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그에 대비해야 한다
269. 그에 대비해야 한다
바람의 언덕 장원은 재개장 준비에 한창이었다.
언덕마다 장원 별장 직원들과 임시로 고용한 인근 주민들이 달라붙어 꽃과 나무를 심고 고급 오두막을 손보느라 바빴다.
“이곳은 처음인데, 뭐랄까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 나는군요. 언덕마다 개성이 있다고 할까요?”
부르사 왕국 출장에서 돌아온 슈텐달 남작이 바덴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바람의 언덕 장원에 대한 첫인상을 말했다.
바덴이 미소를 지었다.
“잘 보셨어요, 남작님. 언덕마다 화가 한 명씩 배정해 감독을 맡겼거든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걸려 있으니 자신만의 색깔을 최선을 다해 완성해 가는 거죠.”
“아하! 어쩐지······. 그래도 너무 튀면 오히려 조화가 깨지지 않겠습니까?”
“먼저 시안 회의를 통과해야 해요. 개성이 넘친다 해도 어둡거나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주제는 탈락하게 되죠.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밝고 편안하고 긍정적이고 행복한 내용을 담아야 해요. 그것 말고는 제한이 없답니다.”
“음!”
“처음 개장할 때부터 이 방식으로 해 왔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아무리 개성적으로 언덕을 꾸민다 해도 언덕, 꽃, 나무, 돌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조화가 깨진다는 느낌보다는 똑같은 재료들로 다채로운 풍경을 자아내는 데 대한 신비와 경이로움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렇군요.”
두 사람이 바람의 언덕 장원의 별장들이 다채롭게 조성되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동차는 얼마 전에 완공된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각각의 언덕 위에 한 채씩 고급스럽게 지어진 오두막 별장이 해당 언덕의 주인이라면 본관 건물은 그 언덕 주인들을 내려다보는 왕 같은 건물이었다.
개장할 때부터 짓기 시작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성 모양의 건물로 ‘바람 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탑들이 높고 날렵하게 지어져 있었다.
탑 꼭대기에서 길게 펄럭이는 깃발까지 장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라 바람도 왠지 기품 있게 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본관을 꾸미느라 바쁜 직원들을 지나 바람의 언덕 장원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탑 꼭대기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슈텐달 남작은 벽면의 일부가 유리로 돼 있어 바깥이 훤히 보이는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자니 정신이 아찔했다.
“이게 승강기로군요? 후유! 담이 약한 사람은 계단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을 붙이는 게 좋겠군요. 허허허.”
“익숙해지면 괜찮지만, 남작님 말씀대로 안내문을 붙이겠습니다.”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건물에서도 숙박을 할 수 있습니까?”
“네. 우리가 지금 가는 본관 탑 꼭대기 방은 전망이 무척 좋거든요. 건축가의 말에 따르면 세상을 발아래 두는 왕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별장보다 가격이 상당히 높습니다.”
바덴이 운영하는 장원 별장은 기본적으로 귀족이나 사업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가격이 무척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다면 대체 얼마나 하는 것인지 슈텐달 남작은 궁금해졌다.
“얼마나 됩니까?”
“그건 나중에 남작님께서 예약을 하시면 알려 드릴게요. 특별히 할인해 드리죠.”
“어이쿠! 얼마나 비싸기에 가격을 비밀로 하시는 겁니까? 나처럼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은 감당하기가 어렵나 보군요.”
바덴의 농담에 슈텐달 남작 역시 농으로 대꾸했다.
두 사람은 웃으며 꼭대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내부 장식이 끝나지 않아 실내는 휑했지만, 열린 창문으로 상쾌한 바람이 들어와 기분이 좋았다.
창문 앞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왕처럼 장원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산이 몸을 돌려 슈텐달 남작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슈텐달 남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군요, 보름스 자작님. 자작님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루산과 슈텐달 남작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바덴이 두 사람을 테라스로 안내했다.
그들은 하얀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았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했지만, 이만한 풍경이 없었다.
형형색색 다채로운 언덕들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뻥 뚫린 대지가 펼쳐져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발아래에 두는 왕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슈텐달 남작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바람 성 꼭대기 테라스에서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부르사 왕국은 멕 나이트를 많이 보유한 나라가 아닙니다. 한 대만 보유해도 스스로를 장군으로 칭하며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죠. 지역마다, 부족마다 그런 장군들, 군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내부가 혼란스러워 치안이 매우 안 좋습니다.”
슈텐달 남작이 부르사 왕국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우리가 멕 나이트 100대, 200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중부의 철광석을 항구까지 무사히 나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치안을 회복하고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니까요. 왕질은 바로 그 일을 하면서 각 지역에 있는 군벌들을 밀어 버리고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하려는 것이죠.”
치안 유지는 멕 나이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필요한 일이다.
반란군 파일럿을 가프 용병단으로 동원한다 해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을 뿐 그 숫자로는 범죄 소탕, 질서 유지 임무가 불가능한 것이다.
야망이 큰 왕질 - 왕의 조카 - 이 그 일을 해 주는 것이 철광석 확보에 이로웠다.
“왕질이 세력을 확대하면 국왕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국왕 쪽에서 과연 우리가 멕 나이트를 항구에 내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까요?”
루산이 물었다.
그 역시 부르사 왕국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슈텐달 남작이 설명했다.
“국왕은 정신적 지도자이지 실권이 없습니다. 부르사 왕국의 왕족들이 대개 그렇지요. 그런데 국왕을 모시는 세력들 가운데 항구 일대를 보유하고 있는 부족은 힘이 셉니다. 치안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좋은 편이고요. 그에 반해 인접한 중앙 지역은 매우 어지럽죠. 국왕 세력권 사람들은 왕질 영향권 사람들을 도적 떼, 비적 떼라고 부릅니다. 자꾸 영역을 침범해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거든요. 누군가가 강력하게 그 땅의 질서를 회복해 주기를 바랄 겁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왕질은 야심이 큰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국왕 영향권 세력들까지 삼키리라고 걱정하지 않을까요?”
“제가 만나 본 왕질은 야심이 크고 매우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른 세력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는 알 수 없죠. 왜냐하면 그는 아직 젊고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모른다?”
“그렇죠. 그리고 그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별로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르사 왕국의 부족들은 매우 배타적이거든요. 다른 부족이 자기 부족을 다스리는 걸 용납하지 않죠.”
“음.”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국왕을 섬기는 부족들은 다른 지역 세력들보다 강하고 자부심이 큽니다. 왕질이 자기 영역의 군벌과 장군 들을 쓸어버리고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해도 겁을 먹기보다는 귀찮은 도적 떼를 소탕해 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사 왕국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나라였다.
필센 제국이 진입을 포기하고 방치할 정도로.
과연 그럴 만한 것 같았다.
“왕질이 그런 복잡한 내부 사정을 모두 극복하고 부르사를 통일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신정일치의 아주 대단한 통치자가 등장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될지 여부는 알 수 없지요.”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부의 철광석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정이야 뭐······.”
피닉스 제철로서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슈텐달 남작의 말이 맞았다.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미리 고민하지 말고 직접 겪어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나았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슈텐달 남작이 왕질과 주고받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을 말해 주었다.
“멕 나이트 한 대당 22만 골드로 계산하고 그에 상응하는 광산 개발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일반형 멕 나이트 새 제품이 15만 골드 안팎임을 고려하면 중고 멕 나이트를 22만 골드로 책정하는 것은 폭리인 셈이지만, 멕 나이트 구입이 어려운 부르사 왕국의 사정과 멕 나이트 밀수출로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고려해서 그렇게 책정한 것이다.
“그리고 용병 파일럿을 제공해 주겠다고 하니 무척 반기더군요. 파일럿 한 명당 매달 기본급 250골드, 전리품은 반반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나쁜 조건은 아니군요.”
“세세한 일로 시간을 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왕질로서는 자기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었다.
팔지도 못하는 철광석을 내주고 그 대가로 멕 나이트와 용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피닉스 제철에서 루산에게 지불한다.
“초도 물량은 40대. 상황을 봐서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루산이 슈텐달 남작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피닉스 제철은 엄청난 양의 철광석을 획득하겠지만, 당장 멕 나이트와 용병 파일럿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어휴! 일시불로는 절대 못 합니다, 자작님!”
슈텐달 남작이 반 장난으로 손사래를 쳤다.
피닉스 제철은 전쟁 특수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있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루산도 슈텐달 남작에게 당장 이 많은 돈을 받아낼 생각이 없었다.
“용병 비용만 지불해 주세요. 멕 나이트 대금은 여력이 되실 때 나눠서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작님.”
“고슬라 사장님은 6월 20일까지 룬드 항으로 수송선을 보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기사님.”
슈텐달 남작이 부르사 왕국에 대한 세부 정보가 담긴 책자를 루산에게 건네주었다.
부르사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문제는 그렇게 일단 마무리되었다.
루산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필센 제국군이 규모를 더욱 키운다고 합니다.”
슈텐달 남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도 200만 대군 아닙니까? 얼마나 더 늘린다는 겁니까?”
“정확한 규모는 저도 모르지만, 아우로라 대륙을 완전히 정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니 보통 규모는 아닐 겁니다. 아우로라 연합에 속한 나라들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우리 제국의 4배라고 하니 적어도 두 배는 더 뽑지 않을까요?”
“병사야 그렇다 쳐도 멕 나이트 파일럿이 어디서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단기간에 두 배나 늘릴 수 있는 겁니까?”
슈텐달 남작의 질문에 루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멕 나이트 파일럿은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고도의 전투 능력을 지닌 파일럿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기를 수 없지만, 대규모 회전에서 방패를 들고 버티는 정도는 짧게 가르쳐도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이미 이스타드 해방 전선 파일럿들이 몸으로 증명한 바 있었다.
“오히려 저는 병사 징집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200만까지 안 가고 100만 명만 더 징집한다 해도 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 같거든요.”
필센 제국은 대국이고 동방 전선에서 아우로라 연합군과 늘 대치하고 있어서 원래 병력이 많았다.
멕 나이트 5천 대를 보유한 백만 대군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 전시 증편을 단행하면서 멕 나이트 1만 대, 2백만 대군으로 규모가 확대하게 된다.
백만 명을 새로 징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공장과 농촌에서 일손 부족 문제가 발생하고, 노동 부담이 증가하여 파업이 늘어나는 등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추가 징집이 이루어진다면 그 여파가 상당할 것이다.
이미 루산과 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덴이 슈텐달 남작에게 말했다.
“기사님께서는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단지 노동력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극적 대책뿐 아니라 이때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유망할지에 대한 적극적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음!”
슈텐달 남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덴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필센 제국에서 추가 징집이 이루어지고 아우로라 대륙이 거대한 전쟁터가 되면 일단 식량 문제가 크게 대두될 거예요.”
필센 제국은 식량 생산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아우로라 대륙 점령지에는 식량 공급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점령지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필센 제국군에 적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덴은 이미 변경 8구역에서 농업 기지 사업을 실행에 옮겼지만, 다른 곳으로도 빠르게 확대할 생각이었다.
“여자들의 취업도 더 확대되겠죠.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여성 취업 확대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해 봐야 할 겁니다.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는 문제가 생길 테고, 직접 돈을 벌었으니 여자들의 씀씀이가 커질지도 모르죠. 집안일을 할 시간이 없으니 퇴근 후에 밀린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복합 쇼핑센터 같은 게 생긴다면 인기를 끌 수도 있을 거예요. 아침에 출근할 때 빨래를 맡기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식료품을 사고 빨래도 찾고 그러는 곳 말이에요.”
“그렇군요.”
바덴의 말을 경청하던 슈텐달 남작은 아예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대단한 사업가로 인정했기 때문에 한마디도 놓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온 세상을 발아래에 두는 듯한 바람 성 꼭대기 탑 테라스에서 전쟁의 장기화와 대규모 징집 사태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때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