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이제 우리의 힘이다
285. 이제 우리의 힘이다
상대의 실력은 첫 격돌만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슈야가 탑승한 재생 기체가 루산이 타고 있는 헤비 스틸의 왼쪽 목과 어깨 사이를 노리고 도끼로 강하게 내리쳤다.
쑤웅-!
육중한 헤비 스틸의 몸통을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쪼개 버릴 것만 같은 강한 공격이었다.
루산은 그 공격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두 손으로 굳게 쥔 대검의 손잡이 가까운 검신 부분으로 도끼날을 막고 튕겨 냈다.
그러나 워낙 내리치는 힘이 강해 루산이 탑승한 헤비 스틸은 자신의 대검 날에 왼쪽 어깨를 살짝 찍히고 말았다.
헤비 스틸은 그에 개의치 않고 도끼날을 튕겨 냄과 동시에 오른발을 앞으로 크게 뻗으며 그 발을 따라 상체를 빠르게 이동하면서 그 힘으로 대검을 그대로 쭉 잡아당겼다.
온몸을 이용한 강력한 베기 공격!
방어와 동시에 이어지는 위력적인 공격에 재생 기체 가슴 윗부분이 통째로 잘려 나갈 듯했다.
깜짝 놀란 슈야가 재빨리 원형 방패를 자신이 탑승한 기체의 가슴과 적의 대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쓰릉!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제 방패에 불똥이 튀며 깊은 칼자국이 남았다.
두 기체는 그렇게 서로 교차해 지나갔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슈야가 얼른 몸을 돌려 루산을 견제하며 말했다.
- 용병 주제에 제법이구나!
루산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놀란 그는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미 므라드 군에 용병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지난번 전투에서 그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직접 맞붙어 보니 짐작한 것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범하게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자신의 실력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루산은 상대의 이러한 자부심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 너도 죽이기에는 아까운 실력이야.
- 뭐라?
슈야는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 인정받은 데 대한 약간의 기쁨과 죽음 운운하는 상대의 건방진 태도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 내 밑으로 들어오면 열일곱 번째 실력은 될 거야. 쓸 만한 녀석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거지. 어때? 생각 있어?
- 이놈이!
상대가 도발하는 것을 알면서도 슈야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재차 맹렬히 덤벼들었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부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야의 도끼 공격이 폭풍처럼 거칠게 이어졌다.
루산도 물러서지 않고 무게가 더 나가는 기체와 길이가 더 긴 무기의 장점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쳐내면서 간간이 날카로운 반격을 가해 슈야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공방을 이어나가는 동안, 무무족 전사들이 대장 기체들을 지나쳐 므라드 군을 향해 돌진했다.
미켈이 명령했다.
[전열, 방어 대형 갖춰!]
쿠쿠쿠쿠쿠쿵!
가프 용병단의 일반형 기체들이 묵직한 사각 방패를 죽 연결하여 벽을 만들고 오른발을 뒤로 뻗어 버티는 자세를 취했다.
미켈의 명령이 쉼 없이 이어졌다.
[경량 멕, 좌우로 돌아!]
산악형 그레이 울프들이 마나 진동 투창으로 적의 측면과 뒷면을 노리기 위해 좌우로 크게 돌았다.
[좌우측 부대, 그 자리에서 버텨!]
므라드 군을 지지하는 부족들의 재생 멕 나이트들이 가프 용병단 좌우에서 방패를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때 무무족 멕 나이트 30여 대가 므라드 군을 덮쳤다.
가프 용병단 방패 부대뿐 아니라 좌우측 부대까지 강하게 충돌한 것이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므라드 군의 방어진이 출렁였다.
가프 용병단의 방패 벽은 크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내 다시 단단하게 방어 진형을 유지한 반면 므라드 군 좌우측 부대는 진형을 갖추고 싸우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뒤로 밀리면서 곧바로 혼전으로 접어들었다.
무작스러운 도끼질이 피아를 불문하고 이어지고, 멕 나이트의 금속 파편들이 살점처럼 툭툭 떨어져 나갔다.
그러는 동안 아군 뒤로 돌아간 경량 멕들이 좌우 측면에서 튀어 나왔다.
[쓰러뜨릴 생각 말고 주의만 끈다는 생각으로 던져! 아군 맞추지 않게 조심하고!]
바이크가 경량 멕 파일럿들에게 잔소리를 하며 마나 진동 투창을 던졌다.
슝!
슈슝!
운이 좋게 바이크가 던진 첫 번째 투창이 무무족 재생 기체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푹!
- 이 자식들! 내 솜씨가 어떠냐?
투창을 명중시킨 바이크가 희열에 차 방방 날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첫 번째 공격이 성공한 뒤로 무무족 멕 나이트들은 측면과 후면의 투창 공격을 신경 썼기 때문에 더는 유효 공격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옆과 뒤에서 투창이 날아온다는 것을 의식한 탓에 무무족 전사들은 정면의 적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므라드 군 좌우측 부대에 가해지는 무무족의 압박이 줄어들었다.
그때 미켈이 명령했다.
[방패 벽, 뒤로 서서히 물러난다!]
중앙을 지키고 있던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들이 방패 벽을 세운 채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마치 가해지는 압력을 버티지 못해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프 용병단이 서서히 뒤로 빠지자 진형은 저절로 U자 모양으로 바뀌었고 무무족 멕 나이트들은 므라드 군에 둘러싸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눈앞의 적과 살벌한 교전을 벌이고 있던 무무족 전사들은 전체 진형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므라드 군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아 있는 예비 병력 없이 비슷한 숫자의 적과 죽을 둥 살 둥 싸우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서 싸우고 있는지 몰랐다.
오직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만이 과거 전술 훈련을 밥 먹듯이 해 왔기에 방패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미켈이 이 판을 섬세하게 조율해 나갔다.
[방패 부대 1, 2, 3번 기체! 뒤로 좀 더 빠져! 좌우측 부대 힘껏 밀어!]
방패를 든 가프 용병단 기체들이 뒤로 더 빠지자 가프 용병단과 좌측 므라드 군 기체들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다.
자칫하면 므라드 군이 분리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미켈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많지는 않지만, 아직 활용하지 않은 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통일군! 가프 용병단과 좌군 사이가 벌어졌다. 그 사이로 밀고 들어가 적의 허리를 끊어라!]
그렇지 않아도 통일군에 소속된 젊은 부르사의 전사들은 선봉에 서 있다가 뒤로 빠지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상태였다.
작은 원형 방패와 마나 진동 도끼를 든 재생 멕 나이트 부대가 가프 용병단과 좌군 사이로 밀고 들어갔다.
격렬한 도끼질에 낡은 장갑과 녹슨 금속 파편, 방패 조각들이 와장창 떨어져 나가며 U자 모양으로 포위된 무무족 멕 나이트 부대의 허리가 잘리기 시작했다.
한편 루산과의 싸움에 몰두해 있던 슈야는 무무족 멕 나이트 부대가 처한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깜짝 놀랐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잘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반원형으로 포위된 데다 뒤쪽도 경량 멕들이 던지는 투창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등을 보이고 달아나면 좌우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무무족 멕 나이트 대다수가 U자 포위망에 갇혀 궤멸될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유일한 활로는 그나마 포위망만 갖춰져 있고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이 부하들을 이끌고 한쪽 면을 부수고 뚫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슈야는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루산이 끈질기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이놈!
눈이 이미 부하들 쪽으로 돌아가고 마음이 급해진 슈야가 부하들과 합류하기 위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 왔지만, 루산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어깨로 맞부딪쳤다.
무게가 더 나가는 헤비 스틸은 슈야의 재생 멕 나이트를 뒤로 튕겨내고는 멀어지는 그 기체를 대검 끝으로 수직으로 베어 내려갔다.
쓰릉!
재생 기체 가슴의 장갑판과 조종실 덮개가 베인 자국이 잠시 용암처럼 붉게 이글거리다 이내 식어 검게 굳었다.
슈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깊게 베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조종실에 탄 상태로 몸이 좌우로 갈릴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산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강한 충돌의 여파로 몸이 휘청거리는 슈야의 재생 기체를 향해 이번에는 먼저 달려 몸통 박치기를 감행한 것이다.
쾅!
슈야의 멕 나이트가 뒤로 벌렁 쓰러졌다.
루산은 재차 달려가 어깨가 벌어진 채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슈야의 재생 기체를 대검으로 내리쳤다.
스릉!
도끼를 든 오른팔이 떨어지고,
촥!
오른쪽 허벅지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슈야는 다시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허벅지 아래쪽이 없는 상태로 일어날 수는 없었다.
루산이 버둥거리는 재생 기체를 내려다보며 외부 확성기로 나직이 말했다.
- 항복하면 살려 준다. 너뿐 아니라 너의 부하들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이건 진심이야.
그러나 슈야는 이를 부득부득 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패배가 믿어지지 않았고, 항복하면 살려 준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사에서 패배한 전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 결정을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무의미한 피를 원하지 않지만, 므라드의 전사들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 이놈!
슈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루산은 헤비 스틸을 돌려 므라드 군과 무무족 멕 나이트들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전투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눈치 빠른 바이크가 이미,
- 적의 대장이 쓰러졌다!
외치고 있었고, 통일군의 젊은 파일럿들이 U자 포위망에 갇힌 무무족 멕 나이트 부대를 반으로 절단해 버렸다.
승기가 완전히 넘어온 가운데 달아나려는 무무족 멕 나이트들은 경량 멕들이 주위를 에워싸며 몰이사냥을 하고 있었고, 포위망에 합류한 루산이 재생 멕 나이트의 팔다리를 거침없이 베어 나갔다.
그물 안에 갇힌 무무족 멕 나이트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루산의 지시를 받은 가프 용병단은 적의 파일럿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므라드 군의 전사들은 쓰러진 적의 멕 나이트 조종실을 마나 진동 도끼로 힘차게 내리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한쪽 발과 한쪽 팔로 엎드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슈야가 상처 입은 곰처럼 소리쳤다.
- 죽이지 마라! 항복한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루산이 통신기로 명령했다.
[전투 중지! 명령을 어기면 엄벌하겠다! 전투 중지!]
미켈이 모든 파일럿들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적의 대장이 항복했다! 모두 전투를 중단하고 포위망을 유지한 채 물러나라!]
승리에 도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적 멕 나이트에 도끼질을 계속해 대는 므라드 군의 젊은 파일럿들은 가프 용병단의 헤비 스틸들이 두꺼운 철제 방패로 몇 번 후려치며 강제로 떼어내고 명령 위반죄를 묻겠다고 위협하자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므라드 군은 U자 포위망을 O자로 바꾸고 멕 나이트에서 나오는 무무족 파일럿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루산이 미켈에게 다시 한번 지시했다.
[므라드 군이 무무족 전사들을 해치지 않도록 잘 감시하세요. 이제 우리의 힘이니까.]
[알겠습니다, 대장님!]
루산은 슈야 마우메 쪽으로 걸어갔다.
가르다이아 지방 최대의 부족 무무족.
신관 므라드가 통일 전쟁을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무무족.
그 강력한 부족을 이끌어 온 추장의 아들이자 최강의 전사이며 뛰어난 장군인 슈야 마우메가 팔다리가 하나씩 잘린 자신의 멕 나이트에서 나와 므라드의 전사들에게 포박되고 있었다.
그가 꿈틀거릴 때마다 그의 몸을 꽉 묶은 질긴 밧줄이 끊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루산이 멕 나이트에서 내리 그에게 다가갔다.
슈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루산은 묵묵히 그 눈길을 받았다.
그로부터 하루 뒤, 무무족 족장과 원로들의 시체가 무무족 최대 도시 바야드의 중앙 광장에 즐비하게 걸렸다.
신관 므라드는 루산과의 약속을 지켜 피의 보복을 이것으로 간단히 끝내고 자신의 관대함을 널리 알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