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꼬셔 봐요
272. 꼬셔 봐요
루산은 레이크 시티까지 열차를 타고 가지 않고 라돔 시에서 내렸다.
본부에 들러 율리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 전단장님, 휴가는 잘 보내고 오셨습니까?”
율리안이 루산을 반갑게 맞이했다.
“살이 좀 많이 빠지신 것도 같고, 혈색이 더 좋아지신 것도 같고, 흠······.”
“하하,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뭔가가 달라졌는데······.”
율리안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루산을 찬찬히 훑어보다 말았다.
“노바에는 별일 없죠?”
“경찰의 강화된 검문검색이 여전한 것 말고는 별일 없습니다.
루산의 대답에 율리안이 장난기를 지우며 말했다.
“그것 참, 오래가는군요. 동부 공업 지구 사태의 주동자를 찾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루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 사태와 관련하여 상당한 역할을 한 그는 강화된 검문검색을 유지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정부가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을 경찰력으로 누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율리안과 가까워도 정부 또는 황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율리안의 생각이 궁금하기는 했다.
“제국군이 병력 규모를 더욱 늘린다고 하더군요.”
“규모를 더 늘린다고요? 여기서 더?”
율리안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네.”
“얼마나 더 늘린답니까?”
“그건 모르지만, 다시는 침공하지 못하도록 아우로라 대륙을 완전히 정벌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군요.”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병력이 얼마나 더 필요하죠?”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소 100만 명은 더 징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멕 나이트 전력도 당연히 더 늘리겠죠.”
그냥 해 보는 이야기라 해도 100만 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과연 우리 제국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예산이야 뭐 빚을 지더라도 찍어내면 될 테지만, 민생이 문제겠네요. 그렇게 징집하면 산업 현장 곳곳이 타격을 입을 텐데······.”
확실히 율리안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젊은 남자라면 승리하고 있는 전쟁에서 적을 얼마나 부수고 적의 땅을 얼마나 차지할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그는 제국이 과연 전쟁 규모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지, 민생과 경제를 해치지 않을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타격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승리가 계속되는 한 제국의 경제에는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점령지에서 획득한 전리품과 향후 생산하는 재화가 제국의 부를 더해 줄 테니까요.”
“승리하면 제국의 부는 더 늘어난다?”
“그렇죠. 그러니 전쟁 규모를 더욱 키우는 거죠. 패배하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제국의 부가 늘어나도 제국 백성들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징집된 병사는 죽거나 부상을 당할 것이요,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더라도 그 사이 생업에 종사하지 못해 병사나 그 가족은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다.
더구나 전시 임금 동결법과 추가 징집으로 인해 가중되는 노동 부담으로 인해 오히려 삶이 힘겨워질 것이다.
제국의 부가 늘어나더라도 그것을 누리는 것은 황제, 고위 군인과 관료, 사업가 정도이고 나머지 백성들은 더 넓어진 세상에서 더욱 폭넓게 열려 있는 가능성 정도를 새로 얻게 될 뿐이다.
루산은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꺼내지는 않았다.
율리안의 말과 표정에서 그 역시 이러한 문제들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산은 화제를 돌렸다.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다시 레이크 시티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가프 마법 연구소 건으로······.”
가프 마법 연구소 핑계를 대면 더 물을 것이 없었다.
8구역은 가프 마법 연구소 덕에 이만큼 발전했고, 루산이 그 가프 마법 연구소를 레이크 시티로 유치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식적인 세금 수입과 고용 창출 효과 외에도 아라드 왕국에 밀수하는 레오파드 운반비, 파손된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 재조립 수입의 일부가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나와 율리안에게 돌아기가 때문에 이러한 막대한 수입원을 창출한 루산에게 일일이 따지지 않았다.
그저 가프 마법 연구소의 부탁으로 어려운 일을 하러 전쟁터로 가는 것인가 보다 생각하고 8구역을 위해 이리저리 뛰는 루산에게 미안해 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리십니까?”
“가 봐야 알 수 있지만, 반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율리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통치자님.”
***
가라로슈가 루산에게 앳된 청년 마법사 한 명을 소개했다.
“벨라슈입니다. 둔하지 않아서 쓸 만할 겁니다, 기사님.”
가라로슈가 그저 그런 마법사를 루산에게 딸려 보낼 리 없었다.
벨라슈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젊은 마법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루산 곁에서 부족한 세상 경험을 채우라고 보내는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벨라슈 님.”
가프 마법 연구소 마법사 중에 루산의 활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가라로슈가 언행에 주의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루산이 먼저 인사하자 벨라슈가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열심히 돕겠습니다, 기사님!”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벨라슈의 표정을 보고 루산은 미소를 지었다.
실제 성격이 어떤지는 겪어 봐야 알겠지만, 일단 순박해 보였다.
루산이 가라로슈에게 물었다.
“파워 아머를 실을 수 있을까요?”
“파워 아머를요?”
“네. 워낙 내정이 불안한 나라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쓸 일이 없으면 다행이고, 또 쓸 일이 생기면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보는 셈 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멕 나이트 40대면 상당한 전력이지만, 멕 나이트만 있는 부대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미 루산은 아라드와 이스타드에서 정찰 부대나 호위 부대 없는 적 멕 나이트 부대를 피해 없이 잡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님. 대형 거미에 파워 아머 거치대를 장착하도록 하지요.”
파워 아머는 무거워서 쓰러져 있는 것을 혼자서 세워 입고 벗을 수 없었다.
파워 아머 거치대는 파워 아머가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가라로슈 님.”
“고맙긴요, 기사님과 여러 일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쁩니다. 그런데 거치대를 장착하는 데는 며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연료와 소모품은 어떻게 할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반년이라고 잡아도 멕 나이트 40대는 상당한 연료를 소비하게 된다.
그것을 일일이 들고 다니면서 전투를 치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멕 워커를 많이 동원해 그것을 싣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규모가 커지면 기동력이 떨어지고 소문이 나기 쉽기 때문이다.
“일단 멕 워커 두 대를 가져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향후 필요한 분량은 아인베크 해운을 통해 부르사 왕국으로 운반할 생각이에요. 통관에 문제가 없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철광석을 운반하는 아인베크 해운의 배들이 정기적으로 부르사 왕국과 필센 제국을 오간다.
그 배를 통해 멕 나이트 연료와 소모품을 운반할 생각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기사님.”
파워 아머 거치대 설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루산은 밀려 있는 레이트 시티 업무를 보았다.
“트리어가 요금에 합의했습니다.”
켐니츠의 말에 루산이 기뻐했다.
만약 요금 문제를 본부까지 끌고 갔다면 이 문제는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트리어는 8구역에서 근무한 경력이 루산보다 길었고, 상당한 능력과 평판을 지니고 있었으며, 8구역에는 너무나 빠른 루산의 성공에 질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루산은 그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부까지 가도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달 호수에 배를 띄우는 사업은 자신이 모든 비용을 대는 것이고, 요금의 근거가 합리적이고, 8구역에 누가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지 8구역 고위 관계자들은 알고 있으며, 율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루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가 본부까지 올라가면 트리어와의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루산은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트리어의 결정이 기뻤던 것이다.
“앞으로 여력이 되는 대로 1전단의 북부 개발에 도움을 주도록 하죠. 개척 도시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사냥 팀도 당분간 북쪽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켐니츠, 괴수 목장 건을 잘 다루면 향후 레이크 시티와 8구역 수입은 걱정이 없어요. 그러니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루산은 반달 농업 회사의 진척 과정과 레이크 시티로 들어온 업체들의 증가 추이를 파악하고 이주민 변동 상황과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제국 정부가 병력을 추가로 징집하면 당분간 백성들이 변경으로 이주하려는 것을 막을지도 몰라요.”
“그렇게까지 할까요?”
“모르는 일이죠. 노동력이 부족해 공장이 안 돌아간다면 사람들이 변경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겠어요?”
“음······.”
“병력을 증강하면 죄를 지은 파일럿도 어지간한 죄는 사면하고 군에서 받아줄지 몰라요. 큰 공을 세우면 땅을 주고 영주로 삼는다고 하더군요. 아우로라 대륙의 영주가 되는 거죠.”
“영주?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변경으로 오는 파일럿도 줄어들 거예요.”
켐니츠가 웃음기를 거두었다.
“자체적으로 키워야 해요. 멕 나이트, 멕 워커 파일럿을 기를 거예요. 지원자를 선발해 멕 워커 파일럿 훈련을 시키고, 그중에 체력이 좋고 감각이 남다르면 멕 나이트 파일럿 훈련을 시킵니다.”
파일럿 자원이 부족한 아라드 변경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활약할 뛰어난 기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괴수를 상대할 파일럿을 육성하는 것이므로 체력을 강화하고 괴수 대처법만 익히면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 활동에 검술 훈련을 넣고, 중학교 때는 자질이 뛰어난 애들을 따로 빼서 훈련을 더 강화하는 게 좋겠어요. 모리츠, 파비안을 교관으로 삼도록 해요.”
“가프 연구소의 테스트 파일럿 말인가요?”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으면 내가 설득하고 떠날 텐데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전선 경험도 풍부하고 변경 경험도 상당한 기사 출신이라 그만한 교관이 없어요. 나이도 많고 돈도 벌만큼 벌어서 슬슬 은퇴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고향이나 다름없는 변경 8구역이 당신들을 필요로 한다고 꼬셔 봐요.”
꼬셔 보라는 말에 켐니츠가 피식 웃었다.
“할 일이 많은데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그런 이야기는 넣어 두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루산은 언제부턴가 공석, 사석 가리지 않고 공대하는 켐니츠가 여전히 어색했으나 이제는 그 어색함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를 믿고 안심하고 자리를 비울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새벽의 어스름이 가시기 전에 대형 거미 한 대가 레이크 시티 서쪽 외곽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루산, 바이크, 시에나 외에도 파일럿 20여 명이 아라드 왕국에 넘길 레오파드와 각종 물자를 실은 멕 워커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파일럿들은 모두 남방군 출신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기사들로 괴수 목장을 운영하던 미켈 슐츠가 지휘하고 있었다.
[전단장님, 출발할까요?]
[그러죠.]
[부대, 이동한다!]
대형 거미 한 대와 멕 20여 대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아우로라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반대쪽인 서쪽으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처럼 보였지만, 제국에서 알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일을 하러 가는 반란군 출신들은 먼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