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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279화 (279/450)

279. 무례를 기억하는 전사들이 많다

279. 무례를 기억하는 전사들이 많다

오랜 항해 끝에 마리노 공화국에 도착한 시에나는 곧바로 배를 갈아타고 고향인 마카르스카로 향했다.

마리노 공화국에서 마카르스카는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멀지 않은 거리지만, 습하고 더운 여름에 배를 타는 것은 쉽지 않았고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가족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육지가 보였다.

끼룩끼룩~

마카르스카의 갈매기들이 시에나의 귀향을 반겨 주었다.

“후우-!”

시에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뿜어낸 뒤 큼지막한 가방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배에서 내렸다.

조카들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레오파드 간편식과 용감한 나라에서 구입한 장난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에게는 어떤 선물을 주는 게 좋을지 몰라 브레머 항에서 배를 타기 직전에 근처 옷가게에 들러 부랴부랴 몇 벌 구입하기는 했는데, 왠지 아쉬웠다.

“돈만 한 게 없어요.”

동행한 직원이 웃으며 조언해 주었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

시에나는 선착장을 지나 시장 거리를 지날 때 눈에 띄는 물건들을 싹쓸이해서 거대한 보따리를 만들어 등에 지고 갔다.

바덴이 동행시킨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기획 팀 직원도 두 손으로 오만 짐들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항구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외진 마을 - 시에나의 고향 마을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빙 둘러싸고 따라왔다.

“야! 너 누구냐?”

“아줌마는 누군데요?”

“아줌마 아니거든! 나는 시에나야.”

“난 제리예요.”

“어? 두기 동생 제리?”

“큰형 알아요?”

“그럼! 나한테 늘 얻어맞던 꼬마 녀석인데 모를 리가 있어?”

“거짓말! 우리 형이 얼마나 센데요? 해적들도 설설 기거든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왕년에 내가 이 동네를 휘어잡고 있었거든! 어쨌든 엄마 품에 늘 안겨 있던 갓난아이 제리가 벌서 이렇게 컸단 말이야? 세월 빠르네. 넌 누구냐?”

“비오코예요.”

“비오코? 방앗간 집 새댁 아줌마가 낳은 아기?”

“아기 아니거든요!”

“헤헤! 알았다, 요놈아! 코흘리개라고 불러 줄게.”

“치!”

“어쨌든 얘들아, 누나가 짐이 많으니까 좀 도와줄래? 맛있는 과자 줄게.”

“와아!”

아이들이 시에나가 등에 짊어진 거대한 보퉁이를 제외한 나머지 짐들을 낑낑대며 나눠 들고 따라왔다.

시에나는 전리품을 나르는 작은 병사들을 이끌고 개선하는 장군처럼 집으로 향했다.

빨래를 널던 시에나의 노모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시에나의 눈도 어느새 붉게 충혈되었다.

“엄마!”

“시에나? 시에나 맞지?”

“그럼! 딸도 못 알아 봐?”

“이것아! 몇 년째 소식도 없다가 이게 무슨 일이냐!”

“이렇게 왔잖아!”

시에나의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시에나는 짐 보퉁이를 던져버리고 달려가 어머니를 꼭 안았다.

어머니가 듬직한 딸의 품에 안긴 채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아야! 아프다고!”

“너는 혼나야 돼! 너는 정말······!”

어머니는 등짝을 때리면서 울고 시에나는 맞으면서 울었다.

시에나와 함께 온 바덴의 부하 직원도 괜히 눈물이 나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동네 아이들은 모녀의 격한 상봉을 지켜보다 저희끼리 말했다.

“아프겠다.”

“그러게.”

그러다 한 아이가 용기내서 물었다.

“저기··· 누나! 과자 언제 줘요?”

***

루산은 므라드의 궁성 외곽 빈민촌을 찾았다.

궁성까지 오는 동안 봐 왔던 다른 도시들보다는 나았지만, 빽빽하고 지저분한 빈민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산한 표정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뭐······.”

잔뜩 긴장한 채 따라오는 바이크가 말을 잇지 못했다.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므라드의 심복이 무겁게 말했다.

“전하께서 통일 전쟁을 일으키시려는 이유요.”

루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안내인과 보조를 맞춰 걸었다.

부르사 왕국이 지금처럼 어지러운 나라가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우로라 대륙에서 가장 강한 페르보 제국의 침략 때문이었다.

부르사 왕국은 철광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오카수스 대륙과의 직선거리가 가장 가까운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주위의 강한 나라들이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카수스 대륙의 정벌을 계획하던 페르보 제국이 대대적으로 침공해 왔다.

군사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부르사 왕국은 페르보 제국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르사 사람들은 전쟁에서 패한 뒤에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보급 기지를 공격하고, 정박해 있는 선박을 공격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인들을 공격했다.

같은 신을 섬기는 부르사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악착같이 덤벼 점령군을 괴롭혔다.

그 지긋지긋한 저항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페르보 제국은 분열 정책을 실시했다.

부르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왕은 죽이지 않고 종교 지도자로 남겨 둔 채 통치에 협조적인 부족에게는 자치권을 주고 저항 운동이 심한 지역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다스렸다.

부족도 더 작게 쪼개어 더욱 협조적인 부족의 추장과 전사에게는 관직을 주고 세금 징수권을 부여했다.

그것도 모자라 협조적인 부족으로 하여금 비협조적인 부족을 다스리도록 했다.

부족들 간의 사이가 벌어지고, 미움과 증오가 꽃을 피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력과 재력을 획득한 부족이 생기고, 가진 것을 빼앗겨 점점 약해지는 부족이 생겼다.

부르사인들은 침략한 페르보 제국 사람보다 같은 부르사인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그 사이 페르보 제국을 중심으로 한 아우로라 연합군과 필센 제국 간의 대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무려 20년 이상을 이어지다 필센 제국으로 승기가 넘어갔다.

필센 제국은 급기야 아우로라 대륙에 상륙하여 부르사 남쪽에 인접한 부르가스 지방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페르보 제국은 부르사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자국 방어를 위해 빼게 되었고, 그 덕에 부르사 왕국은 페르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보 제국군이 물러갔어도 부르사 왕국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미 자치권을 갖게 된 부족들은 통치권을 국왕에게 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쌓인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여 지배를 받던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을 억누른 이웃 부족을 잡아 죽이려 했고, 지배해 온 부족은 그동안 얻은 힘과 군사력으로 오히려 피지배 부족을 더욱 짓밟았다.

페르보 제국군이 물러간 뒤로 부르사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내전과 보복으로 얼룩진 암흑의 시대를 수십 년 동안 보내야 했던 것이다.

페르보 제국은 부르사에서 철수한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국에 우호적인 부족에 무기를 지원하고 교역을 실시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을 더욱 지속시키고 있었다.

필센 제국이 부르사를 차지하기 어렵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루산은 슈텐달 남작이 전해 준 자료를 통해 부르사 제국의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글로 본 것과 직접 눈으로 본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숨 막히는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부르사 사람들이 이토록 비참하게 사는 까닭은 강력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병을 보유한 군벌들, 무단으로 자치를 선언하는 부족들, 도적 떼를 강하게 쓸어버리고 법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강력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인가?

이반 황제는 강력한 힘으로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구 귀족파는 피의 숙청을 당했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구 귀족파 잔당을 쓸어버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오베론 공작은 귀족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고 함정 계획을 실행했다.

황제는 무고한 귀족들의 희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늘에 해가 높이 떴음에도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오래된 빈민촌.

루산은 그곳을 지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곳이오.”

므라드의 심복이 한 건물 앞에 멈춰 서서 나직이 말했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덩치 큰 전사 하나가 몸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쾅!

“뭐야!”

깜짝 놀란 목소리들이 뿌연 먼지와 함께 밖으로 새나왔다.

전사들이 칼을 빼들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므라드의 심복이 안으로 들어가자 루산이 그를 따라갔고 바이크, 투릭, 레보르크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다른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달아나는 사람이 없도록 건물 밖을 지키고 섰다.

루산은 안내인이 가리키는 사람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대화할 사람이 전사들에게 눌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를 낮춘 것이다.

“뭐야, 대체?”

루산이 말했다.

“바르나 왕국을 자주 왕래한다던데?”

바르나 왕국은 부르사 왕국 남동쪽에 인접한 나라로 페르보 제국, 부르가스와도 닿아 있는 내륙국이었다.

아우로라 연합의 일원인 바르나 왕국은 현재 필센 제국의 동방군과 페르보 제국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최전선이었다.

“누, 누가 그런 소리를······.”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데.”

“······?”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밀수로 밥 먹고 살려면 협조를 해야 할 거야.”

“뭐, 뭘 협조하란 말이오?”

“바르나 왕국으로 사람들을 좀 데려가 줘야겠어.”

“알았소! 알았으니 좀 놔 주시오!”

이 상황에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밀수업자는 곧바로 승낙했다.

루산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레보르크, 투릭을 포함한 열 명의 사람들을 밀수업자에게 딸려 보낸 것이다.

반란에 가담했다 체포되어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구 귀족파 파일럿들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므라드는 이것을 필센 제국군의 적정 정찰 작전으로 이해했다.

어쨌든 이곳에 온 목표 가운데 하나를 실행에 옮겼으니 다른 목표를 위해 움직일 차례였다.

철광석을 얻기 위해 부르사의 통일 전쟁을 돕는 일이었다.

빈민촌을 벗어나 병영으로 가는 도중에 안내인이 말했다.

“무무족이 가까운 부족들을 이끌고 움직였소.”

“무무족?”

“멕 나이트 23대를 보유하고 있는 부족이지. 합치면 50대는 족히 될 것이오.”

“생각보다 많군.”

“증명하길 바라오. 그동안 전하께 범한 무례를 기억하는 전사들이 많소.”

루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 부르사 전사들 실력 좀 봅시다.”

병영에 도착한 루산은 육중한 헤비 스틸에 올랐다.

후쿵- 후쿵- 후쿵- 후쿵-

힘찬 엔진음과 함께 헤비 스틸의 강력한 진동이 온몸에 전해졌다.

바이크는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 올라탔다.

푸릉- 푸릉-

다른 파일럿들도 자신의 멕 나이트에 속속 탑승했다.

므라드의 전사들에게 멕 나이트 15대를 넘겨 준 가프 용병단은 25대의 멕 나이트를 타고 자신들이 왔던 서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보병과 기병들이 “마얄리와 윙구!”를 힘차게 외치며 행진했다.

부르사 통일 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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