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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294화 (294/450)

294. 잔해를 뒤져라

294. 잔해를 뒤져라

“나는 여러분을 구출하려 최선을 다하겠지만, 모두 구출하지는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반란에 가담했다 붙잡힌 구 귀족파 기사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루산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무단이탈은 안 됩니다. 전사한 것처럼 보여야 하죠.”

그래야 남은 가족들이 반역자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벗고 경찰의 감시를 벗어나 자유로이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라브나 시가지로 가장 먼저 투입될 겁니다. 적 멕 나이트와 교전이 벌어지면 적을 쓰러뜨리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야 구출을 하든 말든 할 테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에도 구 귀족파 기사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출 작전이 진행되는 현재의 상황 자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집중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듣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의 후속 부대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파일럿이 내리고 시체를 조종실에 태웁니다. 그다음에 조종실을 뭉개 버리는 거죠. 시체를 알아볼 수 없게.”

“시체? 갑자기 시체를 어디서 구한다는 거요?”

와이젠 자작이 물었다.

과거 필센 제국 밀가루 점유율 10퍼센트가량을 차지하던 대규모 제분 공장 - 반란 사건 이후 그의 아내가 바덴에게 인수해 달라고 부탁해 현재 반달 제분의 모태가 된 공장 - 을 운영할 때 보이던 넉넉하고 교양 있는 사업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3년 이상 최전선에서 생사를 넘는 전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그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을 것처럼 눈빛이 매서웠다.

“라브나 시에 잠입해 있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시체를 준비해 놓을 겁니다.”

“음!”

“어쨌든 시체를 넣고 조종실을 철저히 부숴야 합니다. 탈출한 파일럿은 동지들과 함께 당분간 라브나에 머물러야 하죠. 섣불리 탈출하려다 잡히면 다 망치는 것이니까요. 그러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고 상황이 정리되면 부르사 왕국으로 탈출할 겁니다.”

“부르사 왕국?”

“설명하자면 길지만, 그곳에서도 벌이고 있는 작전이 있습니다. 부르사 왕국에 도착한 뒤에는 필요하면 잠시 용병으로 활동할 수도 있고 그냥 대기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부르사 왕국으로 갔다가 배를 타고 아라드 왕국 변경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변경?”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필센 제국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가족들에게 알려서도 안 되죠.”

“흐음······.”

“라브나에 잠입해 있는 동지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동지들이 대기하고 있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벌여야 여러분을 무사히 데리고 숨을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전투가 시작되면 다시 말씀드리죠.”

구 귀족파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죄수 부대 파일럿이 전원 사망하고, 죄수 부대 파일럿이 탑승한 멕 나이트의 조종실이 모두 심하게 훼손되어 시체를 알아보기 어렵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파일럿을 시체로 바꿔치기하는 작전도 쉬운 일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처음에 여러분 모두를 구출할 수는 없다고 한 겁니다. 마침 상황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에 한하여 작전이 진행될 겁니다.”

“이해했소.”

와이젠 자작이 짧게 말했다.

다른 죄수 부대 파일럿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구출되지 못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면 사면이 되는 것이니까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전의 대전쟁에서도 반란에 가담했다 최전선으로 내몰린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사면되고 자유를 찾았다.

물론 전사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여러분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살아남으세요.”

루산의 말이 끝나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와이젠 자작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구출하려는 이유가 뭐요? 다시 힘을 합쳐 황제에게 복수하자는 거요?”

이곳에 있는 반란 파일럿들은 누구보다 황제를 미워하지만, 한편으로 누구보다 황제의 힘을 잘 알게 되었다.

바르나 왕국에 투입된 기동 전단의 수는 무려 34개.

죄수 부대를 제외한 숫자였다.

마나포 부대의 수는 6개. 전리품으로 획득한 적의 마나포를 합치면 8개.

공병 부대는 6개.

보급품과 전쟁 물자를 운반하고 기동 부대를 경비하고 점령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수십만 명이었다.

북방군, 남방군, 네세베르 공략군, 노바를 지키고 있는 수도 군단과 근위대, 새로 편성되고 있는 부대까지 합치면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황제의 힘!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동지들과 의지를 불태우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른다.

야심 가득한 오베론 공작이 왜 황제 편에 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거사를 일으킨다?

물론 함께할 수는 있다.

죽더라도 황제에게 한 칼 먹이고 죽는다면 가슴에 맺힌 원한이 조금을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시무시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황제의 힘을 알면서도 들이받는 것은 왠지 힘 빠지는 일이었다.

와이젠 자작의 질문에 루산은 와이젠 자작을 시작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구 귀족파 기사들을 쓱 훑어보았다.

63년 전 이반 황제가 개혁 헌법을 수립한 뒤로 황제에게 반기를 든 할아버지, 아버지, 형, 숙부, 사촌들의 복수를 위해 나선 귀족들.

그 원한을 기억해 복수하고자 나선 사람들이기에 40대 이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

말에 현혹될 나이도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지를 두기 위해서죠.”

“여지를 둔다?”

“복수를 하기 위해 힘을 최대한 끌어모을 겁니다. 노력은 해 봐야죠.”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말은 아닌 듯한데?”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 대해서라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큰 원한은 없어요. 보호하지 않았으니 충성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오베론 공작은 다릅니다. 반드시 부술 겁니다!”

구 귀족파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쨌든 교집합은 존재하니까.

그리고 굳이 바다 건너 머나먼 이 전쟁터까지 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해 준다는 사람에게 더 따지고 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와이젠 자작이 말했다.

“내가 구출되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함구할 것이오. 그리고 만약 내가 구출된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소!”

다른 구 귀족파 기사들도 엄숙하게 맹세했다.

“죽을 때까지 함구할 것이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3년 동안 죽음의 전장을 헤치고 살아남은 기사들의 맹세는 루산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여러분은 살아남을 겁니다!”

바르나 왕국의 수도 라브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

필센 제국 동방군과 페르보 제국군이 주축이 된 아우로라 연합군.

양측 도합 6천 대가 넘는 멕 나이트가 바르나 왕국의 수도 라브나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바르나 왕국의 국왕과 신료들은 차라리 항복하고 싶었다.

왕국의 수도가 수천 대의 멕 나이트들의 격돌로 쑥대밭이 되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복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 전선을 뒤로 물리자고 요구했다.

수도가 짓밟히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 라브나 뒤쪽에는 마땅한 방어선이 없어요. 여기서 막아 내야 합니다!”

페르보 제국군 사령관은 라브나 시의 성벽과 건물들로 어떻게든 적의 진군을 막으며 원군을 기다리고자 했다.

적군이 페르보 제국으로 들어가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라브나 공방전이 벌어졌다.

슈슈슈슈슈슈-!

슈슈슈슈슈슈-!

슈슈슈슈슈슈-!

800대의 마나포가 무지막지한 화살 비를 퍼부었다.

바르나 왕국의 1년 예산이 하루 만에 허공에 뿌려졌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성벽, 성탑, 병영, 민가, 상점이 모조리 부서지고, 성문 가까이 대기하고 있던 멕 나이트들이 바늘에 꽂힌 곤충처럼 마나 진동 화살에 꽂힌 채 쓰러졌다.

라이네 후작이 높은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끝내 버려! 순차적으로 투입해!”

명령을 들은 호위 기체 파일럿이 통신으로 사령관의 명령을 전했다.

[멕 나이트 부대, 순차적으로 진입하라!]

3천여 대의 멕 나이트가 동시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병력을 낭비하는 일인 것이다.

도하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운 오스카의 전단이 이번에도 죄수 부대를 이끌고 선두에 섰다.

이미 가루가 돼 버린 성벽을 밀고 넘어 적의 멕 나이트들이 대형 화살에 꿰뚫려 쓰러져 있는 현장을 통과했다.

아우로라 연합군은 주택 밀집 지역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단층집은 멕 나이트 무릎에서 허벅지 높이, 이층집은 멕 나이트 허리에서 가슴 높이, 삼층집부터는 멕 나이트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멕 나이트로 밟거나 밀고 가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건물들은 확실히 시야를 제한하고 이동을 방해했다.

그래서 멕 나이트 부대는 일단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 건너편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는 적 멕 나이트 부대를 만났다.

교차로에서 만난 멕 나이트들이 마침내 맞붙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이동하는 멕 나이트 부대는 건물을 바리케이드 삼아 방어하는 적 멕 나이트 부대에 효과적인 공격을 가하기 어려웠다.

[건물을 무너뜨리면서 밀어붙여!]

지휘관의 명령에 오스카의 부하들이 공격 면적을 넓히기 위해 도로 양옆의 건물들을 짓밟으며 나아갔다.

맨 앞에서 충돌한 멕 나이트가 건물에 걸려 뒤로 벌렁 쓰러지자 건물이 와르르 주저앉았다.

건물 위로 쓰러진 적 멕 나이트에 대검을 내려치던 동방군 멕 나이트를 옆에서 달려온 적 멕 나이트가 힘차게 밀쳤다.

동방군 멕 나이트는 도로 옆 주택들을 연쇄적으로 쓰러뜨리며 넘어졌다.

멕 나이트 시가전은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집 안에 숨어 있던 백성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교전은 치열했지만, 확 트인 벌판이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맞붙는 멕 나이트의 수가 많지 않아 전선의 변화가 극히 미미했다.

강철 거인들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치열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살짝 뒤에 빠져 있던 루산이 미리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가지를 훑어보다 지시했다.

[저 앞쪽, 3층 건물 밀집 지역 가운데 광장이 있다. 거기까지 적을 몰아 붙여!]

죄수 부대 멕 나이트들이 일제히 힘을 쏟아 도로를 막고 있는 적을 3층 건물이 밀집해 있는 구획의 가운데까지 밀어붙인 뒤 골목길을 모두 장악해 20여 대의 적 멕 나이트를 완전히 포위했다.

적 멕 나이트들은 죄수 부대와 대치하다 포위를 뚫을 수가 없자 건물을 부수고 퇴로를 확보하려 했지만, 건물을 부순 다음에도 건물이 계속 나와 뜻대로 달아날 수가 없었다.

루산과 레보르크, 미리 지정한 죄수 부대 실력자들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 안팎에서 적 멕 나이트에 맹공을 가했다.

그들은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20여 대의 적 멕 나이트를 전부 쓰러뜨렸다.

이곳은 모두 죄수 부대의 멕 나이트가 둘러싸고 있었고 다른 부대는 아직 진입하지 않았다.

[여기서 20명 탈출하세요!]

시간이 갈수록 탈출이 쉽지 않을 것을 고려해 초반에 많이 탈출시키기로 한 것이다.

쓰러진 적 멕 나이트가 20대면 이쪽 역시 20대. 크게 문제 되지는 않으리라!

미리 정해진 순번대로 죄수 부대 멕 나이트 20대가 쓰러진 아우로라 연합 멕 나이트 주위에 섰다.

그때 폐허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라브나에 잠입해 있던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과 루산이 포로로 잡았던 투릭 오제로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이 시체를 준비할 때는 시가전이 일어나기 전이라 시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한 번에 얼마나 많은 파일럿을 빼돌릴지 알지 못해 많은 시체를 마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면 후속 부대가 들어올 것이라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때 루산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져!]

[······!]

[······!]

죄수 부대 파일럿들은 놀랐으나 이내 무너진 건물을 뒤져 시체를 찾았다.

죄수 부대 파일럿 20명이 조종실에서 나오고 그 자리에 시체들을 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적의 멕 나이트에 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마나 진동 대검으로 조종실을 마구 찌르고 밟았다.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했다.

반란군 파일럿 20명은 미리 잠입해 있던 동지들을 따라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과연 이 가혹한 시가전에서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3년 5개월을 전장에서 혹사당한 그들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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