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290화 (290/450)

290.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290.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아무리 계획을 잘 짜고 준비를 잘해도 전쟁은 상대방하고 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잘 준비하고 잘 싸워 버리면 지는 것이지요.”

마젠스 자작의 말에 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베론 공단 사장인 마젠스 자작은 현재 노바에 와 있었다.

오베론 공단에서 운용 가능한 자금을 활용하여 루트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공단 자금을 유용하는 것이지만, 마젠스 자작은 교묘한 솜씨로 티가 나지 않게 거액을 주무르며 이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차를 밀수하여 유통하는 사업은, 초기에 도난 사고가 한 번 발생하기는 했지만 추가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이미 막대한 현금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사채 사업은, 대전쟁 와중에 경영난을 겪고 있는 사업체에 자금을 빌려주고 상환을 못하면 처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일찍이 오베론 지방에서 태어난 가장 뛰어난 천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마젠스 자작은 오베론 공단 사장으로 있으면서 필센 제국의 경제 흐름을 파악하고 유망 사업과 알짜 기업을 알아보는 눈을 장착했다.

단기간에 많은 사업체와 노바의 노른자 땅을 쓸어 담았다.

이번에 노바를 찾은 이유는, 데사우로 형제가 다루기에는 격이 맞지 않고 규모도 무척 큰 사업체를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노바에서 쇼핑으로 가장 유명한 에를랑겐 거리.

백화점 세 개를 비롯하여 거리 전체가 각종 상점으로 들어차 있는 쇼핑 거리를 소유하고 있는 에를랑겐 유통 상사를 통째로 접수하려는 것이다.

에를랑겐 유통은 상가만이 아니라 백화점과 상가에 납품하는 고가 상품의 생산·유통 라인을 모두 확보하고 있었다.

대전쟁 발발 이후 쇼핑 거리와 백화점에 손님이 뚝 끊겨 회사가 거의 망해 버렸지만, 필센 제국군이 오카수스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내고 전장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옮겨 가면서 마젠스 자작은 승리 분위기와 함께 소비가 살아나리라고 본 것이다.

어쨌든 에를랑겐 유통은 창업주가 백작이라 뒷골목 형제들이 취급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았고 그 규모도 엄청나서 직접 손을 쓰려고 찾아왔다가 루트 오베론으로부터 유리 깨는 망치 작전과 남방군 최대 지원 지시에 대해 듣고 조언하고 있었다.

“바르나 왕국에서 대승을 거두지 못하면 아우로라 연합 분열 계획은 쉽게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자작께서는 우리 제국이 대승을 거두지 못할 거라고 보는 겁니까? 이번에 바르나에 투입한 병력이 어마어마한데도?”

“지난 3년 동안 바르나 방면에서 싸운 동방군의 성과를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결국 수도에 도달하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제국군 최강의 군대라는 동방군이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죠.”

“네세베르 방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사적으로 천재라는 밤베르크 백작도 네세베르를 돌파하지 못했지요. 아우로라 연합이 그 정도는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새로 편성되는 기동 전단을 모두 바르나 왕국에 투입했으니 다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멕 나이트로 강을 넘는다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바르나를 점령했다 해도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목적지는 페르보 제국이지요.

“음!”

“유리 깨는 망치 작전에 대해서는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공자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면 됩니다.”

“남방군 지원 같은······?”

“그렇지요. 이 건은 지원을 해 주는 것이 맞습니다.”

“바트가 공을 많이 세우면 곤란한 것 아닙니까?”

그러자 마젠스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방군의 공이지요.”

“남방군의 공이라······.”

“그리고 남방군은 오베론 가문이 기른 군대입니다. 결국 바트가 세운 공은 오베론 가문의 공적이니 공자께 돌아올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젠스 자작은 좀 더 구체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남방군에 보낼 멕 나이트 물량을 일부 따로 보관해 두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멕 나이트 출하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물랭 마법 연구소의 멕 나이트 생산 공장은 모두 네 개가 있습니다. 그중 오베론 공단에 있는 공장은 오베론 가문의 입김이 어느 정도 통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오베론 해운을 통해 운반하게 됩니다.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루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루트는 마젠스 자작을 포섭한 자신의 결정에 새삼 만족해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

데사우로 형제가 엄청난 물량의 차를 밀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관 창고를 덮친 뒤 스텐커는 한동안 자중하고 있었다.

데사우로 형제가 사채업을 통해 사업 규모를 급속도로 키워 가고 있을 때에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에를랑겐 쇼핑 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스텐커는 바덴을 찾아갔다.

“루트 오베론이 에를랑겐 쇼핑 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마젠스 자작이 직접 에를랑겐 유통을 방문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바덴은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필센 제국군이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낸 직후에 그녀는 이미 그동안 억눌렸던 백성들의 마음이 풀리면서 유흥과 놀이, 소비가 활성화되리라 예상했다.

또한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해 나가면 그 나라의 재물이 본토로 흘러들어 올 것으로 보았다.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장원 별장 사업을 재개하고 대규모 놀이공원을 새로 지어 휴양·놀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에를랑겐 거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빠뜨린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소비!

쇼핑!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바로 이것부터 장악해야 했다.

에를랑겐 유통이야말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사업체였다.

그에 더해 준비 중인 차 사업을 쇼핑 거리와 결합시키면 더 빠르게 유행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덴은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으며 들뜨기 시작했다.

‘에를랑겐 백작 내외는 보름스 저택과 이웃에 살았는데 얼마 전에 집을 팔고 고향으로 떠났다고 했지?’

간간이 시어머니를 찾아가 조용히 밥을 먹고 오고는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에를랑겐 유통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구실도 있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마젠스 자작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렇게 보십니까?”

“네. 전쟁터가 오카수스에서 아우로라 대륙으로 넘어갔다 해도 아직 뚜렷한 경기 회복 신호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쇼핑 거리와 백화점을 노리다니, 장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남의 어려움을 이용해 사업체를 가로채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그리고 쇼핑 거리가 탐나기도 했다.

루트 오베론, 마젠스 자작과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그것은 차 사업을 결심했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일부러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덴은 시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

반란에 가담했다가 잡혀 최전선에서 복무하고 있는 구 귀족파 기사들을 구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지 사람을 빼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달아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그들은 3년 동안 어떻게든 달아났을 것이다.

필센 제국을 위해 싸우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일찌감치 투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가족이 인질로 남아 있었다.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적과 싸우다 죽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수천 대의 멕 나이트와 수십만의 병력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냥 빼돌리는 것도 아니고 싸우다 죽은 것처럼 만들어야 하다니, 무슨 수로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바이크의 반응은 매우 상식적이었다.

난민촌을 돌며 필센 제국군 진지를 매일 둘러보고 지형을 살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을 때는 대형 거미도 함부로 투입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정찰병과 감시병의 눈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집결한 상태라면 대형 거미나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기계도 활용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루산에게는 마지막 수단이 남아 있었다.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방법.

군무부 감찰관으로 있다가 동방군으로 전출된 오스카 빈켈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루산과 마찬가지로 오베론 가문에 의해 가문이 망했기에 복수를 위해 기꺼이 루산에게 협력했다.

그러나 그가 복수하려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오베론 공작 가문이었다.

황제와 필센 제국을 복수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필센 제국의 군인인 것이다.

반면 루산은, 황제의 잘못을 오베론 공작과 똑같은 수준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이런 황제를 굳이 황제로 섬겨야 하는가, 이런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백성의 안위를 위협하고 재산을 가로채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황제.

그런 황제에게 반기를 든 구 귀족파 잔당을 기꺼이 동지로 맞이할 수 있었다.

과연 오스카 빈켈이 반란죄를 지은 구 귀족파 기사 구출 작전에 협조해 줄 것인가?

그는 끝까지 교분을 유지하고 싶은 당당한 기사이고 필요한 사람이기에 이 문제로 틀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 도합 6천여 대의 멕 나이트가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루산은 오스카 빈켈을 찾기 시작했다.

이곳에 워낙 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어 그를 찾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에 만났을 때 동방군으로 전출된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직책도 모르고 소속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서와 끈기였다.

‘동방군 사령관이신 라이네 후작께서 빈켈 경에게 순환 근무가 끝나면 동방군으로 돌아오라고 직접 말씀하셨다고 했지? 그 정도로 아낀다면 참모로 임명해 곁에 두고 쓰지 않을까?’

루산은 일행에게 오스카 빈켈이라는 파일럿의 소재를 파악해 보라고 말한 뒤 본인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동방군 사령부 입구 근처에서 하루 종일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낡은 여행자 망토와 오랫동안 씻지 않고 수염을 자르지 않아 지저분한 얼굴로 인해 거지꼴이 따로 없었지만, 워낙 체격이 다부지고 눈빛이 반짝여 난민촌의 백성들이 함부로 텃세를 부리지 못했다.

그렇게 나흘을 지키고 있을 때 마침내 저 멀리서 말을 탄 오스카가 부하들로 보이는 기사들과 함께 사령부로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루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령부 입구는 위병들이 엄격한 표정으로 지키고 있었기에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오스카가 달려오고 있는 쪽으로 이동해 외투를 벗고 흔들어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던 오스카가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루산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그 뒤에 보름스 자작이라고 부르려는 것을 눈치 챈 루산이 서둘러 엎드리며 외쳤다.

“대장님! 제 말씀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

오스카는 루산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름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받아넘겼다.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이따가 들어 볼 테니 여기 기다리고 있으라.”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루산은 오스카의 부하들이 힐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곳에서 기다렸다.

오스카는 한참 후 날이 저문 뒤에야 다시 나왔다.

부하들 없이 혼자 나온 그는 루산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