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주세요
291.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주세요
낮에는 여전히 무덥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쳤다 반복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멀리 난민촌 불빛이 보이는 이름 모를 숲 외곽 바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오스카의 질문에 루산은 사실대로 말할지 아니면 최대한 감출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반란에 가담했다가 죄수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구 귀족파 파일럿들이 있지요?”
“예? 갑자기 그건 왜······?”
“그들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예?”
다른 전장에서 그 부대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렇다 해도 그 일을 왜 변경 파일럿인 보름스 자작이 맡는 거지?
그리고 그 일을 왜 나에게 얘기하는 건가?
오스카는 여전히 루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더 죽기 전에 빼돌릴 생각입니다.”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오스카는 순간 뇌가 마비되어 눈만 껌벅였다.
그러나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루산을 쳐다보았다.
“지금 반란을 저지른 죄인들을 탈출시키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오스카가 알기로 루산은 귀족파가 아니었다.
보름스 가문은 이반 황제의 개혁 정책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사업 기반을 전환한 가문이었고 루산은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 인정받는 생도였다.
오베론 공작에 의해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면 제국과 황제를 지키기 위해 이 대전쟁의 선봉에 서 있을 엘리트 파일럿이었던 것이다.
“아니, 대체 왜······?”
루산은 구 귀족파를 위한 변명 거리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반란을 유도해 놓고 반란죄로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든가.
3년 동안 이 정도 목숨 걸고 싸웠으면 이미 죗값은 충분히 치렀다든가.
귀족들의 재산을 먼저 빼앗으려 한 것은 황제였으니 그에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든가.
그러나 변호사도 아닌데 굳이 그들을 위해 변호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필요하니까요. 어차피 전장에서 죽을 목숨들, 복수하는 데 쓰겠습니다. 그들도 그걸 원할 겁니다.”
“허!”
오스카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루산을 노려보았다.
“황제 폐하께 칼을 겨눈 자들과 손을 잡겠다는 겁니까?”
루산은 여기까지 나온 김에 속마음을 완전히 털어놓기로 했다.
“내 가문을 지켜 주지 않은 황제도 섬겨야 합니까? 내 가족이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황제에게도 충성을 다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물론 황제는 변명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닥칠 대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내부 단속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루산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춘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하는 쪽에서 그 입장을 고려해 줄 필요가 있습니까? 황제는 목적을 이루었고, 내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남은 가족들도 고초를 겪었는데? 왜 피해자가 가해자의 입장까지 생각해 줘야 합니까?”
“······.”
“적어도 내가 충성할 황제는 그러면 안 되었어요.”
“···황제 폐하께 칼을 겨누겠다는 겁니까?”
루산은 잠시 침묵했다.
풀벌레들이 그 공백을 채웠다.
“생각 중입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직접 해를 끼친 건 아니니까요. 오베론 공작만큼의 죄는 아니니까. 내가 충성하지 않는다고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죠.”
오스카가 긴장한 가운데에도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루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내 복수를 방해하고 내 삶을 해친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국이 무너지면 필센의 백성들 모두가 고초를 겪을 겁니다!”
“황제가 곧 국가는 아니죠.”
“······!”
“나를 보호하지 않는 황제는 황제가 아니고 나를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가 따르고 섬길 의무는 없어요.”
“후유-!”
오스카 역시 루산과 같은 일을 겪었기에 그 마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 나라는 지킬 겁니다. 내 가족과 내 재산이 다시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내 친구와 이웃들이 고초를 겪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아니에요.”
“그게 과연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루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계와 생각들이 뒤엉키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처음 변경에 들어갔을 때 트리어는 자신을 죽일 듯이 괴롭혔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황제와 트리어의 차이는?
트리어는, 그의 가혹한 지시를 참고 견디며 변경에 적응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황제는, 그가 아무리 잘 대해 준다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끈기와 인내로 참고 버텨도 돌이킬 수 없으면 단절.
어쨌든 루산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고민하던 오스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오스카가 돕기로 결심했다 해도 구 귀족파 기사들을 몰래 빼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바덴을 본 보름스 자작 부인은 깜짝 놀랐다.
그 사이 얼굴이 너무 꺼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밥도 못 먹고 다니나 싶어 잔소리를 하려던 루산의 어머니는 음식 냄새를 맡고 소리 없이 헛구역질을 참으려고 애쓰는 바덴을 보고 변화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상에! 아이가 생긴 것이 아니냐?”
“네, 어머니. 병원에서 확인해 주었어요.”
“아이고! 언제 이런 일이 생겼을꼬?”
“전에 아라드 왕국으로 출장 갔을 때 며칠 같이 지낸 적이 있어요.”
“그랬구나! 잘했다! 잘했어!”
자작 부인이 크게 기뻐하며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 입덧할 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 준다고 부산을 떨었다.
바덴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어머니에게 노력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나서 에를랑겐 유통 사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를랑겐 가문이 잘되면 좋겠지만, 거기가 보통 덩치가 아닌데 괜찮겠니? 괜히 잘못 엮였다가 함께 끌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이도 있는데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에 얽혀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몸도 잘 챙길게요. 그리고 저, 이런 일 좋아해요. 어려운 일을 할 때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즐겁거든요.”
“아휴, 그것도 편하게 살 팔자는 아니로구나. 어쩔 수 없지.”
보름스 자작 부인은 현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를랑겐 유통 상사를 이끌고 있는 장남 한델을 찾아가 바덴을 소개해 주었다.
안타깝지만 며느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부모 대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인 고슬라 사장님이에요.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에를랑겐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여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자작 부인.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슬라 사장님.”
노바에서 사업 크게 하는 사람치고 바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도가 나기 직전이라 생각지도 않았던 바덴의 방문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바덴이 말했다.
“별말씀을요. 아시다시피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아우로라 연합군을 몰아내고 우리 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습니다. 아직 티는 나지 않아도 곧 소비 심리가 살아날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있으면 다시 살아날 에를랑겐이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덴은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은행입니까? 제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보증이라는 말에 보름스 자작 부인이 안절부절못했다.
가문이 쓰러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남편이 은행 자금을 빌리기 위해 유령 회사들을 여러 개 만들고 보증을 선 것이었다.
사기꾼들이 알려 준 방법대로 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는 대출을 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전 재산이 날아가 버렸다.
“보, 보증을 서도 괘, 괜찮을지······.”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작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안심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바덴은 시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에를랑겐 유통 상사의 사장과 함께 은행들을 돌며 보증을 서고 상환 기한을 연장시켰다.
상업 은행, 공업 은행을 비롯해 무려 여섯 개 은행을 돌았다.
에를랑겐 유통 사장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아무리 애원해도 연장이 안 되던 것을 바덴이 보증을 서는 것만으로 바로 연장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상환해야 할 금액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총액이 90만 골드가 넘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사채 같은 걸 쓸 생각은 마시고 사업을 다시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할 거예요. 소비 심리가 자연스럽게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 시기를 당길 방안을 모색해 봐야겠죠?”
바덴은 신규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이 워낙 많아 에를랑겐 유통의 빚을 모두 탕감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럴 만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급 보증을 서고 대출금 상환 기간을 연장해 준 대가로 바덴이 에를랑겐에 요구한 것은 네 가지였다.
“우리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미술 팀이 솜씨가 좋은 편입니다. 백화점과 거리 상점 내부야 에를랑겐 측의 기준과 노하우가 있을 테니 그에 따르겠지만, 쇼핑 거리 전체의 조경과 미화를 에를랑겐 측 담당자와 함께 새롭게 바꾸었으면 합니다. 홍보에도 저희 쪽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면 하고요.”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에 에를랑겐 유통 사장은 즉시 받아들였다.
“백화점에 반달 그룹 식품관, 용감한 나라 장난감, 그리고 두 종류의 카페. 거리 상가에는 점포 세 개를 입점하고 싶습니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파리를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분을 요구하실 줄 알았는데, 그 말씀은 안 하시는군요.”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에를랑겐이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가 막대한 빚을 떠안게 생겼는데 당장 지분을 받는 건 의미가 없죠.”
지분을 가져가면 에를랑겐 측의 의욕이 떨어질 것도 우려가 되었다.
“다만······.”
“······?”
“에를랑겐의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 쇼핑 거리를 조성할 때에는 우리가 절반을 투자하고 지분의 절반을 갖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망하기 직전인데 확장을 말하고 있었다.
에를랑겐 유통의 사장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자신감, 이 패기,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장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부터 성공해야 했기에 그는 부담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슬라 사장님!”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지역에 카페를 열 때 에를랑겐이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죠.”
에를랑겐 유통의 사장은 마지막까지 시원하게 대답했다.
카페는 그에게 전혀 중요한 품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덴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에를랑겐이라는 이름에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었고 이는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덴은 에를랑겐의 어려움을 풀어 주고 그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공유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마젠스 자작이 에를랑겐 유통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마젠스 자작은 할 수 없이 에를랑겐에 필적할 만한 다른 유통 상사를 물색하고, 누가 에를랑겐에 선수를 쳤는지 알아보았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의 바덴 고슬라 사장이라고? 흐음······.”
그는 사람을 시켜 바덴에 대해 더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