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계약은 상호적인 거죠
278. 계약은 상호적인 거죠
무더운 여름, 잡초가 무성히 자란 들판에 아이들이 소와 염소를 끌고 와 풀을 먹이고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순찰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거대한 금속 거인들이 다가왔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겁을 먹고 가축을 몰아 마을 쪽으로 미친 듯이 달아났다.
미처 챙기지 못한 염소들이 뒤늦게 거대 괴물의 출현을 알아채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장님, 이렇게 대놓고 이동해도 되는 겁니까?]
루산의 통신기에 착 가라앉은 레보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찌푸린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왕질이 외부에서 멕 나이트를 대규모로 들여왔으니 인근 부족이나 군벌들은 경계 태세를 갖추라고 알려 주는 꼴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멕 나이트 40대는 항구에 내리자마자 가르다이아 지방 외곽의 군벌들부터 진압하며 왕질이 있는 궁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이대로 아무런 군사적 행동도 하지 않고 먼저 왕질의 궁까지 갔다가 다시 인근 군벌들을 치기 위해 나온다면 이미 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잠시 쉬어가도록 하죠.]
[네, 대장님.]
멕 나이트 40대와 멕 워커 3대가 움직임을 멈추자 길을 안내하던 왕질의 심복이 부하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려 다가와 소리쳤다.
“갑자기 왜 멈추는 것이오?”
루산이 조종실 문을 열었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뜨거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루산은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멕 나이트의 손바닥 위에서 왕질의 부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잠깐 쉬었다 갈 겁니다.”
그러자 왕질의 부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갈 길이 먼데······.”
“그런데 이렇게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이렇게 환한 대낮에 길을 따라 이동하면 므라드 전하께서 멕 나이트 수십 대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주변 부족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강성한 부족은 전쟁 준비를 할 테고 약한 부족은 연합하거나 산으로 달아났다가 기습하는 식으로 우리를 괴롭힐 텐데, 왜 시간을 주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왕질의 부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뒤로 꺾어 루산을 올려다보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인지 루산의 지적이 불쾌했기 때문인지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손짓으로 루산에게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니, 저게 어따 대고 우리 대장님을 저딴 식으로 불러?”
루산처럼 자신의 멕 나이트 손바닥에 앉아 왕질의 부하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바이크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위협적인 태도에 말을 타고 있던 왕질의 부하들이 움찔했다.
“그러게 말이야.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뭘 믿고 저리 건방지게 구는지 모르겠군. 멕 나이트에 밟혀도 멀쩡한지 한번 볼까?”
미켈 슐츠가 그 말을 냉큼 받았다.
저들이 자신들을 용병이라고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기를 죽여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그 의도를 짐작한 파일럿들이 강렬한 투기를 발산하며 한마디씩 거들자 왕질의 부하들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때 루산이 손을 들어 부하들 -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도 가프 용병단의 일원으로서 루산의 지휘에 따르기로 약속했다 - 을 제지했다.
“그쯤 해 둬!”
파일럿들이 입을 다물고 루산이 바닥으로 뛰어내려 왕제의 심복 앞에 섰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왕제의 부하가 루산을 노려보다 이내 표정을 풀고 말에서 내려 나직이 말했다.
“자비로우신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이오. 신의 군대를 보고 감히 대적하지 말고 신께 경배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지. 알겠소?”
졸지에 신의 군대를 이끌게 된 루산은 어쨌든 왕질의 의도를 이해했다.
이렇게 대놓고 이동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낭비일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되는 행동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행진인 것이다.
겁이 나면 알아서 숙이고 신권뿐 아니라 나의 세속적 통치권도 받아들여라!
이런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피아를 분명히 식별할 수 있고, 이로써 불필요한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효과가 더 큰지 군사적 단점이 더 큰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그만 갑시다.”
“이왕 휴식을 위해 멈췄으니 밥을 먹고 가죠.”
왕질의 심복은 못마땅했으나 굳이 용병들을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바이크, 이 사람들에게도 레오파드 간편식을 나눠 줘.”
“아까운데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함께 싸울 사람들이야.”
“···네.”
바이크가 할 수 없다는 듯 조종실에서 자신의 간편식 상자를 소중하게 들고 나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런 뒤 므라드의 부하들에게 다가가 낱개로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이렇게 먹는 거야.”
종이 포장을 찢고 먹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오!”
고소하고 달콤하고 향긋한 레오파드 간편식을 맛본 부르사 용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얼른 표정을 다시 숨겼지만, 이미 속마음을 들킨 다음이었다.
“맛이 여러 가지라고! 다음에는 다른 맛으로 줄게.”
바이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
가프 용병단은 부르사 왕국의 여러 마을과 도시를 지나갔다.
농사를 짓지 않아 오랫동안 묵은 밭, 망가진 가축 울타리,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 두려움과 야비함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부르사 왕국의 모습은 두 번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라드 왕국과는 또 달랐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고 절망과 체념, 생존을 위한 욕구만이 존재했다.
구걸을 위해 달려드는 아이들은 그나마 용감한 아이들이었다. 대부분은 건물 뒤에 숨어 멕 나이트의 행진을 숨죽이며 지켜보기만 했다.
루산 일행은 이 지옥과도 같은 절망의 땅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나갔다.
가끔 용기 있는 군벌들이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을 무단으로 통과하는 가프 용병단을 벌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멕 나이트를 동원하기도 했으나 수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보고 멀찍이 지켜보다 돌아갔다.
용기는 없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타고 루산 일행을 지켜보며 따라왔다.
그렇게 루산 일행은 부르사 왕국 중부 가르다이아 지방에 파문을 일으키며 왕의 조카이자 가르다이아의 신관 므라드의 궁에 도착했다.
“신의 사자 앞에서는 엎드려 경배해야 하오.”
이곳까지 길을 안내한 왕질의 심복이 예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루산은 그 말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가져온 은빛 사자 검을 허리에 차고 왕질 앞으로 다가간 루산은 엎드려 절하는 대신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가프 용병단의 단장이 므라드 전하를 뵙습니다.”
이 무례한 이방인의 태도에 부하들이 발작하려 하자 므라드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루산에게 물었다.
“그대는 예법에 대해 듣지 못했는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따르지 않는가?”
“저는 므라드 전하와 군신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계약을 맺어 고용된 용병이고, 싸우는 사람은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어야 하는데 엎드리는 것은 전혀 그럴 만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쳤다.
므라드는 화려한 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을 한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있었다.
목에는 맹수의 송곳니를 화려한 색실에 꿰어 걸고, 손가락에는 굵은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다.
오카수스 대륙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려하면서도 원시적 색채가 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루산은 그의 차림보다 그의 태도와 눈빛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살짝 많아 보이는 젊은 나이인데 충분히 건방지다고 느낄 만한 태도를 보고도 화를 내거나 동요하지 않고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약 관계라 굳이 엎드려 절할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계약 내용만 잘 이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므라드가 루산의 무례를 넘어가는 듯이 말하자 그의 부하들이 또다시 발작하려 했다.
“전하!”
므라드가 손을 들어 다시 제지했다.
손짓 한 번에 부하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고 루산은 생각했다.
‘적어도 궁 안은 확실히 장악한 것 같구나!’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
그때 므라드가 루산에게 물었다.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
루산은 신권을 가지고 있는 므라드가 세속적 통치권도 확보하기를 원한다고 알고 있었다.
우선 인근 부족과 군벌들을 완전히 제압해 가르다이아 지방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부르사 왕국을 하나로 묶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께서는 분열과 반목 대신 통일과 화합을 좋아하신다. 불행히도 우리 부르사는 오랫동안 신의 말씀을 좇지 않는 자들이 창칼로 권세를 잡아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 너도 나도 왕을 칭하며 손바닥만 한 땅을 차지하고 이웃과 싸우고 신관의 권위에 도전하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다. 나는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런 자들을 무찔러 지옥으로 보내고 통일과 화합을 이루라는 신의 말씀을 따를 것이다!”
이는 단지 루산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전에 모인 부하들 모두에게 내리는 신의 말씀인 것이다.
부하들이 엎드려 외치기 시작했다.
“마얄리와 윙구!”
“마얄리와 윙구!”
“마얄리와 윙구!”
종교 의식 같은 이 생경한 광경에 루산은 깜짝 놀랐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외치는 목소리에 몸이 북처럼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므라드가 두 팔을 높이 뻗으며 외쳤다.
“모두 전쟁을 준비하라!”
“마얄리와 윙구!”
“마얄리와 윙구!”
“마얄리와 윙구!”
므라드의 부하들이 다시 이 주문 같은 구호를 세 번 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 기이한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루산을 므라드가 불렀다.
***
“가프 용병단 단장이라···, 아라드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두 차례 참전해 두 번 모두 승리로 이끌고, 이스타드 왕국을 해방시켰다지?”
므라드의 질문에 루산은 조금 민망했다.
피닉스 제철의 슈텐달 남작이 용병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참전 사실들을 알렸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확실히 혹할 만했다.
“참전한 건 사실이죠. 전투 결과는 혼자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공을 부풀리지 못해 안달인데 공을 감추려 하는군.”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할 뿐이죠.”
므라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루산을 찬찬히 뜯어보다 말했다.
“애초에 내가 원한 건 멕 나이트였는데 슈텐달 남작이 알아본다며 돌아갔다 온 뒤에 유능한 용병단이 있다며 그대를 소개해 주었다. 그대의 입김인가?”
“네?”
“가프 용병단은 가프 마법 연구소, 몇 년 전부터 레오파드라는 신형 멕 나이트를 만든 연구소에서 후원하는 용병단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레오파드 성능을 널리 홍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죠.”
루산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리고 오늘 대전에 차고 온 검이 예사롭지 않더군.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던데?”
경호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대하는 이 자리에는 검을 차고 있지 않았다.
이미 밖에 풀어 놓고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루산은 므라드가 매우 유능하고 야심이 크다는 슈텐달 남작의 말을 듣고 은빛 사자 검을 가지고 왔다.
역시 유능한 그의 눈에 바로 띄었다.
“가프 용병단이면서 레오파드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모두 아우로라 연합군 기체로 가져왔다지?”
“······.”
“뭐, 상관없겠지. 아우로라 연합에서도 부르사에 개입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필센 제국이라고 손 놓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루산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므라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말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겼다.
므라드가 뱀처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부르사는 외적에게 관대한 나라가 아니야. 내부적으로 흐트러져 있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고 집어삼키려 한다면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져 후회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네.”
루산이 말했다.
“철광석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 말에 므라드가 표정을 환하게 바꾸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그대의 용병단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겠나?”
“계약은 상호적인 거죠.”
“무슨 뜻인가?”
“이쪽도 조건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뭔가?”
루산은 므라드에게 작게 속삭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문서로 남긴 뒤 도장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