑에서 일한다고요. 이래도 문제가 안 되나요?”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죠?”
루산이 냉정한 목소리로 찌르듯 물었다.
“뭐라고요?”
“내가 들어가라고 권유한 것도 아니고, 취직을 시켜 준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요?”
루산의 냉정한 말투와 당당한 태도에 바덴은 충격을 받았다.
“통속적으로 오해할 만한 모양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취직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변경에 살고 그녀는 노바에 살아서 따로 만난 적도 없어요. 아! 전에 레오파드 그림을 그린다고 변경에 왔을 때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만, 그뿐이에요. 그 당시는 당신과 내가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고, 줄리아와도 그때 만난 이후로 연락을 한 적이 없어요.”
“······.”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예전에 나를 아껴 주시던 분이 돌아가시고 그 일로 인해 극심한 충격을 받은 부인께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셔서 이러다 또다시 큰일을 치르게 될까 걱정되어 작은 도움이나마 되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당신과 결혼하기로 약속했고, 신뢰를 저버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혹시나 통속적인 오해로 나를 의심한다면 무척 실망할 것 같군요.”
루산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냉정한 목소리가 화를 낸 것보다 더 공격적이었기에 바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루산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바덴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자동차 시동을 켜고 그녀의 집 앞까지 갔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금방이었다.
루산은 시동을 끄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어제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 부모님을 뵈러 가기가 곤란할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갈게요. 저녁 식사는 내일이나 모레쯤 해요.”
“······.”
“결혼식을 할 장소는 내가 알아볼 테니까 선물이나 예복은 당신이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루산은 바덴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서 내려 자동차 앞으로 빙 돌아 조수석으로 가서 차 문을 열었다.
내리라는 뜻이었다.
바덴은 고개를 돌려 당혹스러운 눈으로 루산을 쳐다보다 입술을 깨물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 불었다.
루산은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기에 먼저 수습할 생각이 없었다.
바덴이 운전기사에게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한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루산은 그대로 차를 타고 떠났다.
한편, 바덴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왔니? 혼자야? 그 사람은? 저녁 준비 해 놨는데.”
바덴은 자동차가 멀어지는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부모님께 들키고 싶지는 않아 얼른 둘러댔다.
“바쁜 일이 있어 오늘은 시간이 안 되고 내일이나 모레 가능하대. 다시 알려줄 테니까 미리 준비하지 말아요, 엄마.”
“어? 그래? 근데······.”
어머니가 말을 더 붙여 보려 했으나 바덴은 얼른 가게 뒷문을 열고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가방도 툭 던져 버리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당신과 결혼하기로 약속했고, 신뢰를 저버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혹시나 통속적인 오해로 나를 의심한다면 무척 실망할 것 같군요.’
루산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누가 뭐랬나? 괜히 먼저 야단이야!”
자신을 일없이 남자나 의심하는 저속한 여자로 취급하는 것 같아 불쾌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따지지 않는 여자가 있을까?
누가 봐도 불쾌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오히려 큰소리야!”
물론 루산이 자신과 결혼을 약속하고도 부정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들어 보니 줄리아가 취직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큰소리를 칠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전 약혼녀가 부친상을 당했다고 그 집에 가서 그녀의 모친을 돌보는 것을 이해해 줄 여자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통속적인 오해?”
말도 참 잘 만들어 낸다 싶었다.
“문학을 못 한다더니 문학만 했나 보네.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 문학 공부만 했냐!”
그러나 그녀는 루산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약혼녀와 어떻게 파혼을 했으며 약혼녀의 부모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기에 인간적인 도리로 며칠이나마 돌보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들은 ‘통속적인 오해’를 하더라도 자신만은 오히려 루산을 옹호해 주는 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해 보려 했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루산에게 좋은 아내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 싸웠다.
“바덴, 저녁 먹어라!”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말했다.
“대충 먹고 왔어요. 오늘은 피곤해서 좀 일찍 잘게요.”
“그래도 뭘 좀 먹지.”
“안 먹어요.”
바덴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의 어머니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거대한 애벌레 같은 이불 더미를 잠시 지켜보다 말했다.
“씻고 자.”
“···알았어요.”
바덴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지만, 더 묻지 않고 돌아갔다.
바덴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밤새 끙끙 앓았다.
그러고도 회복되지 않아 몸져눕고 말았다.
***
루산은 집으로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 루산, 신붓감은 언제 보여줄 거니?”
“이삼일 내로 같이 올게요.”
“바쁜 모양이구나.”
“네.”
짧게 대답한 루산이 집을 나서자 보름스 자작 부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밤에 또 어딜 가니?”
“매형 좀 만나고, 줄리아 집에 가 보려고요.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줄리아 집에는 갔다 왔잖니?”
“줄리아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살짝 정신을 놓으신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알아보셔서 식사도 하시고 말도 하시는데, 제가 없으면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눈과 입을 닫고 계세요.”
“저런!”
“그래서 가능하면 좀 더 살펴드릴까 해요.”
아들의 말에 보름스 자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루산, 굳이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결혼을 앞두고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줄리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니까요.”
“······.”
“길어 봐야 이삼일이에요. 더 돌봐드리고 싶어도 못 해요.”
“아휴······.”
루산은 어머니의 한숨을 뒤로 하고 저택을 나서서 누나 집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무슨 일이야, 처남?”
“매형, 부탁이 있어요.”
“말해 봐.”
“가족들만 모여서 결혼식을 치를 건데, 적당한 신전 좀 찾아 주세요. 소문이 나지 않도록 변두리 쪽으로.”
“그야 기꺼이 하지!”
“결혼 예물도 좀 준비해 줘요.”
“알았어, 처남. 결혼 준비를 착 해 주면 되는 거잖아? 맞지?”
“그럼 고맙죠.”
“걱정하지 마. 내가 준비해 놓을 테니까.”
대답을 듣고 안심하고 떠나려던 루산이 매형에게 물었다.
“근데 매형.”
“응?”
“내가 줄리아 집으로 가서 아이젠 자작 부인이 정신 차리실 때까지 며칠간만 옆에 있어 드리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요?”
“으음······.”
“내가 없으면 식음을 전폐하셔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해 봐요.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저쪽은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고, 이쪽은 결혼식 준비가 다소 늦어지는 건데 비교가 되요?”
루산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된 것에서 노이어는 루산이 이 문제로 결혼할 사람과 다투고 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자신의 동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이어는 완전히 루산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처남, 그건 거리감이 달라서 그런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람이 죽는 일은 아주 심각한 거지만, 사실은 모두가 죽기 때문에 특이한 일은 아닌 거야.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크게 느끼지만, 거리가 먼 사람의 죽음은 그냥 그런 거지 딱히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잖아. 아우로라 연합군 병사 100명이 죽었다는 말에 슬퍼? 아니잖아. 하지만, 내 가족이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말만 들어도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거리감이 다르다······.”
“그래. 아이젠 자작 가문의 일은 처남한테는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 그중에서도 신붓감에게는 전혀 모르는 남의 일이지. 처남과 똑같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기대할 수는 없어. 오히려 처남이 그 집안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화가 나겠지. 처남이 여전히 그 집안을 가깝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 안 그래?”
루산은 노이어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바덴이 그런 반응을 보인 까닭을, 확실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서운한 감정은 해소되지 못했다.
“그래도 나를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결혼할 사이잖아요.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 줄 수 있잖아요.”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
“그렇죠?”
“응.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까지 완벽히 똑같기를 바랄 수는 없어. 같은 사람은 아니잖아?”
“······”
“분명히 처남한테는 큰일인데, 고슬라 사장이 이해를 못 해준다고 탓할 수는 없어.”
루산은 매형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마음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노이어가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처남, 내가 보름스 가문의 빚을 떠안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
매형이 이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직접 꺼낸 것이 처음이라 루산은 깜짝 놀랐다.
노이어가 그렇게 함으로써 헤링겐 가문의 가세가 크게 기울어 버렸다.
루산으로서는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아내와의 새로운 삶을 위해 가문과 단절할 각오를 한 거야.”
“······!”
“물론 부모님이 차마 나를 어찌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에 기대어 억지를 부른 것이지만, 사실 그때 가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았지. 죽일 놈이었어. 다행히 우리 대단한 처남이 이토록 빠르게 가문을 재건해 주어서 지금은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고 있지.”
노이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루산은 너무 미안해서 차마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노이어가 매형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같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한 경우가 생겨. 그때, 중간은 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매형의 말이었다.
루산은 거대한 칼이 자신을 두 쪽으로 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아! 알았어요. 갈게요.”
“조심해서 가. 결혼 준비는 내가 해 놓을 테니까.”
“고마워요.”
“그런 소리는 말고.”
루산은 노이어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그가 향하는 곳은 대학로 근처에 있는 줄리아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