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유리 깨는 망치
289. 유리 깨는 망치
군무부 별관에 마련된 전쟁 상황실.
평소에도 멕 나이트가 경비를 설 정도로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곳을 오늘은 근위대 멕 나이트들까지 둘러싸고 있었다.
“···바르나 왕국에는 동방군 18개 기동 전단과 새로 편성된 4개 특별 전단, 2개 마나포 전단, 4개 공병 부대, 12개 보병 사단이 투입된 상태입니다.”
상황실장이 아우로라 대륙 모형도 앞에 서서 지시봉으로 위치를 가리키며 절도 있게 브리핑했다.
“수도 라브나를 돌파해 페르보 제국으로 진입할 계획이지만, 적이 라브나 서쪽 도우나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극렬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적은 바르나, 페르보 그 외의 여러 나라들을 합쳐 약 20개 기동 전단을 투입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재상, 군무대신, 외무대신을 거느리고 브리핑을 듣던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의 표정을 본 상황실장은 긴장했지만, 군인다운 절도를 잃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아우로라 연합에서 추가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바르나 공략을 마치기 위해 신규 편성 기동 전단 12개, 네세베르 공략군 4개 전단, 2개 마나포 전단을 바르나 방면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쯤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제야 황제가 다소 표정을 풀고 물었다.
“그 정도면 충분한가?”
“충분합니다!”
상황실장이 자신 있게 대답한 뒤 설명했다.
“페르보 쪽에서도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는 일은 어떻게든 막으려 할 것이기에 라브나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펼쳐지겠지만, 북방군이 페르보 북서쪽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바르나 왕국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네세베르 공략군과 남방군 때문에 루한 왕국이나 시바스 왕국도 원군을 보내기 어려울 테니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상황실장은 공병 부대가 마나포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부교를 건설해 주력 병력이 강을 건너고, 특별 부대가 도우나 강 상류 쪽으로 돌아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까지는 브리핑하지 않았다.
황제에게는 승리가 필요할 뿐 그런 세세한 계획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말했다.
“바르나를 점령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재상, 군무대신, 외무대신 그리고 전쟁 상황실장과 고위 장군들은 황제가 말하는 내용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단지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필센 제국과 아우로라 연합과의 병력 차이는 약 4배.
앞선 대전쟁 이후 필센 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면서 그 차이가 다소 줄었을 수는 있지만, 아우로라 연합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애를 써 왔기에 병력 격차가 현격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필센 남쪽 아라드와 필센 북쪽 이스타드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카수스 대륙에서 적을 몰아냈다 해도 여전히 병력은 아우로라 연합이 더 많았다.
게다가 이제 아우로라 연합은 자기네 땅으로 쳐들어온 적을 물리치기 위해 더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고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병력 동원이 더 용이했다.
이런 줄 알면서도 필센 제국은 전쟁을 피하려 하지 않고 아우로라 연합에 기꺼이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전시 증편 계획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생산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지만 이것만 믿은 것은 아니었다.
아우로라 연합 분열 계획!
아우로라 연합은 필센 제국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첩자를 보내왔다.
그러나 아우로라 연합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필센 제국 또한 아우로라 연합에 속한 나라들에 많은 요원들을 파견하여 비중 있는 인물들을 접촉하고 포섭해 왔던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공들여 키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가 왔다.
그들은 반전 여론을 형성하고, 필센 제국의 편에 붙는 것이 국가와 개인에 더 유익하다고 설파할 것이다.
다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려면, 그리고 그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필센 제국의 강력함을 아우로라 대륙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아우로라 대륙 사람들에게는 오카수스 대륙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이 패하고 물러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필센 제국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자기들 터전을 언제든 짓밟을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아우로라 연합의 수장격인 페르보 제국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가 가장 클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바르나 왕국을 점령해 페르보 제국으로 통하는 길을 뚫으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이전 대전쟁처럼 25년 동안 전쟁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오래 전쟁을 하면 이긴다 해도 국력을 회복하는 데 긴 세월이 소요된다.
‘3년 만에 끝낸다!’
전쟁 개시 3년 만에 결정타를 가하고 아우로라 연합을 깨뜨려서 이 전쟁을 마무리할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 최대, 최강의 제국을 완성하리라!
그렇게 선황제가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하리라!
황제가 재상에게 말했다.
“바르나에서 승리하면 곧바로 유리 깨는 망치 계획을 실행하세요.”
유리 깨는 망치.
바르나 왕국에서 망치처럼 강하게 때려 아우로라 연합이라는 유리판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린다는 의미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아우로라 연합에 뿌려 놓은 분열과 배신의 씨앗들을 통해.
“알겠습니다, 폐하!”
오베론 공작이 오랜만에 장수처럼 우렁차게 대답했다.
***
프리드리히 황제가 군무부를 떠나자 오베론 공작은 외무대신, 군무대신 그리고 참모부 고위 장군들과 함께 ‘유리 깨는 망치’ 작전 회의를 주재했다.
아우로라 연합에 파견된 첩보 요원들을 관리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오베론 공작이 맡아 왔다.
과거 프리드리히 황제가 필센 제국에 들어온 첩자들과 귀족파 잔당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해 오베론 공작에게 반란 유도 작전을 실행하라고 할 때 그가 생존을 위해 황제에게 받아낸 것이었다.
혹여 황제가 반란을 진압하면서 모른 체하고 자신을 귀족파 잔당으로 몰아 숙청시키는 사태를 막고자 하는 안전장치로 아우로라 연합에 파견된 첩보 요원들 명단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반 황제와 프리드리히 황태자도 오베론 공작의 그런 염려를 우려하여 유리 깨는 망치 계획의 책임자로 기꺼이 그를 앉혔다.
황제가 오베론 공작을 함부로 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유리 깨는 망치 작전이 무산되면 이번 대전쟁은 과거 대전쟁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필센 제국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승리하더라도 엄청난 전비를 감당하지 못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우로라 연합 소속 국가들에 파견된 요원들의 임무는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 달랐다.
그와 관련하여 작전 계획을 검토하고 최종 명령을 하달한 공작은 밤늦게 귀가했다.
피곤에 찌들어 있는 그에게 루트가 가문의 일과 노바의 정세와 동향을 보고했다.
“앞으로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변동이 있을 때만 알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루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버지가 나랏일 때문에 가문의 대소사와 정세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면 가문의 힘을 빼돌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베론 공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도 나랏일을 알아야 집안을 더 잘 관리할 수 있을 테지.”
“네?”
“지금 우리 가문에 가장 중요한 일은 네 형에게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다. 병력과 물자를 아끼지 말고 보내도록 해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공을 세우고 많은 나라들을 점령해야 하느니라.”
유리 깨는 망치 작전이 실행되어 아우로라 연합이 깨지고 아우로라 연합에 속한 나라들이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최대한 많은 땅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땅을 모두 하사받지는 못하더라도 공적 반영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전쟁이 끝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베론 공작이 루트에게 유리 깨는 망치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아!”
루트는 깜짝 놀랐다.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대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다는 데 놀랐고, 아버지가 이 작전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수십 년을 보내왔다는 데 다시 한번 놀랐다.
특히 후자는 반란 유도 계획에서 자신을 버리는 말로 이용했던 것과 비슷한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나에게까지 숨기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이 새삼 피어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마음속으로 이미 정리한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공손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남방군에 최대한 많은 병력과 물자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나가 봐라.”
“네. 쉬십시오.”
오베론 공작의 방에서 나온 루트는 유리 깨는 망치 작전과 남방군을 최대한 지원하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하느라 머리를 팽팽 굴렸다.
***
루산은 밀수업자의 안내를 받으며 바르나 왕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목격한 광경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전쟁터와도 달랐다.
“아!”
수다스러운 바이크도 차마 떠벌리지 못하고 한숨 같은 탄성을 토할 뿐이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바르나 왕국 서쪽.
전쟁이 발발한 이후 지난 3년 동안 필센 제국의 동방군과 아우로라 연합군의 멕 나이트 수천 대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도시는 성한 건물이 없었고 마을은 완전히 짓밟혀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면 으레 치우기 마련인 멕 나이트 잔해와 파편들도 도처에 방치되어 녹이 슬어가고, 그 주위에 나무와 풀이 자라고, 야생 동물과 새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런 멕 나이트가 수백 대나 되었다.
치울 여력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공방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필센 제국 야전군 가운데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는 동방군이 이럴 정도면······.”
“이렇게 해서 최강이 된 것이겠지.”
“음!”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나직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루산 일행은 그야말로 가루가 돼 있는 바르나 왕국 서쪽 지역을 통과했다.
바르나 왕국의 백성들은 상당수가 도우나 강을 건너 동쪽으로 피신했지만, 아직 떠나지 못한 백성들이 거적때기를 걸친 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폐허가 된 땅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도적 떼가 되어 루산 일행을 공격했지만, 기사 한 명이 작대기를 휘두르기만 해도 허수아비처럼 픽픽 쓰러졌다.
루산 일행은 그런 그들을 굳이 해치지 않고 서둘러 지나가 도우나 강 서쪽에 길게 진을 치고 있는 필센 제국 동방군의 진지들 가운데 강 너머로 수도 라브나가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미 진지 주위에는 군대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백성들이 대규모 난민촌을 형성하여 루산 일행이 접근해도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 달 전에 도착한 레보르크 일행을 그곳에서 만났다.
레보르크 일행은 밀수업자의 이야기를 듣고 레오파드 간편식을 나름 충분히 챙겨 왔음에도 이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 한 달 사이에 비쩍 말라 있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겪으며 동료를 구할 방법을 모색해 온 그들의 눈빛은 더욱 형형했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고생 많았어요. 어떤 상황입니까?”
“절반은 아우로라 연합군 상황을 파악하느라 강 너머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인원은 다섯 명뿐이었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보르크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난 3년 동안 동방군은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곳에서 최소 800대 최대 1,600대의 멕 나이트를 잃은 모양입니다. 물론 아우로라 연합군도 비슷한 숫자를 잃었겠죠. 어쨌든 귀족파 기사들은 늘 최선봉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이미 절반에서 3분의 2가량이 희생된 것 같습니다.”
“음!”
패퇴하는 경우가 아니면 멕 나이트가 부서져도 그 안에 타고 있는 파일럿들은 무사한 경우가 많았다.
필센 제국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멕 나이트는 동방군에 최우선적으로 공급되어 왔기 때문에 멕 나이트를 잃은 파일럿들은 새로운 멕을 타고 싸우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반에서 3분의 2가량이 희생되었다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전투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남은 가족들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싸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반란에 가담한 파일럿들의 목숨은 이처럼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대규모 병력이 새로 도착해 강변 진지 후방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멕 나이트만 무려 1천 대 이상이 들어왔답니다.”
“1천 대 이상!”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동방군 규모가 그 정도였다.
그야말로 동방군 하나가 통째로 새로 생긴 셈인 것이다.
기존의 동방군도 전시 증편을 거치고 대전쟁 이후 수도 군단과 지방군 병력까지 우선적으로 파견되었으니 3배 이상 된다고 봐야 했다.
“멕 나이트만 3천 대가 넘는다는 겁니까?”
“4천 대가 넘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
“어쨌든 이 정도면 강을 건너 끝낼 생각인 것이죠. 공병대가 다리를 설치하면 건너는 겁니다.”
루산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공병 부대의 멕 워커들을 자주 목격했다.
“이번에도 동지들이 교두보 확보 임무를 띠고 맨 앞에서 건널 것입니다.”
레보르크가 무겁게 말했다.
루산에게 반란에 뛰어든 구 귀족파 기사들은 자신의 동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동지가 될 수는 있었다.
그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왔으며 얼마 뒤에 어마어마한 대전투가 벌어지게 될 도우나 강 앞에서 루산과 그 일행은 동지들을 무사히 구출할 방법을 의논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