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280.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시에나의 고향집은 잔칫집처럼 북적북적했다.
그녀의 어린 조카들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죽은 줄 알았던 이모가 준 선물 - 레오파드 간편식과 여러 종류의 레오파드 모형 장난감 - 을 들고 으스대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고, 동네 아이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한 입만, 한 번만을 외치며 따라다녔다.
시에나가 넉넉하게 건넨 돈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은 동네 사람들과 음식을 장만해 나눠 먹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왔디야? 올 때 선물을 엄청 싸 들고 왔담서?”
“외국에서 사업을 했다더라고요.”
“사업? 장사?”
“뭔 사업인지는 잘 몰라요.”
“어쨌든 사업가를 확 낚아채 결혼한 게 아니고 사업을 했다고?”
“그렇다나 봐요.”
동네 사람들의 물음에 시에나의 어머니와 언니들은 그렇게 대답했다.
시에나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자신이 필센 제국 변경에서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전쟁이 발발한 지 3년.
마리노 공화국이나 마카르스카가 전화에 휩싸이지는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교역이 크게 위축되어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예년만 못했다.
또한 마카르스카가 아우로라 대륙에 있었고, 필센 제국의 성장으로 마리노 공화국의 국력이 점점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노 공화국이 아우로라 연합에 가입하지는 않았어도 이곳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아우로라 연합의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센 제국에서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가족들이 괜히 고초를 겪을 것 같았다.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입단속을 해 봐야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이 뻔했기에 차라리 감추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에나는 아버지에게만 말할 생각이었다.
마리노 공화국의 뱃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거칠지만 자부심과 독립심이 강한 아버지.
멕 나이트 파일럿을 꿈꾸었지만 나이가 많아 이루지 못하자 여느 아버지들과 다르게 어린 딸을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키우려 했던 아버지.
일개 뱃사람으로 시작해 온갖 역경을 뚫고 마나 엔진을 장착한 화물선의 선장이 되어 지금까지 대양을 누비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라면 막내딸이 기어이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할 것이고, 필센 제국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미칠 파장을 이해하고 근질근질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것이며, 매력적인 사업 제안을 듣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난리굿이여?”
시에나가 고향 집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돌아온 그녀의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이 득실득실하고 잔치가 벌어져 왁자지껄한 자기 집을 보며 걸걸하게 소리쳤다.
“시에나가 돌아왔다니까요!”
“뭐? 시에나? 어디?”
아버지가 왔다는 소식에 시에나가 달려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아버지가 전보다 훨씬 늙은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라드 전쟁 이후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몇 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눈에도 금세 습기가 차올랐다.
그러나 딸의 무사함을 확인하는 아버지의 방법은 특이했다.
갑자기 지팡이를 휘둘러 시에나의 다리를 쓸어 간 것이다.
그러나 시에나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살짝 뛰어 가볍게 지팡이 공격을 피했다.
아버지는 당황하지 않고 이번에는 시에나의 허리를 노리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힝!”
시에나는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어 왼손으로 아버지의 오른 손목을 붙잡아 지팡이를 봉쇄하고 오른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꽉 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쭈!”
“여전하시네. 울 아빠.”
“내가 늙었나? 한 대도 못 때리다니······.”
“아니. 아빠는 그대로야. 내 실력이 더 는 거지.”
“잘난 척은······.”
“잘난 건 사실이지. 누구 딸인데.”
“흥!”
“피!”
부녀는 잠시 껴안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둘 다 이런 낯간지러운 해후를 견디지 못해 이내 풀고 집으로 들어갔다.
***
아빠, 나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됐어요.
어쩌다 보니 필센 제국 변경에서 괴수들을 잡고 있어요.
용병으로 여러 전장을 누비기도 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난 꽤 강한 축에 속하고 우리 대장은 너무너무 강해서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으니까요.
돈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벌어요.
아빠가 받는 선장 급료보다 몇 배다 더 많을걸요?
그건 그렇고 여기 온 건 사업 때문이에요.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무지무지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나푸라 왕국의 차를 들여오는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데 사업 파트너로 아빠가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아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상선을 탔다는 것밖에 모르지만, 나를 믿고 추진해 본다고 하더라고요.
장난이 아니에요.
1년에 10억 골드 이상의 매출을 바라보는 사업이라고 하더라고요.
자세한 내용은 이분이 말씀드릴 거예요.
시에나는 이것보다 훨씬 길고 자세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아버지 리오니에게는 워낙 놀라운 내용이라 이 정도 줄거리밖에 뇌리에 남지 않았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기획 팀 직원이 사업 계획서를 펼치고는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리오니 타란토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역시 평생 화물선을 타고 많은 물건을 실어 날랐지만, 금액의 단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눈을 껌벅이며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왠지 낯설어 보였다.
‘이거 정말 믿을 수 있는 거냐?’
시에나가 말했다.
“아빠, 은퇴할 거 아니면 해야지! 지금처럼 선장님으로 지내는 것도 뭐 나쁘지 않지만, 남의 배잖아! 선주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니야? 아빠도 회사 차리고 배 들여와 자기 사업을 해 봐야지. 어려울 거 없다니까? 나푸라 왕국에서 차 잔뜩 사서 아라드 왕국으로 실어 나르면 끝! 아라드 왕국 재상하고도 이야기 끝났대. 우리 사장님 대단하지? 필요한 자금도 다 대주고 배도 빌려준다는데 뭘 망설여?”
“네가 사업을 알어?”
“이거 왜 이러실까? 나도 큰 지분을 투자한 회사가 있거든? 미래를 생각해 보고 전망이 밝다 싶으면 뛰어들어야지.”
“으음······.”
“나도 바쁘니까 싫으면 다른 사람 소개해 줘. 겁쟁이 말고 야망이 큰 사람으로.”
시에나가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오니는 화가 났다.
“시방 누구더러 겁쟁이라는 거여!”
“피!”
“오매! 환장허겄네. 두브로브의 해적 놈들을 맨손으로 때려잡던 나여!”
그때 당한 부상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그것은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치! 옛날 얘기만 자꾸 하면 늙은 거라던디······. 울 아부지 늙었당가요?”
막내딸의 도발에 리오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때 시에나가 증거금으로 5천 골드 상당의 금괴를 꺼내 보여 주자 리오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입이 떡 벌어진 것이다.
백 마디 말보다 황금!
말은 뱉고 나면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화물과 돈은 그대로 남아 있다.
리오니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다!
설사 딸년이 어디서 사기꾼한테 걸려 아비까지 엮어 끌고 들어가려는 것일지라도 이 황금이 색깔만 입힌 가짜 금이 아닌 한 이번 일은 진짜로 해 볼 만한 일인 것이다!
리오니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 나푸라 사정에 밝은 사람, 조타에 능한 사람, 날씨에 밝은 사람, 해적을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사람, 요리를 잘하는 사람······.
선박을 저렴하게 구하는 방법, 회사를 세울 만한 곳, 세금 우대를 받을 수 있는 방법, 화물을 변질 없이 운송하는 방법, 계절별 최적의 항로, 회사의 이름······.
금괴를 보자마자 이 많은 생각들이 동시에 떠올라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리노 공화국 사람들이 필센 제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쳤기 때문.
반대로 말하면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리오니도 마찬가지.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막내딸은 자신이 그렇게나 바라던 멕 나이트 파일럿의 꿈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런 딸에게 아빠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겁쟁이 늙은이가 아니라 여전히 꿈을 꾸며 세상을 항해하는 마카르스카의 당당한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리오니가 바덴의 부하 직원에게 물었다.
“내가 그쪽 회사에 매이는 건 아니오?”
“네?”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거요. 다른 화물을 운반하면 안 되는 것이오?”
“아! 워낙 큰 사업이라 우리가 많은 금액을 투자하겠지만, 합의된 계약 사항을 이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외에는 자유죠.”
“그러니까 아라드 왕국으로 차를 운반해 갈 때 빈 화물창에 다른 물건을 실어도 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곳에서 짐을 싣고 와도 된다?”
“그럼요! 계약만 이행하면 다른 사업을 하시든 다른 화물을 나르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사업 초기에는 계약 사항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제가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워낙 거액을 투자하는 사업이라······.”
“무슨 얘긴지 알겠소.”
리오니는 마침내 결심했다.
자신의 익히 잘 알고 있는 교역로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면 이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마리노 공화국의 식민지들 가운데 하나인 마카르스카 출신이라고 해서 수많은 배들을 보유하고 수백 가지 물품을 여러 나라로 운송하는 거대 무역 회사를 건설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실패하더라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 왔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럼 해 보리다!”
“잘 생각했어, 아빠!”
“잘 생각하셨습니다, 선장님!”
“단!”
“네?”
“응?”
리오니가 단호한 표정으로 조건을 달았다.
“이 금괴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본 뒤에!”
그는 시에나가 꺼낸 금괴를 자기 앞으로 쓱 끌어왔다.
그러면서 시에나에게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엄마랑 언니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걱정 마, 아빠! 내가 용돈 두둑이 챙겨 줬으니까.”
“······.”
“······?”
“나는?”
“응?”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아이 참! 알았다고!”
시에나는 괜히 눈을 흘기고는 아버지에게도 용돈을 드렸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뿌듯했다.
일을 무사히 마친 시에나는 며칠 후 다시 집을 떠났다.
소매로 눈물을 찍는 어머니와 언니, 멀찍이서 태연한 척 보고 있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 선물을 기대하며 언제 다시 오냐는 조카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잘 얻어먹은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한편 금괴가 진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에나의 아버지 리오니는 회사를 세웠다.
<시에나 무역 상사>
왜 막내 이름만 넣느냐고 서운해하는 다른 딸들에게는 시에나가 준 돈으로 차린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염두에 둔 사람들을 뽑고 배를 빌려 바덴의 부하 직원과 함께 나푸라 왕국으로 일단 떠났다.
첫 번째 거래를 무사히 마친 뒤에 본격적으로 거액의 투자가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멕 나이트 파일럿을 꿈꾸던 뱃사람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 준 막내딸이 가져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바다를 가르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는 단지 한 노인의 미래를 바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전쟁 기간에 단절된 동과 서의 무역이 새로운 경로를 통해 재개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부르사 사람들에게 있어 신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과거 이 땅을 지배했던 페르보 제국조차 부르사 국왕의 통치권은 빼앗았어도 신의 말씀을 전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었을 정도였다.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신관에게 대항하는 병력을 가장 먼저 일으켰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고 므라드의 통일 구상이 성공할 경우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물론 신을 섬기는 부르사 왕국에서 신관을 치는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무족 또한 므라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므라드 편에 선 부족들을 쳐부수겠다는 모양새를 취했다.
자기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신관을 둘러싸고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사악한 자들을 징치하기 위해 신의 전사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이 통했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므라드의 군대가 적대 부족의 땅으로 들어가 마을과 도시를 점령할 때 그곳 주민들의 표정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점령지를 다스리려는 므라드의 전사들도 그런 주민들을 곱게 다루지 않았다.
촌장과 도시 책임자, 저항하는 주민들은 죽여서 시신을 광장에 매달아 두었고, 죄질이 경미한 자는 기둥에 묶어 껍질이 벗겨져 피가 질질 나도록 채찍질을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혹하고 끔찍한 광경에 가프 용병단의 파일럿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뭐 하는 짓이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통일하고 화합한다면서 말이에요.”
바이크가 기가 막혀 분통을 터뜨렸다.
루산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복합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맹목적인 신심이 이렇게 무섭구나! 악마라고 믿으면 죽이는 데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야. 게다가 페르보 제국의 분열 정책으로 수십 년 동안 서로 싸우고 죽여 온 역사가 뿌리 깊은 증오를 낳았지.”
“차라리 전쟁터에서 싸우는 게 낫지 이런 점령전은 최악이에요! 병력을 일으켰다더니 어디 간 거야?”
“부르사의 전사들은 유격전이 특기야. 불리할 때 빠지고 적이 방심할 때 기습하는 거. 페르보 제국에 대항할 때 몸에 밴 습성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의 출현 소식이 용병단에 전해졌다.
“북쪽으로 정찰을 나간 멕 나이트 두 대, 기병 30기가 당했소! 당장 출동해 놈들을 섬멸하시오!”
루산은 므라드 심복의 고압적인 태도가 살짝 거슬렸으나 용병으로 온 이상 굳이 이런 문제로 부딪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죠.”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들이 적을 잡기 위해 출동했다.
기둥에 매달려 있는 시체들이 퀭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