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기고만장하게 둘 수는 없다
281. 기고만장하게 둘 수는 없다
무무족 병력을 찾기 위해 경량 멕인 산악형 그레이 울프를 타고 선두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바이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여기는 그나마 나무가 있네요.]
[그렇군.]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린 파일럿들도 있었으나 몇몇 파일럿들은 바이크의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바이크는 전투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감각이 있었다.
부르사 왕국에 도착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깨우쳤던 것이다.
나무와 숲이 있느냐.
이는 부르사 왕국에서 그나마 법과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지역인지 아니면 완전한 무법 지대로 도적 떼가 날뛰고 군벌이 폭압적으로 다스리는 지역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표였다.
도적 떼가 횡행하고 부족들 간의 싸움이 잦고 군벌이 힘으로 짓누르고 있는 지역일수록 나무와 숲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무법 지대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거나 광물을 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빼앗기게 되는 것, 굳이 생산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군벌 통치 지역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사람들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을 것과 잘 곳이 필요하고 자신과 가족과 부족을 지킬 무기가 필요했다.
나무는 집을 짓고 울타리를 세울 때, 음식을 만들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불을 피울 때, 수레와 무기를 만들 때, 밧줄을 만들 때, 가축을 먹일 때 필요한 중요 자원으로 구하기가 쉬웠다.
군벌도 특별한 산업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팔아먹었다.
이런 일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다 보니 거대한 숲이 사라지고 산도 완전히 헐벗게 돼 버린 것이다.
심한 지역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풀 또한 가축을 먹이거나,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캐서 죽을 쒀 먹거나, 밧줄을 만들거나,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으로 덮는 등 많은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물론 마을이 아예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달아난 지역에는 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지만, 그런 지역에도 나무는 없었다.
나무는 자라는 데 풀보다 긴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부르사의 노인들은 종종 페르보 제국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고는 했다.
창칼로 다스리든 노예처럼 부려 먹든 그때는 이처럼 황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 숲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법과 질서가 엄정히 실현되고 있다는 뜻.
무무족은 주민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는 엄격한 규율, 도적 떼와 이웃 부족들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무력으로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지배해 왔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인근 지역들과는 다르군요.]
루산이 멕 나이트 부대 운용을 맡긴 가프 용병단의 부단장 미켈이 말했다.
그러나 무무족 군대를 크게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루산도 마찬가지. 주의는 해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일단 지금까지 상대해 온 적들에 비해 멕 나이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 부족들의 멕을 모두 합쳐 50여 대.
아라드 전쟁과 이스타드 전쟁에서 멕 나이트 수백, 수천 대를 상대했던 루산에게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숫자였다.
게다가 사용하고 있는 멕 나이트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부르사의 전사들은 과거 페르보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저항군이 사용하기 위해 인근 국가들에서 도입한 전 세대 멕 나이트, 그때 페르보 제국군과 싸우다 획득한 손상 기체들에서 쓸 만한 부품을 모아 조립한 멕 나이트, 페르보 제국이 부르사 왕국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국이 지원하는 부족에게 공여한 전 세대 멕 나이트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아우로라 연합군에서 사용하는 주력 기체들과 비교하면 성능이 다소 떨어질 뿐 아니라 부품을 구할 길이 없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기체들이 많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르사의 파일럿들이 비록 오랜 세월 싸움으로 다져져 온 전사들이라 해도 이쪽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검술을 수련하고 강한 군대에서 체계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 온 필센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매복에 조심하되 속도를 높여 차라리 무무족의 본거지를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미켈의 의견에 루산도 동의했다.
아무리 유격전을 펼친다 해도 본진이 공격받으면 지키기 위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므라드의 군대가 서서히 진군하는 이유는 약탈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을 위해서이고, 적의 본거지로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다른 세력에 의해 자신들의 본거지가 공격받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프 용병단은 이 땅에 지켜야하는 가족도 조국도 없었다.
본거지 방어는 므라드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고 빠르게 적을 제압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이 전쟁을 수행하는 길이다.
루산은 자신들을 뒤따르는 므라드의 군대 장군에게 가서 가프 용병단의 작전을 설명했다.
“우리는 빠르게 움직여 바로 무무족 본거지를 치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독자적인 행동을 하겠다는 말이오?”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죠. 전하께 대항하는 부족이 무무족만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끌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장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멕 나이트만 따로 움직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오?”
“알고 있습니다. 경호, 정찰 없이 소수의 멕 나이트 부대만 움직였다가는 피로 누적으로 싸워 보기도 전에 패하고는 하죠.”
“그걸 알면서도 개별 행동에 나서겠다는 것이오?”
“개별 행동이 아니라 작전입니다. 기습을 받지 않고 적을 끌어내 빠르게 섬멸하기 위한 작전.”
“우리 멕 나이트 전력이 나뉘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높아 보이는데?”
“본대가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무무족은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우리를 공격하려 하겠죠. 우리를 빠르게 뒤쫓을 겁니다. 그때 본대가 뒤따라온다면 우리는 무무족을 앞뒤로 포위할 수 있습니다.”
“음!”
므라드를 섬기는 장군이 그제야 루산의 작전을 이해하고 생각에 잠겼다.
포위 섬멸 작전.
유격전으로 질질 끌고 가려는 상대를 단번에 무찌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포위 작전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면 오히려 병력을 한데 모으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여전히 각개격파의 위험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가 많이 남아 있는 므라드의 군대는 첫 번째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것이 확실히 좋았다.
“용병단이 위험에 빠질 것 같은데, 괜찮겠소?”
루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좋게 보면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지만, 장군의 눈에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장군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좋도록 하시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루산은 다시 돌아와 미켈에게 지시했다.
“무무족 본거지를 칠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시키세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가프 용병단이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습을 걱정하여 사방에 정찰을 보내면서 신중하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습을 하려면 해 보라는 듯이 한데 뭉쳐 빠르게 움직였다.
정찰을 위한 기병 없이 멕 나이트 25대, 멕 워커 3대로 이루어진 단출한 병력이었지만, 멕 나이트가 워낙 커서 그 움직임은 금방 무무족 감시망에 걸렸다.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정찰 병력을 제거하고 보급을 끊으려던 무무족의 장군 슈야 마우메는 적의 의도를 간파했다.
“놈들이 바야드를 직접 치려 한다! 적은 멕 나이트 25대뿐이다! 따라잡아 모두 쓰러뜨린 뒤 반전하여 적의 본대를 공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무무족 최강의 전사이기도 한 그는 직접 멕 나이트를 타고 추격에 나섰다.
나머지 병력은 인근 지역에 흩어 놓고 기마 정찰대 50기, 재생 멕 나이트 - 전 세대 멕 나이트를 다시 사용한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 고장 난 기체에서 멀쩡한 부품들을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 40대를 이끌고 떠난 것이다.
나머지 멕 나이트는 적의 본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한편 정찰대에 의해 무무족 연합군이 용병단을 추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들은 므라드의 장군은 적을 포위하도록 멕 나이트 35대를 보냈다.
가프 용병단이 움직이고, 그 뒤를 무무족 본대가 쫓아가고, 므라드의 군대가 무무족 부대를 추격했다.
마지막으로 무무족 연합군의 멕 나이트 8대가 므라드의 멕 나이트 부대를 멀찍이서 감시하며 따라붙었다.
과격하고 잔인하지만 천천히 진행되던 전쟁이 가프 용병단의 움직임으로 인해 갑자기 빨라졌다.
***
루산은 멕 나이트 15대를 므라드의 요구에 따라 그에게 넘겨주었다.
어차피 멕 나이트는 모두 왕의 조카인 신관 므라드의 것이었다. 용병단은 잠시 고용된 형태였던 것이다.
어쨌든 남은 멕 나이트는 25대. 멕 워커는 3대, 파일럿은 49명.
그런데 루산은 구 귀족파 기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10명의 파일럿을 바르나 왕국으로 보냈다.
남은 파일럿은 39명, 멕은 나이트와 워커를 합쳐 28대.
11명의 파일럿이 남았다.
루산은 그들 가운데 7명을 예비 파일럿으로 쓰기 위해 멕 나이트 부대에 남겨 두었지만, 4명은 다른 곳에 배치했다.
바로 대형 거미에 타게 한 것이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마법사 한 명을 붙여 주었다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혼자서 대형 거미를 운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조종을 배우고 사방을 감시하라고 보낸 것이다.
게다가 루산은 나중에 가프 연구소에서 수리, 개조하는 대형 거미들을 추가로 인수해 운용하게 된다.
그때 대형 거미를 다룰 수 있는 인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멕 나이트 전투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비교적 젊고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을 골라 대형 거미 조종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그들이 탄 대형 거미는 평지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바위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평지에서 볼 때는 그 존재를 쉽게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리가 멀지만, 용병단과 그들 사이가 다른 봉우리로 가려지지 않아 마나 통신이 가능한 위치에 늘 있었던 것이다.
남방군 출신 기사 하나가 망원경을 들고 산 아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동하고 있는 부대를 지켜보며 말했다.
“우리 부대와 무무족 추격 부대 사이의 거리보다 무무족과 왕질군 본대 사이가 더 가깝다! 무무족 별동대가 왕질군 본대를 크게 에워싸며 따라오고 있다! 무무족 지휘관이 생각이 있는 자라면 이미 추격하기에 늦은 우리 부대를 계속 따라오기보다 반전하여 왕질군 본대를 먼저 섬멸한 뒤 우리 부대를 다시 공격하려 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다른 기사가 대형 거미에 설치된 마나 통신기로 가프 용병단에 보고했다.
***
[···알았다. 계속 상황을 지켜보도록!]
며칠째 빠르게 이동하느라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미켈이 통신을 마치고 루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상태라면 왕질군의 멕 나이트 부대가 먼저 공격을 당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반전해 포위 공격을 할까요?]
루산이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이런 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포위망을 완성하기는 할 텐데요, 적이 므라드의 부대를 먼저 덮치도록 내버려 두고, 그 직후에 우리가 도착해서 적의 등을 치는 거죠.]
[음!]
[므라드가 이기는 게 좋지만, 너무 기고만장하게 둘 수는 없어요. 우리가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해 보죠!]
미켈은 가프 용병단의 이동 방향을 돌린 뒤 대형 거미와의 연락을 계속해 나가면서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는 사이에 무무족의 장군 슈야도 므라드의 본대를 치기로 작정하고 방향을 돌렸다.
[바야드로 가는 적의 부대를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차라리 적의 본대를 먼저 섬멸한 뒤 우리 땅을 짓밟은 놈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하자!]
비통해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무무족 전사들이 이를 악물고 왕질군 본대를 향해 달려갔다.
왕질군 본대도 적의 공격을 알아차렸지만, 적의 별동대가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후퇴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만약 자기들만 후퇴해 버리면 적진 깊숙이 들어간 가프 용병단을 잃을 염려가 있었기에 차마 물러날 수가 없었다.
용병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를 잃으면 앞으로 통일 전쟁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병들이 무무족 놈들의 반전 사실을 알고 방향을 돌려 우리와 함께 적을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모르니 누가 가서 그 사실을 알려라! 누가 가겠느냐?]
[제가 가겠습니다!]
가프 용병단에게서 넘겨받은 산악형 그레이 울프를 탄 전사 하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자원했다.
[좋다! 가라!]
[네!]
산악형 그레이 울프 한 대가 전방으로 달려가고 므라드 군 본진의 멕 나이트들은 포위망을 완성시킬 만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무무족 멕 나이트들이 그런 므라드 군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멀리 떨어진 뒤쪽에서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 25대가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