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우리도 바쁘다
270. 우리도 바쁘다
남은 시간이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산과 바덴은 줄리아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보름스 가문의 저택으로 갔다.
워낙 이른 아침에 줄리아의 집을 방문한 터라 보름스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루산의 어머니가 이제 막 아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화장 안 한 얼굴에 집 안에서 입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나와 늘 혼자 먹는 아침이라 단출하기 그지없는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신붓감이 찾아왔으니 루산의 어머니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신붓감을 보고 자작 부인은 화장을 하고 격식 있는 옷을 입는다고 야단이었다.
시녀에게 귀한 손님을 대접할 아침을 제대로 차리라고 급히 지시했지만, 식구가 없어서 워낙 간단히 준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식재료도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바쁠 때는 식사를 건너뛰기도 하거든요. 지금도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하니까 드시는 것과 똑같이 구운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만 내 주세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닌데······.”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게 잘못이죠. 워낙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됐어요. 앞으로 잘 모실 테니 이번 한 번만 어여삐 봐주세요.”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것은 분명 실례가 맞지만, 보름스 부인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할 수 없이 자신이 먹는 것과 동일한 식사를 내오게 했다.
평민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아직 남아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흠잡을 거리를 찾게 되었으나 조금 파리한 것을 빼면 얼굴도 누구에게 빠지지 않았고, 말도 막힘이 없었고, 인상도 밝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부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차에 운전기사와 비서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도 식사를 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에 일이 있어서 일찍 부르는 바람에 식사를 못했을 것 같아서요.”
보름스 자작 부인은 사위로부터 이미 루산의 신붓감이 사업을 크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방금 말을 듣고 운전기사와 비서를 거느리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업가 며느리를 본다는 실감이 들었다.
어느 귀족 가문에서 이런 며느리를 볼 것인가!
이런 며느리를 보는 사람은 노바는 물론 필센 제국을 통틀어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가치는 희귀성에서 나오는 법, 자작 부인의 가슴에 뿌듯함이 담뿍 차올랐다.
자작 부인은 바덴의 운전기사와 비서를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잠깐 만나 같이 식사하고 대화를 나눠 본 것만으로도 부인은 바덴의 됨됨이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예비 시어머니와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라 어렵고 불편할 텐데도 차분하고, 말을 더듬지 않고, 단어와 문장의 사용에 틀림이 없었다.
너무 똑 부러져서 남자를 피곤하게 하는 유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큰 회사를 여럿 경영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의 아들 또한 똑똑한 사람이니 쥐여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첫 대면을 마친 보름스 자작 부인이 말했다.
“언제 또 볼까?”
“오늘 저녁에 다시 올게요.”
“정말? 시간이 나겠어?”
“내야죠, 어머니.”
어머니라는 호칭이 왠지 간지럽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아들이 결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에 촉촉이 스며들었다.
떠나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보름스 자작 부인은 마음이 이상했다.
변경으로 떠날 때에도 완전히 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아들이 이제 영영 멀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을 일 년에 한 번도 못 보고 산 세월이 오래되어서인지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서운해 할 일은 아니지. 하아!”
자작 부인은 딸에게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이야기를 전하라고 사람을 보내고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정원 가꾸기에 돌입했다.
한편 루산과 바덴은 곧바로 바덴의 집으로 갔다.
바덴의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나간 딸이 아침에 돌아오자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랐으나 루산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손님맞이를 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말, 안 했니?”
“엄마, 차리지 마세요. 밥은 시댁에 가서 먹었고, 어차피 시간이 없어서 금방 나가 봐야 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니? 보름스 가문에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고?”
“응.”
“······.”
“······.”
“그래도 그러는 건 아니지. 우리도 대접을 해야지.”
“정말이에요. 오늘도 바쁘거든.”
그때 루산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에 바덴의 어머니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 때문에 일정이 너무 빠듯해져서요.”
“그, 그건 아닌데······.”
“제가 부족함이 많고 아직은 불편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그때 바덴의 아버지가 빵 반죽을 쿵 내리치며 말했다.
“바쁘다고 하니 붙잡지 마. 우리도 할 일이 많아.”
“여보! 그래도······.”
바덴의 아버지는 계속 빵 반죽을 치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야기는 끝났고, 두 사람이 원한다고 하니 결혼하는 거지, 뭐. 어떡할 거야?”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대신 살아 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선택한 건데······. 그건 그렇고, 결혼식이 언제라고?”
“내일이에요, 아빠.”
굼머스는 잠시 굳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알았다. 차 보내라. 딸 결혼 핑계로 우리도 자동 마차 한번 타 보자.”
바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른 가 봐. 우리도 바쁘다.”
“···네, 아빠.”
바덴이 눈물을 보이기 싫어 얼른 가게를 나갔다.
“또 뵙겠습니다, 아버님.”
루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가 인사하고 바덴의 뒤를 따라갔다.
반죽을 하던 굼머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신도 참······.”
바덴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못 본 체하고 몸을 돌리며 앞치마로 눈물을 찍고는 빵과 우유를 잡히는 대로 싸 들고 얼른 달려가 바덴의 차에 밀어 넣고 돌아왔다.
그날 동네 사람들 중에 미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고슬라 씨가 만든 빵에서 아빠의 눈물 맛이 나는 것을 느꼈다.
***
바람 성 중앙 탑 꼭대기 방 테라스.
바덴이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종이봉투에서 꺼낸 방을 잘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출출하시죠? 제 아버지가 만든 빵이에요. 아침에 가져온 거라 아직은 맛이 괜찮을 거예요.”
“오! 부친께서 빵을 만드시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슈텐달 남작이 펜을 내려놓고 빵을 집어 먹었다.
옆에서 루산이 우유병을 따서 슈텐달 남작에게 가장 먼저 주고 그 다음으로 바덴, 마지막으로 자신 앞에 놓았다.
“바삭바삭하면서도 촉촉한 게 참 맛이 좋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남작님.”
“고맙긴요! 맛있는 빵을 대접해 주시니 저야 말로 감사하지요.”
세 사람은 그렇게 점심을 먹었다.
바덴은 슈텐달 남작에게 다른 식사를 대접할 수도 있었으나 이것 또한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한 것이다.
빵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여자들이 생산에 참여한다 해도 부족한 노동력을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울 테니 기계 사용이 크게 늘어날 거예요. 마차가 사라지는 속도도 더욱 빨라지겠죠. 말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말을 다루는 것보다 자동차를 다루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자동차는 자동 마차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남작님.”
“자동 마차 아니, 자동차가 도로 위를 지배한다?”
“그렇죠. 기계 산업, 자동차 산업이 크게 발달할 거예요.”
바덴의 말에 슈텐달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루산은 이미 차를 타고 오면서 바덴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빵을 먹었다.
고소했다.
“병력을 증강한다면 당연히 멕 나이트 생산이 더욱 늘어나겠지만, 멕 워커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될 겁니다.”
“멕 워커 대폭 증가······.”
“각종 기계, 자동차,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생산하는 공장 설비는 당연히 늘어나겠죠. 설비 제작 산업이 발달할 거예요.”
“듣고 보니 이미 고슬라 사장님이 다 취급하고 있는 분야가 아닙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소 규모의 기계 설비 제작 업체들을 하나로 묶은 <정직한 기계 그룹>은 가프 마법 연구소가 레오파드 생산 설비를 확충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지금도 레이크 시티에 입주해 있는 레오파드 부품 생산 업체들이 발주한 일감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라드 변경에서 주문한 마나 연료, 윤활유 생산 설비 제작이 밀려 있었다.
자동차 제작 회사인 붐붐 자동차는 군용으로 납품하는 코끼리 자동차를 주력으로 생산하면서 대형 화물차인 붐붐 자동차 출시를 앞두고 있었고, 농업용 자동차를 제작하는 펜트 사를 인수했다.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신 겁니까?”
“미리 예측하고 이쪽 사업을 준비한 건 아니에요. 운이 좋았죠.”
단순이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바덴은 그렇게 대답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대형 화물차인 붐붐 자동차가 출시되기 전에 우리는 승용 자동차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인수할 만한 승용차 제작 회사가 있는지도 물색 중이고요.”
“대단하십니다!”
슈텐달 남작은 감탄했다.
바덴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며 사업을 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피닉스 제철도 신사업에 도전해야 할까요?”
“아니죠!”
바덴의 대답은 단호했다.
“피닉스 제철에서 신사업을 개척해 보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피닉스 제철은 굳이 자동차 회사나 기계 설비 제작 회사를 차려서 운영할 필요가 없어요.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봐야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머리 아프게 경쟁이나 하지 무슨 큰 이익을 보겠어요.”
“그럼······?”
“모든 기계, 설비, 자동차는 철을 필요로 해요. 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죠. 굳이 완제품 시장에서 경쟁할 필요가 없이 완제품 제조업체들에 좋은 재료를 공급해 주면 시장은 피닉스 제철이 제패하게 됩니다.”
피닉스 제철이 시장을 제패한다!
“저는 가프 마법 연구소와 여자도 조종할 수 있는 멕 워커 생산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농업용으로 사용할 저렴한 멕 워커 생산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어요. 아무래도 무거우면 가격도 비싸고 움직이기도 버겁지 않겠어요? 가볍고 단단한 뼈대와 쉽게 녹이 슬지 않아 오래 가는 얇은 외판으로 제품을 만들면 인기를 끌 거예요. 피닉스 제철에서 그런 철강재를 생산해 낸다면 모든 멕 워커 제작 업체들이 피닉스 제철에서 자재를 구입하려 할 겁니다. 완제품 시장에서 경쟁할 필요 없이 그 분야를 석권하는 거죠.”
슈텐달 남작은 바덴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확실히 이해했다.
“저는 어떤 사업이 유망할지 계속 생각합니다. 피닉스 제철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완제품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어떤 물건이 세상을 뒤덮을지 고민하고 그에 적합한 자재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회사들이 피닉스 제철의 제품을 사용하려 할 것이고 피닉스 제철은 산업의 왕이 될 거예요.”
‘산업의 왕!’
슈텐달 남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테라스 난간 사이로 수십 개의 언덕과 그 위에 지어져 있는 고급 오두막들이 보였다.
언덕 위에 지어진 오두막들은 완제품 업체.
바람 성은 피닉스 제철.
수십 개의 완제품 업체들이 자재를 공급해 달라고 피닉스 제철을 올려다보며 간청하는 광경이 그려졌다.
‘이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이 장소를 선정한 것이라면 고슬라 사장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슈텐달 남작이 경탄의 눈빛으로 바덴을 쳐다보았다.
바덴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아라드와 부르사 중부에서 본격적으로 철광석이 들어오면 물량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이미 가격 경쟁력은 갖추었고, 물량도 충분히 확보하게 될 테니, 제품 연구로 다른 제철소들을 압도해 하나씩 거꾸러뜨리는 일만 남게 되겠죠.”
슈텐달 남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프 마법 연구소와 농업용 멕 워커 연구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탐탐 자동차와 신제품 연구를 같이 하셔도 좋고요.”
슈텐달 남작은 바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음을 느꼈지만, 루산과 바덴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피닉스 제철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휘둘릴 생각이었다.
“뭐든 함께하겠습니다!”
바덴과 슈텐달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루산이 말했다.
“지금 사업을 확장하느라 두 분 다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라드 왕국 개발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들어간다면 슈텐달 남작님과 고슬라 사장님의 회사뿐입니다. 아라드 왕국에서 전폭적으로 협조하기로 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요.”
“아라드 왕국에서 전폭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고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슈텐달 남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산은 호리아 평원 개발 계획과 니트라 공작과 합의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슈텐달 남작은 한 나라를 송두리째 바꾸는 이 대담하고 거대한 계획에도 놀랐지만, 일국의 재상과 만나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루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새삼 놀랐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일개 변경 파일럿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단한 사업가와 놀라운 변경 파일럿.
슈텐달 남작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메모해 나갔다.
바람의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세상을 다스릴 왕은 자신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슈텐달 남작은 결혼식 전날에 루산과 바덴이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식사를 함께한 사람이었다.
물론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