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길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277. 길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차창 밖에 펼쳐진 아라드 왕국의 산세와 풍경을 바라보던 바덴이 문득 입을 열었다.
“길이라는 건 한 번에 완성되는 게 아닌가 봐요.”
시에나는 뭐라고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자기들이 지나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민한 그녀는 바덴이 이 말을 꺼내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금방 알았다.
지금 그들이 탄 열차가 지나가고 있는 철로는 피닉스 제철에서 철광석 운반을 위해 부설한 것이었다.
아라드 왕국에서 광산을 개발해 철광석을 필센 제국에 있는 제철 공장까지 운반하고, 그 대가로 아라드 왕국에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실어 오는 용도였다.
그 물품이 가장 필요한 곳이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수도라 철도가 아라드 왕국의 수도까지 연장되었고, 그 덕에 바덴과 시에나가 편하게 필센 제국의 수도까지 열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라드 왕국에 처음 깔린 철도라 지반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많다 보니 비가 많이 내리면 철로가 놓인 땅이 침식되는 구간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과속으로 달리다 큰 사고가 날까 봐 필센 제국 열차 운행 속도와 비교할 수 없이 천천히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라드 왕국의 도로는 간선 도로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는데 그런 나라에 열차가 다닐 수 있는 철로를 놓았으니 처음부터 완벽할 리 없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다니면서 더 다듬고 보수해야 더 나은 길이 되고 더 빠르게 더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길이 돼 가는 것이다.
바덴이 길에 대한 말을 듣고 시에나도 여기까지는 추론해 낼 수 있었다.
바덴의 말이 이어졌다.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처음부터 완전할 수는 없죠. 교류가 계속되고 신뢰가 쌓이면서 더 단단하고 튼튼한 관계가 돼 가는 거죠. 다행히 미스 타란토는······.”
타란토는 시에나의 성이다.
“기사님이 신뢰하는 사람이니 부친과 우리 사이의 가교가 돼 줄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우리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서로 협력하여 더 멋진 길을 닦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근데 고향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나서 지금도 아빠가 일을 하고 있을지 어떨지 몰라요.”
“괜찮아요. 그런 경우에는 주위 사람들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우리와 일을 함께 사업을 크게 키워 나가려는 야망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미스 타란토가 없었다면 우리는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을 거예요.”
시에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어서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었다, 많은 돈을 벌어 유망한 회사에 투자도 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루산과 바덴은 괜찮다고 하지만, 만약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관계가 껄끄러워질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파일럿 동료로 잘 지내왔는데 괜히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다른 동료들은 부르사로 갔는데 자신만 함께하지 못해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세상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여성 멕 나이트 파일럿은 그런 것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직 임무가 실패한 것도 아닌데 괜히 위축될 필요는 없지!’
당찬 아가씨는 그렇게 마음먹고 화제를 돌렸다.
“근데 사장님을 처음 본 것도 열차 안이었는데, 이렇게 함께 열차를 타고 가다니, 신기하네요.”
“어? 우리가 열차에서 처음 봤나요? 변경에서 처음 본 게 아니고?”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게 해 준다는 기사님 말을 듣고 필센 제국으로 들어왔을 때 열차를 타고 노바를 지나 변경으로 갔거든요. 노바에서 사장님이 열차에 잠깐 타셔서 변경으로 이주할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손을 흔들어 주셨어요. 그때 같은 칸에 있었거든요.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았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중에 사장님이 레이크 시티를 방문해서 그때 이주했던 사람들을 방문해 잘 지내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참 괜찮은 사람이다, 얼굴도 예쁜데, 그런 생각을 했었죠. 게다가 여자인데 사장님이라니, 대단하다! 그랬었죠. 저도 유일한 여자 파일럿이잖아요. 왠지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시에나의 갑작스러운 칭찬과 따뜻한 말에 바덴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때 시에나가 바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기사님하고는 무슨 사이에요?”
시에나가 변칙 공격을 가해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바덴은 순간 멍했다.
“두 분 분위기가 예전에 노바에서 뵀을 때랑 많이 달라서······.”
“······!”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분위기가 달랐단 말인가!
아니면 남녀 사이를 감지하는 여자의 매서운 눈초리는 피하지 못한단 말인가?
혹시 시에나가 루산을 좋아했나? 그래서 그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나?
여러 가지 생각으로 바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때 시에나가 숙였던 허리를 다시 펴며 말했다.
“미안해요, 사장님. 바이크처럼 예의가 없었네요. 그런 질문은 하는 거 아닌데······.”
그녀는 바덴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판단을 마친 것이다.
바덴은 시에나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무언가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루산의 부하라서 말을 해도 루산이 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동생 같은 시에나의 철든 표정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기사님은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어 삶을 송두리째 바꿔 준 분이에요. 이런 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
결혼한 사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이 더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두 사람이 결혼했으리라고 추측은 못 했지만, 특별한 사이가 됐으리라고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사실 루산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꿈을 이뤄 준 데 대한 고마움, 엄청난 실력에 대한 동경, 멋진 남자에 대한 연모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자신에게 여자로서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히려 티격태격해 온 바이크에게 더 다정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따라 바이크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났다.
시에나는 천천히 달리는 열차 때문에 무려 4일이나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후회도 했지만, 어색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에나는 속에 담아 두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바덴은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두 사람은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새처럼 쉬지 않고 지저귀는 시에나, 모르는 것이 없고 어려운 문제도 척척 대답하는 바덴은 4일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노바에 도착할 때쯤에는 친자매처럼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노바에 도착한 뒤 바덴은 시에나의 신분증을 새로이 만들어 주었다.
대전쟁 이후 출입국 관리가 더욱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와! 이제 떳떳하게 다니면 되는 거예요?”
시에나는 무척 놀라고 기뻤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가끔 루산을 따라 노바에 올 때는 불심검문에 걸려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는 했던 것이다.
바덴에 대한 호감이 한층 더 크게 자리 잡았다.
바덴은 차 사업 계획에서 마리노 공화국 파트너의 역할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시에나에게 건네주고, 증거금조로 5천 골드 상당의 금괴를 넘겨주었다.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마땅한 파트너를 찾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금을 줘도 되나요?”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 낭비를 줄이려는 것이에요. 거리도 먼데 만나서 논의하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몇 달이 훌쩍 지나지 않겠어요? 증거금을 수령하면 이 사업을 함께하기로 하는 것이고, 처음 만날 때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죠.”
“그래도······.”
“미스 타란토를 보고 지급하는 거예요.”
“저, 저를요?”
시에나는 바덴이 이 사업을 얼마나 중시하고 서두르는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알겠어요.”
시에나는 바덴이 붙여 준 직원 한 명과 함께 브레머 항으로 가서 마리노 공화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
아라드 왕국의 룬드 항을 출발한 배는 약속한 지점에서 아인베크 해운 선단과 합류하여 필센 제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부르가스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따로 북상하여 부르사 왕국에 도착했다.
시간은 동트기 전 새벽.
“왠지 바닷물 냄새부터 지독한 느낌이 나네.”
멀미로 고생한 바이크가 헛구역질을 하며 항구에 켜진 불빛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동안 선원들과 남방군 출신 기사들로부터 부르사 왕국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 중에 좋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근데 대장님, 이제 어떡해요? 내려서 그냥 걸어가면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오겠지.”
루산이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송선이 선착장에 닿자마자 배가 언제 도착할지 몰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왕제의 부하가 다가왔다.
“혹시 피닉스 제철에서 약속한 물건을 싣고 오지 않았소?”
“므라드 전하가 보낸 사람입니까?”
현재 부르사 왕국의 중부 가르다이아 지방의 신관으로 있는 왕의 조카의 본명이 므라드 암쿠 음파시였다.
함부로 왕족인 신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경에 해당했으나 다행히 왕제의 부하에게는 바다 건너에서 온 용병들과 부르사 왕국의 예법에 대해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융통성은 있었다.
“그렇소. 어차피 이야기는 되어 있지만, 굳이 사람들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 곧바로 출발합시다.”
“그러죠.”
길을 안내하기 위해 온 므라드의 심복과 그의 수하들은 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앞장섰고, 멕 나이트 40대와 멕 워커 3대가 그 뒤를 따랐다.
가장 늦게 수송선에서 내린 대형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항구 외곽으로 돌아 산으로 올라갔다.
부르사 사람들에게 낯선 대형 거미를 굳이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땅을 흔드는 굉음에 놀란 주민들이 밖으로 나와 멕 나이트 수십 대가 항구 도시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으나 그들이 반응하기 전에 멕 나이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는 가운데 날이 밝아 왔다.
마침내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부르사 왕국 최대의 항구 도시가 얼굴을 드러냈다.
해안 쪽에는 썩은 생선들과 썩은 밧줄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고, 길가에는 쓰레기와 오물들이 가득하고, 안으로 갈수록 허름한 판잣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항구를 벗어난 루산 일행이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