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닥치고 짐 싸
274. 닥치고 짐 싸
출근한 바덴은 스텐커가 준 유리병에서 찻잎을 꺼내 향을 맡아 보았다.
살짝 쿰쿰한 듯하면서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차향에 누적된 피로가 씻기는 것 같았다.
“버리기가 아까운 건 사실이야.”
버리기 아까워서 차 상자를 준다는 스텐커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바덴의 말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들어 있었다.
버리기 아까운 것은 단지 차 상자가 아니었다.
차 사업!
어차피 루트 오베론이 다 가져가게 둘 수 없다면 단지 방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을 가져오면 어떨까?
나푸라 왕국과 직접 접촉해 거래처를 확보하는 방법.
이쪽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
구체적인 유통 방법.
밤새 이런 것들을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다.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바덴은 비서를 불렀다.
“지금 바로 기획 팀 회의를 열 거예요.”
“네, 사장님.”
외근과 출장으로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제외한 기획 팀 직원 전체가 회의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회의실을 나가면 입도 벙긋하지 마세요.”
바덴이 드물게 주의를 주고 회의를 시작했다.
직원들은 바짝 긴장한 채 바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 사업을 해 볼까 하는데,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파악해 보세요. 차의 역사부터 생산, 유통, 소비 전 과정에 이르는 내용을 알아야겠어요.”
“차 사업을요?”
갑작스러웠지만, 직원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기획 팀 직원들은 업무에 제한이 없었다.
바덴이 꽂히거나 자신들이 꽂히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다룰 수 있었다.
바덴이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설명했다.
“나푸라 왕국에서 나는 차는 금수품으로 지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카페나 가정에서 차를 못 마시는 일은 드물잖아요? 품질이 떨어지는 다른 지역 차를 마시고 있는 거죠. 그것도 더 비싸게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나푸라 왕국 차를 들여올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나푸라 왕국의 차를 들여온다!
“필센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한 잔씩 차를 마신다고 하면 - 물론 차를 안 마시는 사람, 하루에 여러 잔을 마시는 사람, 고급 차를 마시는 사람, 싸구려 차를 마시는 사람, 다양하겠지만 - 카페에서 흔히 마시는 차 한 잔이 15코퍼라고 할 때 단순 계산으로 하루에 3백만 골드, 1년이면 10억 골드가 넘죠.”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차 산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이 정도나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 매출로 멕 나이트 20대, 일 년이면 7천 대 이상을 구입할 수 있어요.”
직원들은 바덴이 왜 하필 멕 나이트와 비교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엄청나다는 것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물론 그것은 최종 소비에 이르렀을 때의 부가가치이고 우리가 찻잎을 수입해서 유통할 때는 그보다 훨씬 적겠죠. 10분의 1, 아니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더 많을 수도 있지만······.”
10분의 1이라 해도 어마어마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일에 뛰어들 필요는 없어요. 차 사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고, 상황에 따라 아예 취급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사업인지 감이 오죠?”
“네, 사장님!”
“전쟁이 차 사업을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업계의 기존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판이 짜이고 있단 말이죠. 게다가 이미 다른 누군가가 밀수를 시작했어요. 그것도 대규모로.”
직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늘 그렇듯 여러분의 일에는 제한이 없어요. 이 사업을 합법화하는 방법을 고민해도 좋고, 합법화가 불가능하다면 들키지 않고 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도 좋아요. 나도 나름대로 알아볼 테니 차 사업의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 보고하세요. 차 재배지별 특징, 품질별 특징, 생산과 유통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 소비자 유형별 특징, 차를 이용하는 방법 등등 모든 것을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회의실을 나가면 비밀입니다.”
바덴이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 먼저 자리를 떴다.
기획 팀장이 이 일을 맡고 싶은 직원들을 남겨 업무를 분담했다.
회의실을 나온 바덴은 비서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고급스러운 포장 용기에 차를 작게 포장하라고 하세요. 선물용으로 쓸 거예요. 말이 안 나오도록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바덴은 운전기사를 시켜 시어머니, 시누이에게 차를 보냈다.
버리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 좋은 차를 보고 선물해서 점수를 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지인들과 모임을 가지실 때 마음껏 차를 대접하세요. 떨어지면 언제든 다시 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귀부인들이 차를 즐기는 방식이나 선호하는 브랜드, 좋은 차를 위해 기꺼이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의 한계선을 알아보실 수 있으면 넌지시 알아봐 주세요. 그러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런 편지와 함께 용돈을 두둑이 챙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덴은 선물용으로 포장한 차를 시댁뿐 아니라 친정에도 주고,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회원들과 사업가들에게도 주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차에 대해 무척 잘 아는 전문가도 있었고 차를 취급해 본 사업가도 있었다.
“아! 그렇군요!”
이 말 한마디면 그들은 자신이 아는 바를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선생님이 되었고, 바덴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차 이야기 덕에 사업이 매끄럽게 잘 풀리는 것은 덤이었다.
바덴은 룬드 항에 멕 나이트를 실어 나를 수송선을 파견하는 문제로 만났던 아인베크 남작과도 다시 만나 차를 선물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남작님, 나푸라 왕국에서 차를 들여올 수 있을까요?”
아인베크 남작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푸라 왕국은 적국이라 차 수입은 금지되지 않았습니까?”
“그 나라가 아우로라 연합에 가입했다고 해도 사실상 연합군에 파견한 병력은 미미하고, 그 나라 역시 필센 제국에 차를 팔지 않으면 손해가 막심하니 어떻게라도 처리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고슬라 사장님은 불법적인 일, 나라에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라에 미움을 사고 사업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
“불법이라는 게 살인, 절도 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불법이 되는 절대적 불법이 있고, 나라에서 편의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한 상대적 불법이 있지 않겠어요? 차 수입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후자에 속한다고 봅니다. 물론 후자라고 해도 어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나라에서 불법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좋은 차를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서 차를 밀수해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라의 조치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흐음······.”
아인베크 남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바덴이 분위기를 가볍게 해 보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작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나라에 미움을 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차를 불법적으로 들여오려다 나머지 사업을 망치고 싶지는 않거든요.”
차 사업이 규모가 크다지만, 지금 하고 있는 사업들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래서 먼저 정부에 나푸라산 차를 금수품 목록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청원할 생각이에요.”
“그것이 안전하죠.”
“하지만,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어요. 편법을 쓰더라도 차를 들여올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려 합니다.”
“진지하시군요.”
“그럼요!”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동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인베크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편법과 불법의 차이는 작지 않지만, 확실히 불법으로 인한 처벌은 받지 않겠죠. 만약 합법화가 되지 않는다면 이런 방법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마리노 공화국에 대리인을 내세워 회사를 하나 세웁니다.”
마리노 공화국은 아우로라 대륙과 가까이 붙어 있는 섬나라로 아우로라 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작 아우로라 연합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무역 국가로서 오카수스 대륙의 나라들과도 거래해야 하기 때문에 양측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필센 제국이 부르가스를 차지함으로써 중개 무역 기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마리노 공화국은 필센 제국과 사이가 멀어지고 필센의 동맹국인 아라드 왕국을 침공하기도 했지만, 대전쟁 이후에도 겉으로는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리노 공화국은 나푸라 왕국에서 자유롭게 차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마리노 공화국을 거쳐 우회 수입을 하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를 거치는 것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마리노 공화국은 무역 경험이 풍부하고 배도 많고 거대한 창고도 많으니 많은 물량을 우회 수입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마리노 공화국은 준적국이라 그 나라에서 들어오는 화물은 검색이 철저하지 않나요? 꼬투리를 잡아 입항을 거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요?”
아인베크 남작도 그 점에 동의했다.
필센 제국뿐 아니라 마리노 공화국 쪽에서도 필센 제국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기 않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편법적인 일을 하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덴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마리노 공화국에서 아라드 왕국으로 오는 건 어떨까요?”
“마리노-아라드 항로 말입니까? 두 나라는 적대국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 국가 관계에 있어 영원한 적은 없다고 들었어요. 더욱이 상호 이익이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바덴은 나푸라 왕국의 차를 들여올 방법을 찾아냈다.
나푸라 왕국 - 마리노 공화국 - 아라드 왕국의 룬드 항을 거쳐 철도를 이용하여 필센 제국으로 운반해 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번 생각해 본 것에 불과했다.
마리노 공화국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내세워 회사를 차릴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고, 그 대리인이 과연 나푸라 왕국에 좋은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필센 제국이 이런 편법을 과연 넘어가 줄 것인지도 문제였고, 이토록 길어지는 운송 경로와 운반 시간에도 차가 변질되지 않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역시 문제였다.
수많은 사항들을 검토해 보고 나서 차 사업을 아예 접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바덴은 즐거웠다.
“일단 합법화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겠어요.”
합법화가 쉽게 될 것 같지도 않았지만, 합법화가 늘 좋은 것도 아니다.
합법화가 되면 누구나 쉽게 뛰어들어 이익이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덴은 상무대신을 만났다.
차 수입 문제뿐 아니라 아라드 왕국 개발과 관련하여 통관 절차 간소화 문제로 나눌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뒤 선물용 차를 받아들고 돌아가는 상무대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많은 사업을 혼자서 어떻게 한다는 거지? 차까지 욕심을 내나? 흐음······.”
그로부터 며칠 후, 바덴은 차 사업과 관련하여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며 직원들을 데리고 아라드 왕국으로 떠났다.
***
아라드 변경 외각에 건설된 다섯 개의 개척 도시 너머로 원시의 땅 깊숙이 스무 개의 사냥 캠프가 지어지고 있었다.
이스타드 변경에서 포로로 잡힌 아우로라 연합 출신의 사냥꾼들을 투입해 아라드 변경을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괴수 사냥 수입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부족한 멕 나이트, 부족한 멕 워커, 부족한 연료로 원시의 숲 한가운데에 건설된 사냥 캠프에서 살아남으려면 방벽을 더욱 높고 튼튼하게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스타드 변경에서 잡힌 포로들 외에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사냥 캠프에서 괴수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벽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투릭 오제로.
아라드 왕국을 침공했다가 루산에게 포로로 잡혀 아라드 변경에서 노역하고 있는 아우로라 연합군 파일럿이었다.
아우로라 연합에 속했다고는 해도 그는 연합의 주요 국가 출신이 아니라 약소국 코벨 왕국의 기사였다.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온 사냥 캠프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에게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투릭 오제로!”
“난데, 무슨 일이오?”
“대장님이 찾으신다.”
“대장님? 대장님이 누군데?”
“가 보면 알아.”
연료와 생필품을 전해 주고 사냥 캠프에서 획득한 괴수 부산물을 가져가는 아라드 변경 기동 전대 보급 팀이 찾아와 그를 데려간 것이다.
3일 동안 멕 워커 어깨를 타고 원시의 숲을 헤쳐 개척 도시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끝이 아니었다.
아라드 변경 본부까지 다시 여러 날을 가야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루산이었다.
몇 대 안 되는 멕 나이트로 산을 넘어 자신을 포로로 잡고 무수히 많은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 부대를 격파하며 동쪽으로 이동해 마침내 룬드 항에 있는 아우로라 연합군 보급 기지를 점령해 버린 가프 용병단의 젊은 대장.
그 무시무시한 인사가 왜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투릭 오제로.”
루산이 자신을 부르자 투릭 오제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 무슨 일로 나를 불렀소?”
“같이 갑시다.”
“어, 어디로 말이오?”
“아우로라 대륙으로.”
“······!”
다시는 밟지 못할 줄 알았던, 고향이 있는 땅 - 물론 광대한 아우로라 대륙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 으로 데려간다는 말이 투릭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승낙하려 했지만, 두려움과 의심이 불쑥 치솟아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산 채로 데려가는 거 맞죠?”
“허!”
루산이 헛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당신을 죽여서 뭐 하게?”
“꼭 뭘 한다기보다······.”
“죽이더라도 제 발로 걸어가도록 살려서 데려가서 죽이는 게 낫지, 그 먼 길을 송장 싣고 가는 것보다는. 안 그래요?”
“그, 그야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협조만 잘 해 주면 무사히 풀어 줄 테니까.”
“정말이죠?”
바이크가 끝없는 의심과 두려움에 쓸데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는 투릭을 지켜보다 기어이 한마디 했다.
“포로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닥치고 짐 싸! 아니다! 쌀 짐도 없으니 그냥 가면 되겠네.”
“아, 알았소!”
그렇게 투릭 오제로가 부르사 원정대에 합류했다.
아우로라 대륙 길잡이 노릇을 제대로 할지는 의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