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인사는 나중에
293. 인사는 나중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동방군은 이번 작전의 성공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동방군이 건설하는 다리에 집중하는 사이, 본국에서 가져온 마나 엔진을 사용하여 도우나 강 지류에서 바지선 여덟 척을 비밀리에 만들었다.
굵은 통나무를 엮고 그 위에 철판을 올려 만든 뗏목에 마나 엔진을 장착한 단순한 구조의 바지선은 여섯 대의 멕 나이트를 싣고 강을 건넜다.
자세를 낮춘 멕 나이트들이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오스카가 지휘하는 6군단 3전단 멕 나이트들이 도강하기 위해 다리를 건널 때 좌우에서 엄호하기 위해 멕 나이트를 선박으로 상륙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우로라 연합군 마나 포대에 비상이 걸렸다.
급하게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은 마나포를 멕 워커들이 달라붙어 억지로 방향을 돌려 마나 진동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슈슈슈슈-!
슈슈슈슈슈슈슈슈슈-!
그러나 멕 나이트를 실은 배는 물살에 의해 저절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고 마나 포대의 방향을 트는 것은 쉽지 않아 정확한 조준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나 진동 화살들이 물속에 빠지거나 뱃전에 박히거나 방패 가장자리를 뚫고 말았다.
그럼에도 강변에 가까워지자 명중하는 마나 진동 화살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투투투투투투-!
파파파파파파-!
시간이 흐르면서 바지선과 그 위에 타고 있던 멕 나이트에 마나 진동 화살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히 박혔다.
200대의 마나포가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대형 화살을 쏟아부었기에 바지선 여덟 척은 결국 상륙을 포기하고 느릿느릿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통해 도강하려던 적도 기세가 꺾였는지 뒤로 물러났다.
강변을 수비하던 아우로라 연합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 와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나 진동 기능이 있는 멕 나이트 무기는 거의 1만 골드나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알지 못했다.
바지선에 태워 상륙시킬 것처럼 보인 필센 제국군의 멕 나이트는 사실 전투에 투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손상 멕이라는 것을.
애초에 마나 진동 화살을 소진시킬 목적으로 운용한 바지선이었던 것이다.
“놈들이 쏜 마나 진동 화살이 몇 발이라고?”
“최소 6천 발은 될 것입니다.”
“멕 나이트 400대를 버린 셈이군! 껄껄껄!”
라이네 후작이 시원하게 웃었다.
반면 아우로라 연합 진영에는 비보가 전해졌다.
“놈들이 마나포로 발사한 화살 가운데 마나 진동 기능이 장착된 것은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인가?”
“네, 각하! 마나 진동 화살은 다섯 발 중 한 발꼴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철제 화살이었습니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안 아우로라 연합군 지휘부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늦었다.
“어차피 멕 나이트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배를 단기간에 많이 만들기는 어렵다. 멕 나이트를 선박으로 실어 나르려는 시도는 멕 나이트로 저지하고, 마나 포대는 다리에 집중하라!”
아우로라 연합군 마나포 부대에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필센 제국군은 다시 한번 바지선에 멕 나이트를 싣고 도강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마나포 부대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지선은 접근하려다 말고 돌아갔다.
다리를 통해 건너려는 시도를 하던 부대도 결국 시늉만 하다 말았다.
다음 날에도 바지선이 다가왔는데, 아우로라 연합군이 마나포로 사격하지 않자 잠시 강가를 서성이다 그냥 돌아갔다.
아우로라 연합군 지휘부는 바지선이 마나 진동 화살을 소모시키기 위한 용도라고 확신했다.
도하 시도 나흘 째.
이전 사흘과 마찬가지로 마나포 부대가 쉴 새 없이 대형 화살을 날려 아군의 도강을 엄호하는 가운데 오스카의 부대가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 끝으로 걸어갔다.
날아온 대형 화살이 모두 철제 화살인 것을 확인한 아우로라 연합군은 비웃음을 날렸다.
[또 시작이군. 지겨운 놈들!]
[우리가 속으리라 생각했나?]
그때 바지선도 멕 나이트를 태우고 동쪽 강변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에 실은 멕 나이트가 6대가 아닌 8대였다.
게다가 멕 나이트 종류도 달랐다.
신형 기체 레오파드.
그것도 슈퍼 파워와 슈퍼 스피드.
일반형보다 출력이 훨씬 높은 고급 기체였다.
그러나 일반형인지 고급형인지는 겉보기로 구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무게가 아이언 워리어보다 가볍기에 8대를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군 진영에서는 이전 3일과 달라진 모습에 경계의 시선을 보냈으나 고작 배 한 척당 2대, 총 16대가 늘어난 바지선의 멕 나이트가 만에 하나라도 상륙한다 해도 전황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동안 우리 마나 진동 화살을 소모시키기 위해 배에 실었던 멕 나이트가 손상이 심해 바꾼 것이겠지. 굳이 만나 진동 화살을 헛되이 소모하지 말고 명령대로 다리를 건너오려는 적을 조준하라!”
마나 포대가 침묵하는 가운데 바지선 여덟 대가 강변으로 점점 다가갔다.
그 시각, 모두 레오파드 스피드로 이루어진 특별 전단 4개(400대)가 도우나 강 상류에 대기하고 있다가 산과 골짜기를 넘어 동쪽으로 이동했다.
아우로라 연합 측에서도 그 부대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산악형 멕 나이트 수가 많지 막거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특별 전단은 빠르게 산을 넘어갔다.
[큰일이다! 남쪽에서 적의 산악형 멕 나이트 4개 전단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아군의 배후를 노리는 것 같다!]
이때부터 아우로라 연합군 사령부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예비대 4개 전단은 뒤로 이동해 적의 우회 공격을 차단하라!”
강변 뒤쪽에서 대기하던 멕 나이트 400대가 뒤로 빠졌다.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바지선 여덟 척이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동쪽 강변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마나포, 아끼지 말고 쏟아부어라!
동방군 마나포 부대는 그동안 마나 진동 기능이 없는 화살을 날리며 이날을 위해 아껴 온 진짜 마나 진동 화살을 마구 퍼부었다.
슈슈슈슈슈슈슈슈-!
대형 철제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투투투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투투투-!
쩌저저저저저저정-!
적이 다리로 건너올 강변 기슭에서 도강을 막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아우로라 연합 멕 나이트들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화살 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패를 들어 막아 보아도 방패를 꿰뚫고 몸체에 마구 틀어박혔다.
세 겹으로 엮은 철제 방패도 너무 많은 마나 진동 화살을 맞아 쩍쩍 갈라지더니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그다음에 날아온 마나 진동 화살이 멕 나이트를 꼬치처럼 꿰뚫었다.
[후퇴하라!]
[안 된다! 물러서면 안 된다!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
비명과 고함, 지휘관들 간의 혼선이 발생했다.
결국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엄청나게 쏟아지는 마나 진동 화살에 의해 중앙 다리 강변을 지키던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 부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다! 다리를 건너라!]
오스카가 명령을 내리자 다리를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6군단 3전단 멕 나이트들이 들고 있던 바위를 하나씩 물속에 떨어뜨리고는 다리 끝에서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수심은 약 3미터.
이 다리를 지나는 멕 나이트들이 바위를 하나씩 물속에 던지면 수심이 점점 얕아지며 돌다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물속에서 멕 나이트는 움직임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물의 저항에 거체가 느릿느릿 힘겹게 이동했다.
발밑 진흙에 푹푹 빠지면 움직임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이때 적이 강가에 서서 공격을 가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시간에 막대한 양의 마나 진동 화살을 한 지점에 퍼부어 적을 뒤로 물려 상륙할 시간을 벌었다.
6군단 3전단 멕 나이트들이 다리 끝에서 바위를 던지며 물속으로 계속해서 뛰어들고, 이어서 죄수 부대 멕 나이트들이 따라왔다.
이번에는 작은 바위들을 잔뜩 담은 철망을 하나씩 들고 와 물속에 던지고 몸을 던졌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다들 사력을 다해 싸워라! 함성 질러!]
- 와아아아아아!
- 와아아아아아!
루산과 레보르크를 만나 구출 작전에 대해 들은 귀족파 기사들은 그동안 쌓인 울분과 원한을 외부 확성기를 통해 쏟아냈다.
강기슭에 올라선 죄수 부대 멕 나이트들은 적과 대치를 시작한 6전단 멕 나이트 뒤를 방패로 받치며 힘차게 밀었다.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들은 강변을 틀어막아 도하를 완전히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을 강물로 밀어 넣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맞붙어 있으니 적의 마나포는 무용지물이다! 놈들을 강물에 처박아라! 밀어!]
- 으야아아아아아!
- 하야아아아아압!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가 강변에 상륙한 6전단과 죄수 부대 멕 나이트를 반원형으로 감싼 채 밀어붙였다.
상륙하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버텨라!]
수백 대의 멕 나이트들이 다리를 건넌 지점에서 힘겨루기를 했다.
그런데 6전단과 거의 동시에 강변에 상륙한 병력이 있었다.
전속력으로 모래톱에 올라선 레오파드 고출력 기체 64대였다.
이 병력은 오스카가 - 사실 루산이 오스카를 통해 - 라이네 후작에게 요청한 것으로 동방군 내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파일럿들을 선발하여 편성한 도강 지원 부대였다.
동방군 최강의 실력자들에게 최강의 기체를 붙여 주었던 것이다.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우로라 연합군의 멕 나이트들이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왔다.
- 감히 어딜!
그러나 바지선을 박차고 모래톱을 달리는 기체들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그중 방패 없이 양손으로 대검을 쥔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 한 대가 가장 빨랐다.
바로 루산이 타고 있는 기체였다.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
루산이 가장 많이 타고 가장 익숙한 003과 동일한 기종.
맨 앞에서 방패로 몸을 가리고 몸통 돌격을 감행하는 헤비 스틸을 루산은 왼쪽으로 슬쩍 피하며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대검으로 방패 뒤에 살짝 튀어나온 헤비 스틸의 오른팔을 슥 긋고 지나갔다.
쓰릉!
금속 절단음이 경쾌하게 발생하고 대검을 든 헤비 스틸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이미 지나간 기체는 관심이 없다는 듯 루산은 그대로 다음 기체를 상대하기 위해 달렸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적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몸에 가까이 붙이고 있는 대검으로 적 기체의 일부를 힘주어 쓱 베고 지나가는 루산의 공격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루산이 지나가는 곳마다 멕 나이트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손목이 잘리고 옆구리가 베이고 다리가 절단됐다.
[대단하군! 어느 부대의 누구인가?]
옆에서 다른 적을 상대하던 레오파드 슈퍼 파워 파일럿이 통신을 보내왔다.
[선봉대가 어려우니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흠! 그러지!]
루산과 상륙 지원군 파일럿들은 반원으로 포위된 선봉대 좌우에서 적을 쓸어버리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들은 적의 멕 나이트 부대가 진형을 갖추고 포위하기 전에 움직였기에 앞도적인 기체 성능과 뛰어난 파일럿의 기량으로 자신들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는 적 기체를 각개 격파하며 중앙 다리에서 저지하고 있는 적 멕 나이트 배후를 공격했다.
다리를 건너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반원으로 포위한 채 힘차게 밀어붙이던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들은 후방에서 공격을 받으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러다 결국 6전단과 죄수 부대의 응집된 전진에 밀리고 말았다.
모래와 자갈을 긁으며 뒤로 질질 밀리던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들은 후미 대열의 기체들이 바위가 박힌 작은 둔덕에 걸려 뒤로 넘어지자 연달아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동방군 선봉대와 상륙 지원 부대 멕 나이트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쓰러진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를 대검으로 내리 찍었다.
멕 나이트 전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방적인 파괴의 시간이었다.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라후네 후작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도강하라!”
동방군 멕 나이트들이 중앙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쉼 없이 이어져 백 대, 이백 대를 넘어 계속 이동했다.
“후퇴하라! 라브나에서 방어한다!”
아우로라 연합군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아우로라 연합군은 강변을 지키지 못하고 바르나 왕국의 수도 라브나 시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처 옮기지 못한 마나포 200여 대,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멕 나이트 400여 대가 동방군 수중에 떨어졌다.
동방군은 중앙 다리뿐 아니라 막아서는 적이 사라진 남쪽 다리, 북쪽 다리까지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라이네 후작이 오스카를 치하했다.
“장하다! 그대의 공이 크구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각오했는데, 생각보다 피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많은 적을 해치웠기에 무척 기뻤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들뜬 표정 없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아직 남은 적이 많습니다!”
“그래, 맞다! 아직 적이 많이 남았지. 포상은 라브나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하겠다!”
“네, 사령관님!”
3천 대 이상의 멕 나이트가 다리를 건너 도우나 강 동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제대로 건설한 다리가 아니라서 많은 무게를 지탱할 수 없기에 멕 나이트 간 간격을 벌려야 했다.
그럼에도 워낙 많은 멕 나이트가 건넜기 때문에 임시로 만든 다리가 기울어졌다.
페르보 제국을 완전히 점령을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이동할 것이기에 라이네 후작은 공병대에 명령을 내렸다.
“세 개의 임시 다리를 제대로 보수하고 그 옆에 튼튼한 다리를 놓도록!”
“알겠습니다!”
공병대가 다리 공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양쪽 강변까지 완전히 연결된 다리를 통해 6개 마나포 전단이 강을 건넜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운용하던 마나포 200여 대를 합쳐 8개 마나포 전단이 라브나 시 외곽에 전개했다.
4천 대에 육박하는 멕 나이트와 800여 대의 마나포에 둘러싸인 라브나 시 백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편 도우나 강 도하 작전에서 구 귀족파 기사들의 희생을 막아 일단 안도하던 루산은 라브나에서 그들을 어떻게든 빼돌리기 위해 대형 거미를 통해 라브나에 잠입해 있는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