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함께 간다
300. 함께 간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후크였다.
고작 60여 대의 멕 나이트로 300대가 넘는 굴다크 공작의 친위대를 뚫고 들어오다니!
그것도 거의 피해 없이!
적의 기체는 이제는 익숙한 레오파드 파워와 레오파드 스피드.
대전쟁 발발 초기에는 필센 제국군이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눈에 띄다가 어느 순간에 북부 전선의 판세를 뒤집어 버린 신형 멕 나이트였다.
북부 전선뿐 아니라 남부 전선도 저 레오파드로 인해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듯 아우로라 연합에도 잘 알려진 기체인데, 저 정도 성능은 아니었다.
‘파일럿들이 모두 숙련된 기사이고 집단전 훈련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기체 성능이 다르다!’
간간이 반격할 때 레오파드가 휘두르는 대검이 아군 헤비 스틸 몸체에 박히는 깊이가 필센 제국 북부에서 만난 레오파드들과 달랐다.
‘평범한 레오파드가 아니야!’
타르누크가 탑승한 블랙 드래곤과 싸우고 있는 적 레오파드 파워를 보고 확신했다.
레오파드는, 중량 차이로 조금씩 밀리는 것 말고는, 완전히 백중세로 블랙 드래곤과 싸우고 있었다.
타르누크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섬세하게 흘리고는 강하고 날카롭게 반격했던 것이다.
타르누크와 싸우고 있는 기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레오파드들도 헤비 스틸과 대등하게 혹은 헤비 스틸을 압도하며 싸우고 있었다.
‘아이언 워리어 이상의 성능이다! 파일럿들 수준도 보통이 넘어!’
다후크는 확신했다.
‘겉모습은 기존의 레오파드와 동일하지만, 전에 상대했던 레오파드보다 훨씬 뛰어난 레오파드다!’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양쪽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비록 골드 라이노는 전멸했지만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고, 적의 U자 포위 작전에 아우로라 연합군은 포위망 바닥을 뚫고 양쪽 날개를 뭉개는 작전으로 맞섰는데 우익 날개를 확실히 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굴다크 공작군이 패하거나 공작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적의 포위망을 부수지 못하고 주력 부대가 대패하는 상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주군! 저 기체들, 평범한 레오파드가 아닙니다. 성능이 향상된 레오파드가 틀림없습니다!]
[알아.]
굴다크 공작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안다고.]
[아!]
굴다크 공작 역시 블랙 드래곤의 파일럿.
단지 공작이라서 이 기체를 타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적 기체의 성능과 파일럿의 실력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적 사령관이 미치지 않고서야 고작 60대로 돌격을 시키지는 않았겠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야. 똑같은 외형에 성능은 더 뛰어난 기체라는 거 말이야. 하지만, 적도 그렇게 여유가 있는 건 아니야. 이 상황에서 저런 기체가 더 있었다면 굳이 60대만 투입했겠어? 100대가 있었으면 100대를, 200대가 있었으면 200대를 투입했겠지. 나만 잡으면 싸움이 끝나는데 왜 아끼겠어? 저 숫자가 전부인 거야.]
성능이 더 우수한 레오파드는 저 60여 대가 전부다!
[저것만 잡으면 적도 예비대가 없는 거지. 우리는 적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그 뒤에 중앙의 주력 부대와 함께 적의 본대를 밀어 버린다.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다!]
굴다크 공작은 60여 대의 고성능 레오파드를 보고 위기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판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후크는 불안감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주군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마구 샘솟았다.
[다후크, 그대에게 이 싸움을 끝낼 기회를 주겠다. 저 분리된 부대를 쳐부숴라!]
다후크는 자신마저 떠나면 주군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말을 꾹 삼켰다.
침착한 주군의 모습을 보니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주군 역시 블랙 드래곤 파일럿이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 레오파드 부대를 자신이 무찌르면 주군 앞에까지 다가올 수가 없는 것이다.
[주군의 명을 받들어 적을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가라, 다후크 경!]
[네!]
블랙 드래곤 파일럿 다후크가 부하들을 이끌고 루산이 포함된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멕 나이트 전투에서는 질보다 양이라는 게 상식이었다.
제아무리 성능이 좋은 기체라도 많은 숫자에 둘러싸이면 당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전장에서 숱하게 증명되었다.
적의 두 배 규모인 2개 전대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침착함을 되찾자 다후크는 어렵지 않게 대응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동방군의 에이스 파일럿인 기터 남작이 이끄는 부대와 분리된 레오파드 슈퍼 부대는 또 다른 에이스 파일럿 로이트의 지휘를 받으며 새로운 삼각형을 만들어 돌진을 계속했다.
아직 돌파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달려드는 헤비 스틸들의 압력에 의해 전진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른 블랙 드래곤 한 대가 멕 나이트 60여 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다후크가 이끄는 친위대였다.
다후크는 자신의 용맹과 무위를 뽐내고자 하는 뜨거운 유형의 기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승리에 기여할지 냉정하게 생각하는 기사였다.
‘난전 상황이 되면 성능이 더 뛰어난 기체가 유리하다. 수가 더 많다는 유리함을 이용하지 못하는 거지.’
다후크가 명령했다.
[동료 기체와 더 가까이 붙어서 방패를 촘촘하게 붙여 적 부대와 완전히 밀착하라!]
개인의 기량과 기체의 성능이 발휘될 여지를 아예 주지 않기 위해 밀착해 감싸도록 한 것이다.
다후크가 이끄는 부대가 로이트가 이끄는 레오파드 슈퍼 부대의 삼각 진형(▲)을 고깔 진형(∧)으로 뒤집어씌웠다.
로이트는 다후크 부대의 저지선을 벗어나기 위해 돌파를 명령했지만, 다후크는 방패를 맞대어 밀면서 팔을 움직일 틈을 주지 않아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출력이 두 배라 해도 중량과 수에서 밀리는 레오파드 파워 부대는 다후크 부대의 저지선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기터 남작 쪽은 블랙 드래곤이 이끄는 멕 나이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로이트 쪽은 그만한 전쟁 소음이 전혀 없이 서로 방패를 맞대고 밀고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루산은 기터 남작 쪽보다 이쪽의 상황이 더 좋지 않다는 것을 얼른 깨달았다.
루산은 로이트에게 통신을 보냈다.
[차라리 난전을 벌이는 게 낫겠습니다.]
[이미 늦었소!]
루산의 말뜻을 이해한 로이트가 무겁게 대답했다.
육중한 헤비 스틸들이 동료와 어깨를 맞대고 방패를 붙여 밀고 있었다.
난전을 벌일 틈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
루산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골드 라이노를 해치우고, 굴다크 공작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의 주력 부대를 돌파했다.
이미 많은 힘을 쏟아부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서 막히면 그동안 쏟은 힘은 헛것이 된다.
그는 다시 통신을 보냈다.
[내가 뒤로 돌아 굴다크 공작을 향해 달려갈 테니 차례로 삼각 진형 뒤로 빠져 공작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내가 블랙 드래곤 킹을 베겠습니다!]
[너무 무모······!]
그러나 루산은 로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삼각 진형 뒤로 나와서 왼쪽으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다후크가 이끄는 저지 부대 뒤에 있던 굴다크 공작군 파일럿들이 진형을 이탈해 질주하는 멕 나이트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죽여라!]
[잡아!]
[감히 어딜!]
근처에 있던 헤비 스틸들이 루산의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민첩한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루산은 좌우로 잽싸게 헤비 스틸들을 피하며 지나갔다.
달려오는 적 멕 나이트 수가 점점 늘어났지만, 단 한 대도 루산을 저지하지 못했다.
루산은 피할 수 있는 공격은 피하고, 더 여유가 있을 때는 대검을 몸에 가까이 붙여 쓱 베고 지나가면서 적진을 계속 돌파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적들을 돌파해 굴다크 공작 앞까지 다다른다 해도 그를 쓰러뜨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북부 전선에서도 결국 철옹성처럼 공작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는 친위대를 뚫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덤벼 오는 적은 기민하게 피하면서 빈틈을 노려 해치울 수 있으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키고 있는 적은 제아무리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를 타고 있다 해도 무찌를 수가 없었다.
혼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곳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한때 자신이 꿈꾸었던 필센 제국의 용맹한 기사들이 적의 저지선에 막혀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과 함께 간다!’
달려드는 헤비 스틸들을 피하고 베면서 굴다크 공작의 블랙 드래곤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하던 루산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작을 죽이기 위해 생각 없이 달려들었다가 돌연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는 것처럼 공작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져 갔다.
[뭐야?]
굴다크 공작뿐 아니라 루산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던 다른 헤비 스틸들도 잠시 멍하니 지켜볼 정도로 어이없어했다.
그러다 루산의 목적을 깨닫고 다시 경악했다.
방향을 돌린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는 다후크가 이끄는 저지 부대를 향해 달렸다.
그 병력은 로이트가 이끄는 레오파드 부대의 삼각 진형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방패로 동료의 등을 밀고 있었다.
동료를 밀고 있는 헤비 스틸의 넓은 등판에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의 마나 진동 대검이 깊숙이 박혔다.
그극!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는 그대로 죽 달렸다.
대검이 헤비 스틸들의 등판을 죽 베며 지나갔다.
[막아라!]
[놈은 혼자다! 죽여!]
그러나 아무도 루산을 잡지 못했다.
포위될 것 같으면 얼른 그 자리를 이탈하고 다가오는 게 한둘에 불과하면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전장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어느 틈엔가 다후크의 고깔 모양 진형(∧)이 흐트러졌다.
루산이 소리쳤다.
[필센 제국의 기사들이여! 달려라! 막으면 부숴라! 적장의 목을 베라! 이 싸움을 우리가 끝낼 것이다!]
로이트가 재빨리 화답했다.
- 적장의 목은 내 것이다! 가자!
동방군 최고의 기사들을 모아 놓은 레오파드 슈퍼 임시 부대.
다른 파일럿들 역시 피가 끓었다.
- 블랙 드래곤은 내 차지야! 간다!
- 내 눈에는 차지도 않아! 저놈들을 뚫고 페르보 제국 황제의 목을 베러 갈 거다!
- 이야아아아아!
레오파드 슈퍼 파워와 레오파워 슈퍼 스피드들이 다후크의 저지 부대를 뚫고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막아서는 적의 멕 나이트는 피하고 베면서 높은 순간 출력을 최대한 활용해 쏜살처럼 달려갔다.
루산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고 기터 남작을 저지하고 있는 블랙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타르누크가 뒤쪽에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 채고 기터 남작을 밀치고 몸을 빼려 했으나 기터 남작은 끈질기게 그를 붙들어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달려온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의 대검이 블랙 드래곤의 다리를 순식간에 베고 지나갔다.
쓰릉!
루산은 멈추지 않고 다른 굴다크 공작의 친위대 멕 나이트들을 헤집고 다니며 칼자국을 남겼다.
[이봐, 이봐! 내 밥에 손을 대면 어떡하나?]
기터 남작이 쓰러진 블랙 드래곤의 가슴에 대검을 꽂은 뒤 빼내고는 화난 사람처럼 소리쳤다.
루산은 숨이 가빠 말할 힘도 없었다.
[하아하아! 더 큰 밥을··· 남겨 놨으니··· 갑시다!]
[그래? 그럼 가야지! 다들 가자!]
- 가자!
- 가자고!
- 로이트한테 공을 빼앗길 수는 없지!
레오파드 슈퍼 기체들이 진형을 풀고 야생마처럼 달렸다.
레오파드는 이렇게 운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라도 하듯이 60여 대의 레오파드는 마주 오는 적을 때로는 베고 때로는 피하면서 오직 언덕 위에 서 있는 블랙 드래곤을 노리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놀란 헤비 스틸들이 개미 떼처럼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