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변경은 넓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른다
286. 변경은 넓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른다
정찰을 나갔다 돌아온 바이크가 산악형 그레이 울프에서 내렸다.
광장에는 시체를 묶어 놓은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제법 여러 차례 봐 온 풍경이라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더운 여름이라 금방 부패해 악취를 풍기고 벌레가 꼬이는 시체들을 보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멕 나이트에서 내린 바이크는 헛구역질을 하다가 인상을 찌푸린 채 동료들이 쉬고 있는 작은 나무 그늘로 가서 엉덩이를 비벼 넣었다.
“더워! 저리 가!”
“같이 좀 앉자고요!”
잠시 티격태격하며 동료애를 쌓은 바이크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로 미켈에게 보고했다.
“코빼기도 안 보여요.”
“역시··· 그렇군.”
미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부르사의 앳된 전사 하나가 얼른 물주머니를 가져와 바쳤다.
바이크는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냉큼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을 호위하고 식사, 취침 등의 편의를 돌보는 지원 부대가 따로 생긴 것도 지난 한 달 사이에 달라진 점이었다.
“어으, 흙냄새! 어디 깨끗하고 시원한 얼음물 없나?”
가프 용병단 지원 업무를 맡은 므라드 군 소속의 앳된 전사가 바이크의 불가능한 주문에 나름 충실하게 대답하려는 것을 남방군 출신 파일럿 하나가 손짓으로 막고 돌려보냈다.
바이크의 말이 별 의미 없는 투덜거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시원한 얼음물 같은 소리 한다. 부르사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에이, 그래도 족장들 거처에는 있겠죠. 냉각기를 비롯해 페르보 제국산 제품들을 잔뜩 쌓아 놓고 살던데요?”
“그래 봐야 일부겠지.”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원······. 작은 부족 족장일수록 더 사치를 한답니다. 장군입네, 군벌입네 하는 애들은 밑에 부하들까지 죄다 페르보 제국 물건, 필센 제국 물건을 밀수해서 쓴대잖아요. 부족민들은 굶어 뒈지든 말든 약탈을 당해 험한 꼴을 보든 말든 사치를 위해 더 쥐어짜고 더 약탈하고 그런다니까요?”
“새삼스럽게······.”
“그러니 이렇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매달아 죽여도 다른 놈들보다 덜 죽였다고 자비로운 통치자니 뭐니 하지. 세상사 요지경이라니깐!”
“쯧! 입조심은 해야지!”
남방군 출신 중년 파일럿의 경고에 바이크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땅에서 신이나 신관을 욕해서는 안 된다.
바이크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가르다이아 지방은 통일한 건가요?”
“그런 셈이지.”
가르다이아 최강의 부족 무무족이 패하자 눈치를 보던 다른 부족들이 속속 항복해 왔다.
끝까지 저항하는 부족들도 있었지만, 므라드 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므라드 군은 언제나 훨씬 많은 병력으로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채 단 한 대의 멕 나이트도 부서지지 않고 적을 제압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프 용병단이 있었기에 므라드 군에서 가프 용병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노획한 적대 부족의 멕 나이트로 무장한 통일군의 규모 또한 점점 더 커졌다.
무무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가르다이아 지방을 완전히 통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자 국왕 영역인 부르사 해안 지방, 그중에서도 가르다이아 지방과 닿아 있고 피닉스 제철이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항구 도시가 므라드에게 투항해 왔다.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장군은 알았던 것이다.
이 항구를 통해 철광석을 수입하는 피닉스 제철에서 멕 나이트를 므라드에게 제공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배후에 필센 제국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또한 므라드의 승리가 계속되고 그의 힘이 강해질수록 이 항구를 통해 수출되는 철광석의 양과 들어오는 물품의 양이 더욱 늘어나리라는 것을.
필센 제국과 강력하게 유착된 므라드의 편에 서는 것이 주머니를 더욱 살찌우고 수명이 갑자기 단축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쨌든 부르사 왕국 중부의 지배자 므라드가 국왕의 영역이었던 항구까지 차지함으로써 부르사 내부적으로는 통일 전쟁으로 인한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으나 므라드 군 진영은 멕 나이트를 추가로 들여오고 마나 연료봉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이 들어오는 길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어 사기가 더욱 올라갔다.
부르사 소식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슈텐달 남작이 철도 공사를 위해 기술진과 함께 찾아온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미 철도 회사를 인수해 철로 궤도, 기관차, 화차를 생산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공사를 시작해도 문제가 없었다.
철도 건설과 관련하여 기술적인 문제는 루산이 개입할 부분이 없었으나 정치, 경제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조언할 수 있었다.
“남작님, 왕질이 멕 나이트 90대를 추가로 도입하기를 요청했습니다.”
“90대나요?”
“네. 총 130대가 되는 셈이죠. 단번에 모두 들여올 수는 없으니 순차적으로 들어오겠지요. 그런데 금액으로 따지만 대당 22만 골드라고 했으니 3천만 골드 가까운 엄청난 금액입니다. 연료, 소모품, 용병 급료까지 포함하면 6천만 골드가 넘을 수도 있어요.”
슈텐달 남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므라드는 그 금액에 해당하는 개발권을 피닉스 제철에 주는 것이고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루산에게 직접 지불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슈텐달 남작이었기 때문이다.
루산이 나중에 여유가 되는 대로 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멕 나이트는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획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냥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부르사의 철광석 도입 사업이 성공해 빨리 정상 궤도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므라드에게 제공하는 원조의 규모가 더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130대에서 더 늘어난다고요?”
“멕 나이트도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군사 원조만이 아니에요. 철도 부설도 말하자면 원조에 해당하는 거죠. 그리고 아라드 왕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농업 기지 사업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하고요. 부르사는 모든 산업이 망가져 있잖아요. 므라드는 어떤 사업을 제안해도 반길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거예요. 그러니 굳이 가르다이아 지방의 철광석 도입에 한정하지 말고, 6천만 골드에 한정하지 말고, 더 크게 더 많은 자원과 다양한 사업을 선점해 놓는 게 좋을 겁니다. 고슬라 사장과 상의해 봐도 괜찮고요.”
슈텐달 남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는 도둑들이 들끓다 보니 어느 누구도 생산에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뜻있는 통치자가 등장해 도둑을 모조리 소탕하려 해도 먹고살 거리가 없다면 도둑은 근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르사와 같이 수십 년 동안 모든 산업이 망가진 나라는 스스로 먹고살 거리를 마련할 힘이 없다.
이때 등장해 광산을 개발하고 철도를 놓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피닉스 제철은 부르사 왕국 사람들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철광석 개발에 한정하지 않고, 가르다이아 지방에 국한하지 말고, 더 많은 사업을 벌인다 해도 므라드는 모두 허락해 줄 것이다.
나중에 부르사를 완전히 통일한 뒤에는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기 어렵다.
전쟁 중이라 위험하다고 생각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지금이 이 나라에 투자할 적기인 것이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루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슈텐달 남작은 알아들었다.
6천만 골드로 부르사 왕국의 주요 자원과 중요 산업을 선점할 수 있다면 사실 거저먹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과연 므라드가 중부뿐 아니라 부르사 왕국 전체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였다.
므라드가 실패한다면 그동안 쏟아부은 것은 몽땅 날아가기 때문이다.
“자작님, 가르다이아 지방은 부르사 여덟 개 지방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게다가 국왕 영역은 다른 지방보다 훨씬 넓죠. 므라드가 통일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다른 지방을 통일하고 부르사가 여덟 개 지방으로 나뉘어 극심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
“므라드는 확실히 걸출한 인물이고, 부르사 왕국은 멕 나이트가 풍부한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게다가 대전쟁이 벌어져 페르보 제국이나 인근 나라들이 부르사에 개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므라드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죠. 다른 지방에 뛰어난 인물이 등장한다 해도 멕 나이트 없이 우리에게 맞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므라드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루산은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자작님. 므라드 전하와 만나서 부르사 왕국 전체를 놓고 사업 계획을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은 부르사 통일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먹고살 길을 터 줘야죠. 약탈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줘야죠. 므라드는 남작님을 귀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루산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사업은 사업가에게 맡기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제가 오카수스로 당장 건너가기 어렵기 때문에 남작님께 부탁을 좀 해야겠어요.”
“무슨 부탁입니까?”
루산은 슈텐달 남작에게 포로로 잡은 부르사 전사들과 그 가족들을 자신이 확보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뒤 덧붙였다.
“그들을 아라드 변경으로 보낼 거예요. 전사들은 전진 사냥 캠프에서, 그 가족들은 개척촌에서 살게 할 겁니다. 그리고 전사들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휴가를 줄 거예요. 그러다 변경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전사들을 가프 용병단에 넣을 거예요.”
“음!”
부르사의 전사들을 가프 용병단에 넣는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러니 포로와 그 가족들을 가혹하게 다스리지 말고 다른 변경 주민들보다 신경을 더 써 주라고 하세요. 그래야 사고가 나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자작님. 그런데 말입니다.”
“네?”
“부르사 왕국의 통일 전쟁은 이제 겨우 가르다이아 지방만 끝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모르지만, 지금보다 포로를 훨씬 많이 획득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지······?”
“그렇겠죠.”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변경은 넓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누가 알겠어요? 굳이 확인하려는 사람도 없고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바깥세상에 나올 때나 의미가 있겠죠.”
“네.”
“그리고 이왕 아라드 변경으로 가시면 기동 부대 책임자를 만나 아우로라 연합 멕 나이트를 계속 보내라고 전해 주세요. 이 부분은 고슬라 사장과 의논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멕 나이트를 실어 나를 배편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멕 나이트는 이스타드 출신 파일럿들이 운반하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자작님.”
슈텐달 남작은 루산과 헤어져 므라드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철광석과 이를 운반할 철도 건설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야기하는 관점을 살짝 바꾸어 광산과 철도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고용하는 문제를 부각시켰다.
므라드의 태도가 더욱 진지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확인한 슈텐달 남작은 자신감을 갖고 다양한 사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앞으로 부르사 땅에서 슈텐달 남작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로 볼 것이오!”
므라드가 그렇게 선언할 정도로 슈텐달 남작은 귀빈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슈텐달 남작과 피닉스 제철의 광산과 철도를 엄중히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
슈텐달 남작과 함께 온 공사 팀은 므라드 군의 경호를 받으며 철도 공사를 시작했는데,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구간을 나누어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했다.
그와 함께 광산에서도 더 많은 인부를 고용했다.
가르다이아 지방과 항구의 가난한 백성들이 광산과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일하고 피닉스 제철의 인장이 찍힌 전표 - 향후 몇 년 동안 이 전표가 부르사 왕국에서 화폐 역할을 했다 - 를 받아 피닉스 제철 배급소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교환해 생활했다.
므라드 역시 본격적인 부르사 통일 전쟁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포로로 잡은 부르사의 전사들과 그 가족들은 배편으로 아라드 왕국으로 가서 아라드 변경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
“죽는 것보다는 낫지. 살아 있으면 기회는 있을 테니까. 살아 보니 그렇더군.”
“······.”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야.”
슈야는 말없이 루산을 노려보다 의욕을 잃은 맹수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떠나갔다.
루산은 손발을 묶인 채 멀어지는 슈야와 부르사 전사들을 한동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여전히 할 일이 많았기에 언제까지 저들의 서글픈 뒷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켈을 만나 신신당부했다.
“대형 거미와 파일럿 다섯 명을 데리고 떠날 겁니다. 중요한 전력이 빠지는 셈이니 적의 규모가 확실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미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루산은 바이크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파일럿과 함께 남동쪽으로 떠났다.
<동지들 소재 파악!>
바르나 왕국으로 보낸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