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이곳에 뼈를 묻는다
298. 이곳에 뼈를 묻는다
돌진형 멕 나이트 골드 라이노 100대가 동방군 정면을 들이받아 진형을 휘젓고 있었다.
그 사이 마나 진동 화살 세례를 뚫고 온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 주력 부대가 골드 라이노를 상대하고 있는 동방군 전열 방패 부대를 덮쳤다.
동방군은 좌우익 부대로 아우로라 연합군 주력 부대의 옆구리를 공격함으로써 U자 포위망을 완성시키려 했고, 굴다크 공작은 그 의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아 있는 예비대와 자신의 친위대를 모두 동원하여 동방군 좌우익 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 자신 역시 친위대와 함께 전장으로 힘차게 달렸다.
동방군 사령부는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높은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거리가 멀거나 지형에 가려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은 특별 전단과 전선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 멕 나이트 파일럿들의 통신 내용으로 보정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굴다크 공작이 병력을 이끌고 직접 나섰습니다! 블랙 드래곤 세 대가 모두 우익에 투입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예비대와 특별 전단을 우익 쪽으로 모두 투입해 굴다크 공작을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참모의 의견에 라이네 후작은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해서 굴다크 공작을 잡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특별 전단은 근접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고, 예비대는 많이 남겨 두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굴다크 공작군이 블랙 드래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굴다크 공작을 지켜낸다면 동방군은 U자 포위망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하고 날개가 꺾이거나 U자 바닥이 돌파 당하게 된다.
라이네 후작은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좌우익 부대는 일단 그대로 둔다. 그 대신 적이 우리 좌우익 날개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도록 특별 전단으로 하여금 견제하도록 하라. 달려들지 말고 견제만 하는 것이다.”
“적은 이미 예비대를 모두 투입했습니다. 우리도 예비대를 투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비대는 골드 라이노를 잡는 데 투입한다!”
U자 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방패 부대가 흐트러져 포위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의 돌진형 멕 나이트를 해치우면 무려 1,000대의 멕 나이트가 U자 바닥을 튼튼히 받쳐 적을 감싸게 되는 것이다.
포위망을 완성한 뒤 섬멸한다는 작전을 고수하겠다는 뜻.
그러나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빠르게 적의 돌진형 멕 나이트들을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도우나 강 도하 작전에서 재미를 본 적이 있는 레오파드 슈퍼 파워와 슈퍼 스피드가 적의 골드 라이노를 무찌르는 데 투입되었다.
그리고 오스카가 이끄는 6군단 3전단과 죄수 부대 역시 거대한 금색 코뿔소 사냥에 동원되었다.
***
루산은 전에 아라드 왕국에서 골드 라이노를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육중하고 빠른 기체를 쓰러뜨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당시에도 결국 골드 라이노를 그냥 보내 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때는 골드 라이노와 일대일로 맞붙은 상황인 데 반해 지금은 골드 라이노가 동방군 대 병력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시간.
이미 적의 주력 부대가 동방군 전열과 뒤섞인 상황이라 골드 라이노 역시 적의 멕 나이트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에 빠르게 해치우지 못하면 아예 전열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산이 오스카에게 말했다.
[전단장님은 적과 우리 방패 부대 사이를 갈라놓아 방패 부대가 진형을 수습할 시간을 벌어 주세요. 그 사이 나는 죄수 부대 일부와 함께 적의 돌진 기체를 잡을 테니까요.]
오스카는 루산의 의도를 이해했다.
골드 라이노를 해치우라는 명령은 결국 방패 부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한 것.
루산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6군단 3전단과 죄수 부대 멕 나이트가 오른쪽 끝에서부터 쐐기처럼 양군 사이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미 혼전을 벌이고 있던 양군을 갈라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승리를 위해 강하게 밀어붙였다.
자연스럽게 골드 라이노는 적진에 고립되는 형국이 되었다.
여전히 넘쳐나는 힘으로 좌충우돌하고 있었지만, 동방군 멕 나이트들이 악착같이 에워싸고 있어 사실상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골드 라이노를 포위하느라 진형이 무너져 있을 때 적의 주력 부대가 덮치는 것이 두려웠지 아군이 적을 차단하기 위해 추가 투입된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골드 라이노라 해도 멕 나이트 수십 대 안에 갇혀 있는 사냥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위된 쪽이나 포위하려는 쪽이나 워낙 밀착해 있었고, 골드 라이노의 몸체가 워낙 두꺼워 쉽게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루산과 죄수 부대 멕 나이트들이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다.
루산이 죄수 부대 파일럿들에게 말했다.
[딛고 올라갈 테니 멕 나이트로 받치세요!]
[우리를 딛고 넘어가겠다는 소리요?]
[맞습니다!]
무거운 멕 나이트로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그동안 루산의 실력을 확인했고 그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라 죄수 부대 파일럿들은 몸을 숙여 계단을 만들었다.
루산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는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
그가 가장 많이 탄 003과 동일한 모델이었다.
강력한 출력, 가벼운 중량의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가 죄수 부대 멕 나이트들이 만든 계단을 박차고 뛰어 올라 방패 부대 멕 나이트들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방패 부대 멕 나이트들에 둘러싸인 골드 라이노가 보였다.
루산은 역수로 잡은 대검을 골드 라이노의 두꺼운 뒷덜미에 레오파드의 중량을 완전히 실어 찔러 넣었다.
끼웅-!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제법 길게 들리며 마나 진동 대검이 깊이 박혔다.
워낙 깊이 박힌 데다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가 골드 라이노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기에 검신이 부러질 것 같았다.
루산은 재빨리 대검 손잡이를 놓았고,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는 동방군 방패 부대 멕 나이트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와!
- 해치웠다!
감격한 동방군 파일럿들!
그러나 루산은 그들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 서둘러 전열을 정비하라!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일어선 루산은 다음 골드 라이노를 향해 이동했다.
달려가는 도중에 죄수 부대 멕 나이트로부터 대검을 넘겨받았다.
뒤에서 골드 라이노가 목 뒤에 대검 손잡이가 삐져나온 채로 쿵 하고 쓰러졌다.
해당 멕의 파일럿이 어떤 모습인지 굳이 상상할 필요는 없었다.
루산은 오스카의 부대와 보조를 맞춰 이동하며 골드 라이노를 한 대씩 해치워 나갔다.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이네 후작이 말했다.
“확실히 빈켈이 잘하는군!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빈켈의 부대가 지나가는 곳은 자연스럽게 진형이 정비되는군요!”
“맞아! 그나저나 저 녀석은 누구지? 저렇게 멕 나이트를 쓰는 놈은 처음 보는데?”
사령관이 말하는 사람이 아군 멕 나이트를 계단처럼 딛고 힘차게 도약하여 골드 라이노의 목덜미에 대검을 꽂아 넣는 기체의 파일럿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포위된 골드 라이노를 가장 눈에 띄는 독특한 방식으로, 가장 수월하게 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볼까요?”
“됐어. 이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빈켈을 불러 물어보면 되지.”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루산과 오스카가 동방군 전열을 수습하며 골드 라이노를 착실히 해치우는 사이, 전투에 투입된 레오파드 슈퍼 기체들 역시 골드 라이노를 차근차근 쓰러뜨리고 있었다.
동방군 전열을 담당했던 방패 부대가 진형을 가다듬고 적의 주력 부대와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이네 후작은 내심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고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포위망 바닥을 형성하는 전열 부대가 수습돼 가고 있는 것과 달리 날개를 이루는 우익 부대는 굴다크 공작군을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이곳에 뼈를 묻는다! 나를 따르라!]
블랙 드래곤에 탑승한 굴다크 공작이 선두에서 동방군 아이언 워리어를 베며 나아가자 굴다크 공작군 파일럿들이 용기백배하여 험악한 기세를 뿜어내며 돌진했다.
동방군 U자 포위망의 오른쪽 끄트머리가 점점 뭉개져 가고 있었다.
***
블란트는 생각했다.
‘굴다크 공작을 잡는 자가 가장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 굴다크 공작이 저 앞에 있었다.
앞으로 많은 전장을 누비더라도 적의 사령관을 눈앞에서 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직접 멕 나이트를 타고 전투를 치르는 사령관을.
최고의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경량 멕 로쿠스타를 지휘하고 있었고, 굴다크 공작군은 아우로라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블랙 드래곤 세 대와 사나운 기세를 발산하는 멕 나이트 300여 대로 아군을 짓밟고 있었다.
로쿠스타 전단을 이끌고 마나 진동 투창을 던지며 견제하고는 있지만, 적은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고 우익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적의 본대를 뚫고 다가오는 부대가 있었다.
오스카 빈켈이 지휘하는 6군단 3전단이 죄수 부대를 앞세워 우익을 돕기 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파드 슈퍼 기체들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단독 행동이 아니라 포위망을 유지하기 위한 라이네 후작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부하들에게 간간이 마나 진동 투창을 던지게 하고 기회를 엿보던 블란트는 아군 부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적진을 돌파해 전진하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 적의 주력 부대를 쩍쩍 가르며 전진하는데, 아군 우익을 공격하는 굴다크 공작군의 기세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기세의 중심에는 선두에 선 레오파드 스피드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일반형 멕 나이트들에 비하면 왜소해 보이는 그 기체는 방패 없이 대검만 들고 있었는데, 그 기체가 지나가는 곳은 거짓말처럼 적의 멕 나이트가 쓰러졌다.
그리 힘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사기 약장수들의 행각을 보는 것 같았다.
블란트는 소름이 돋았다.
‘레오파드 스피드로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도 레오파드 스피드와 외관이 똑같아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기에 블란트는 레오파드 스피드라고 생각한 것이다.
설사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라고 해도 저렇게 수월하게 적진을 가르며 이동하지는 못하리라!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블란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단독으로 굴다크 공작군을 공격해 가장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두의 이목을 끄는 저 부대가 굴다크 공작군을 붙들고 괴롭혀 준다면 어떻게든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한편, 굴다크 공작도 아군 주력 부대를 가르며 다가오는 적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길을 열면서 다가오는 적의 기체는 다름 아닌 필센 제국 북부에서 자신이 아끼던 기사 시르나크를 죽이고 결국 자신을 패퇴하게 만든 레오파드가 아닌가!
필센 제국에는 수많은 파일럿이 있기에 똑같은 파일럿이 타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 정도의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는 레오파드 파일럿이 여러 명일 수는 없었다.
“주군을 지켜라! 특급 에이스다!”
통신기로 다급히 전해지던 시르나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군!]
블랙 드래곤 파일럿인 다후크 역시 똑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적을 쳐부수다 말고 굴다크 공작 곁으로 다가왔다.
[호들갑 떨 것 없다! 해치우면 그뿐이야.]
굴다크 공작이 분노를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군은 굳이 저 부대를 저지하려 하지 말고 나의 친위대까지 다가오도록 자연스럽게 길을 터라. 그런 뒤 포위하여 섬멸하면 된다.]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이라고 다후크는 생각했다.
약간의 불안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굴다크 공작군이 적의 우군을 무너뜨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적의 멕 나이트 부대 하나가 접근한다고 하여 물러날 수는 없는 것이다.
주군은 내가 지킨다!
[알겠습니다!]
다후크가 결연하게 대답하고 굴다크 공작의 명령을 전군에 전파했다.
마침내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들이 슬슬 피해 길을 터 주었고, 오스카 빈켈의 부대가 굴다크 공작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여전히 모든 전선에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 지역만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