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나 잘했죠?
271. 나 잘했죠?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라 오히려 세상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내린 비에 꽃잎이 바닥에 축축하게 깔렸다.
자동차들이 그 꽃 융단 길로 서서히 들어왔다.
평일 오전이라 시골 작은 신전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제 한 사람만 자동차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혼식이란 무릇 가족, 일가친척, 친구와 동료, 마을 사람 모두를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도이지만, 도미니크 사제는 조용히 치르는 도둑 결혼도 많이 집전해 봤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합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결혼식은 많이 달랐다.
일단, 신랑 신부가 가난하지 않았다.
헌금 조로 이미 200골드나 받았다.
그리고 고가의 자동차를 타고 왔다.
차에서 내리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보니, 시골 사제는 알지 못하는 고급 예복을 입은 듯 신부는 마치 봄의 여신처럼 화사했고 신랑은 일국의 왕자님처럼 근사했다.
그다음으로,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연달아 들어온 차에서 내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양가 가족이 참석했음을 알았다.
자신이 집전한 결혼식 중에 양가 가족이 모두 참석하는 도둑 결혼은 없었기에 확실히 특이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좋은 날, 신의 축복으로 두 남녀를 하나로 엮어 주면 되는 것이니까.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사제님.”
“안녕하십니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네.”
신랑 신부와 그 가족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간 도미니크는 직접 결혼식 절차를 안내했다.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격식을 중시한다면 애초에 남들이 모르게 도둑 결혼을 할 리가 없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손을 잡고 걸어 나와 신에게 경배하고, 서로 예물을 주고받고, 사제가 축복을 빌어 주는 것으로 예식은 끝이 났다.
“자 다들 모이세요!”
사진사를 데려온 노이어가 사람들을 모았다.
대부분이 사진을 찍는 것이 처음이라 다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사진을 찍었다.
루산의 어머니, 누나, 매형, 조카들.
바덴의 아버지와 어머니, 쌍둥이 동생들.
클라크.
루산과 바덴.
사제 도미니크.
모두가 함께 찍은 사진 다음에는 루산과 바덴만 그대로 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교체되며 사진을 찍었다.
신전 밖으로 나온 루산과 바덴은 신전을 배경으로 한 장, 꽃비가 뿌려져 있는 신전 진입로를 배경으로 또 한 장, 꽃이 활짝 핀 정원을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자! 웃으세요! 좋습니다!”
루산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바덴은 꽃다발을 들고 루산의 팔짱을 끼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은 주인의 허락 없이 에르너 사진관 정면 유리창에 크게 걸려 오랫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
결혼식을 마치고 루산과 바덴은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먼저 떠났다.
목적지는 파라다이스 호텔.
두 사람은 그곳에 틀어박혀 다음 날 오후까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루산이 변경 8구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바덴이 루산의 품에서 속삭였다.
“안 가면 안 돼요?”
루산은 피식 웃었다.
바덴이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는 게 신기했고 그래서 더욱 좋았다.
루산도 너스레를 떨었다.
“다 팽개치고 당신과 이렇게 살까?”
“이렇게가 뭔데요?”
“이렇게 막 만지는 거지.”
“꺅!”
루산의 장난스러운 손길에 바덴이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다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내가 먹여 살리지, 뭐!”
“멋진데!”
두 사람은 헤어짐이 아쉬워 한 번 더 만지고, 다시 또 만지다 환한 빛이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참 후 바덴이 말했다.
“며칠만 휴가를 더 내는 건 어때요?”
“불가능한 건 아닌데, 그러다 하루가 이틀 되고 이틀이 사흘 되고 사흘이 나흘 되고··· 계속 그러면 어쩌죠, 고슬라 사장님?”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바덴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루산도 이대로 헤어지는 건 싫었다.
그래서 며칠 늦어진다는 내용의 편지를 율리안과 켐니츠에게 보냈다.
“휴가 더 내서 뭘 하려고요?”
“할 일이야 많죠.”
바덴은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손을 잡고 걷고··· 이런 데이트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파르나 여행을 가는 건 어때요? 어차피 변경으로 돌아갈 때 지나가야 하니까 거리가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어디에 살지 직접 돌아다니며 찾아보는 거예요. 그리고 워낙 예쁜 고장이니까요.”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아요.”
그 말에 바덴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노바에서 살 집을 찾으러 다녀요. 그리고 내일 일찍 출근했다가 점심 때 열차를 타고 떠나요. 아무 말도 없이 회사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요.”
“노바에서 살 집? 갑자기?”
루산은 바덴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노바에서 살 집을 찾는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바덴이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파르나에 집을 마련한다 해도 당신이 노바에 올 일이 없겠어요? 그리고 결혼했으니까 나도 집에서 나와야죠.”
보름스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소문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편이 좋지 않아요? 혼자 지내면 무섭고 외롭지 않겠어요?”
“결혼했으니 나오는 게 맞아요.”
루산은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수긍했다.
“그래요, 그럼.”
바덴이 루산의 입술에 쪽 입맞춤했다.
두 사람은 젊은 연인들처럼 간편하고 산뜻한 옷을 입고 직접 차를 몰고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강바람을 쐬기도 하고,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러다 바덴이 염두에 둔 주택가로 가서 매물로 나온 집들을 둘러보았다.
“여긴 좀 작지 않아요? 혼자 살 집으로 작다는 게 아니라 어차피 집안일을 해 줄 사람을 써야 할 테고, 자동차도 몇 대 주차해야 하고,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뛰어다닐 마당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하기에는 좁아 보이는데······.”
“기사님, 그런 최고급 주택가로는 못 가요.”
“왜요?”
“옆에 누가 이사 왔는지, 자기와 수준이 비슷한지 무척 신경을 쓰거든요.”
소문이 나기 쉽다는 뜻이었다.
“아!”
“오래된 중산층 주택가가 적당해요. 물론 이쪽도 이웃이 누구인지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지만, 법원 남쪽에 있는 중산층 주택가는 새로 집을 고치고 들어오는 젊은 사업가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어차피 자기들도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라 귀족들보다는 덜 예민할 거예요.”
“그렇다면야 뭐······. 장인 장모님 댁과 가까우니 안심도 되고.”
장인 장모라는 말이 루산의 입에서 나오는 게 어색해 바덴은 장난으로 몸서리를 쳤다.
루산이 그런 바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바덴은 중개인에게 여러 가지를 꼼꼼하게 묻고 매물로 나온 집들 가운데 가장 크고 이웃이 수더분할 것 같은 집을 선택했다.
“바로 계약해요? 급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더 돌아보는 게 낫지 않아요?”
“시간이 없어요.”
바덴은 수십 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
이렇게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이제 막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신혼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한 사치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를 부려본 것이다.
루산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으나 바덴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루산이 물었다.
“장인 장모님 집을 다시 지어 드리는 건 어때요?”
“그 얘기도 해 봤는데, 아빠가 절대 반대해서 못 하고 있어요.”
“그래도 불편하잖아요. 동생들이 아기였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방이 좁을 텐데······.”
그러자 바덴이 장난꾸러기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빠 몰래 동네에서 매물 나오는 걸 사들이고 있어요. 적당한 게 나오면 땅을 합치거나 해서 크게 지을 생각이에요.”
“잘했어요.”
집들을 보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그들은 노바의 야경이 잘 보이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 다시 뜨거운 밤을 보냈다.
마냥 좋았다.
다음 날 일찍 운전기사가 찾아와 바덴은 출근하고, 루산은 스텐커를 만나러 갔다.
“루트 오베론이 가문을 삼키는 작업을 착착 진행 중입니다. 지금은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상황을 확인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특별한 건 없나요?”
“루트가 부리는 녀석들 가운데 데사우로 형제라고 있습니다. 노바 암흑가에서 활동하는데 잔인하고 치밀한 녀석들이죠. 울름 남작을 제거한 게 바로 놈들입니다. 그런데 녀석들이 사채와 밀수 쪽으로 영역을 넓히려 하더군요. 아무래도 유흥가 쪽은 전쟁 때문에 재미가 없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는 있는데, 확장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루트의 지시인가요?”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루트가 직접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저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경로로 지시를 내렸거나 아니면 루트를 등에 업은 김에 스스로 영역을 넓히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죠.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채가 차지하는 자본의 비율이 전체 금융권에서 상당히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루산도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채든 밀수든 루트와 관련이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는데, 아직은 걸리는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계속 수고해 주세요.”
“네, 기사님.”
“아! 그리고······.”
“네?”
“이번에 변경으로 돌아가면 멀리 원정을 떠납니다. 몇 달이 걸릴지 몰라요.”
“그러시군요.”
그동안 종종 있던 일이라 스텐커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다음 이야기는 의외였다.
“혹시 중요한 일이 있으면 고슬라 사장과 상의하세요.”
“네? 미스 고슬라와 의논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동안 바덴은 루산의 복수와 관련된 일에 전혀 나서지 않았다.
활동 자금이 필요한 경우에만 청구하면 지급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루산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따르면 되는 것이다.
“고슬라 사장이 활동을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다만, 스텐커 씨가 독자적으로 판단하기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의논하라는 뜻이죠.”
“알겠습니다, 기사님.”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접촉이 잦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죠.”
“조심히 가십시오, 기사님.”
루산은 스텐커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온 뒤 짐을 챙겨 노바 역으로 가서 바덴을 만났다.
바덴은 비서에게 며칠 뒤에 파르나로 올 것을 지시하고 간단한 가방을 들고 루산과 함께 떠났다.
루산과 바덴은 노바 역 매점들을 돌며 이것저것 군것질을 하고 신문과 잡지를 구입하고 기념품 가게에서 작은 인형과 액세서리를 사며 놀다가 기다리던 열차를 탔다.
두 사람이 들어간 침대칸에는 다른 승객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 잘했죠?”
바덴이 일부러 침대칸 전체를 통째로 구입했던 것이다.
루산은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차츰 대담하게 뜨거운 스릴을 즐겼다.
지루한 열차 여행이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변경 8구역까지 갈 걸······.”
“어휴, 지치지도 않아요?”
“당신은 싫어요?”
“몰라요!”
그렇게 뜨겁고 짧은 기차 여행 끝에 파르나에 도착한 두 사람은 때로는 걷고 때로는 말을 빌리고 때로는 마차를 빌려 시내 곳곳을 구경하다 예쁜 봄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교외 강변을 거닐었다.
각종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공단 지역도 답사했다.
그러다 남쪽으로 작은 강이 흐르고 역과 그리 멀지 않은 예쁜 동네를 점찍었다.
“어때요, 루산?”
“좋아요!”
“그럼 이 동네에 집을 지을 테니 앞으로 우리 여기서 만나요.”
“알았어요.”
두 사람은 너무나 달콤한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파르나에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