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마얄리와 윙구
303. 마얄리와 윙구
루산이 므라드와 그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바르나 왕국에서 필센 제국의 동방군이 아우로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동방군은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 약 4천여 대를 파괴했고 엄청난 수의 멕 나이트를 전리품으로 획득했습니다. 라브나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원군으로 오는 아우로라 연합군을 그라데 평원에서 대파한 것이죠. 페르보 제국의 굴다크 공작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습니다.”
므라드와 그의 부하들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얼마 전의 일이지요.”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므라드는 루산이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르사 왕국의 지배층들은 여전히 페르보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식민 지배 이후 페르보 제국이 물러간 뒤에도 페르보 제국으로부터 구형 멕 나이트를 제공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지역의 패권자로 자리 잡은 경우가 많지요.”
“맞네.”
“엄청난 병력 피해를 입은 페르보 제국은 자국을 방어하기에도 급급할 것이고 머지않아 필센 제국에 의해 동방군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겁니다. 그러면 그들을 지원해 줄 뒷배가 사라지는 겁니다.”
“뒷배가 사라진다?”
“네. 그러니 소문을 내야 합니다. 바르나 왕국에서 페르보 제국의 대패 소식과 페르보 제국이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므라드 전하께서 필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는 소문도 함께 퍼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제야 므라드는 루산의 의도를 깨달았다.
“저쪽 세력들이 분열하겠군.”
“그렇게 되면 좋지요.”
“그런데 우리가 필센 제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발표해도 괜찮은 것인가?”
므라드는 지금까지 필센 제국이 가프 용병단이라는 이름으로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지원한다는 것을 밝혀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소문인데 어떻습니까? 믿으면 믿는 대로,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죠.”
“음!”
확실히 저쪽 진영을 흔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효과를 낼지는 알 수 없었다.
페르보 제국과 필센 제국이라는 큰 나라들과 상관없이 자기 부족을 지배해 온 작은 세력들이 워낙 많았고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지배력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소문을 내는 것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잠시 따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루산은 독대를 요청했다.
므라드가 부하들을 내보냈다.
“됐나?”
“감사합니다, 전하. 어차피 저들은 자신의 지배권을 놓지 않기 위해 국왕을 옹위한다는 명분으로 뭉쳤습니다. 국왕이 저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국왕을 모셔 오겠습니다.”
므라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초저녁, 대형 거미가 황량한 산을 넘어갔다.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 벨라슈와 그에게서 대형 거미 조종을 배운 남방군 출신 파일럿 네 명이 있었기에 교대로 대형 거미를 조종해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일에 사용할 줄은 몰랐네요.”
바이크가 대형 거미 한쪽에 고정돼 있는 파워 아머 거치대를 보고 말했다.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파워 아머를 이런 일에 사용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이것이 있으면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깜깜해지기 전에 밥을 먹자.”
“나는 건포도 맛!”
시에나가 냉큼 소리치자 바이크가 레오파드 간편식 상자를 열어 시에나에게 건포도 맛 간편식 낱개 포장 두 개를 주었다.
므라드 군이 세를 넓히면서 항구까지 장악했기 때문에 배를 통해 보급품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다.
레오파드 간편식은 가프 용병단을 통해 부르사 전사들에게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바이크는 루산에게도 간편식을 건네고 자기도 포장을 뜯어 하나를 와작 씹고는 나머지 포장을 일일이 집어 보았다.
레오파드 간편식 상자를 새로 뜯으면 다들 하는 일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32개의 포장 안에 있을지 모르는 마스코트 인형을 찾는 것이다.
“어? 있다!”
“정말?”
시에나가 반갑게 소리치며 몸을 기울였다.
바이크가 포장을 열자 손가락만 한 작은 레오파드 인형이 나왔다.
날이 어두워 색깔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업지만, 형태로 보아 레오파드 파워였다.
대형 거미를 조종하기 위해 앞에 있던 마법사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도 관심을 보였다.
“와! 운수 좋은데?”
“뭔데? 어느 모델이야?”
“왜 나한테는 안 나오는 거냐고?”
바이크가 신이 나서 대꾸했다.
“어쩐지 늘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니. 그렇게 전쟁터를 다녀도 부상 하나 없잖아? 평소 기도를 많이 하셔. 히히히!”
바이크는 루산의 눈치를 살짝 본 뒤에 레오파드 파워 마스코트 인형을 시에나에게 내밀었다.
“뭐? 나한테 준다고?”
“나는 몇 개 있어.”
“나도 몇 개 있어.”
“넌 부르사에서 작전에 참여하는 게 처음이잖아.”
“치!”
시에나가 주저하다 그것을 받았다.
“오~!”
“이야~!”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괜히 탄성을 지르며 놀리자 바이크와 시에나의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둠에 가려 홍조 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형 거미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루산도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잠을 자기도 하고 깨기도 하면서 그들은 한참을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부르사의 왕이 사는 궁전 뒷산.
루산, 바이크, 시에나는 파워 아머를 착용하고 대형 거미에서 나와 능선을 타고 산을 내려갔다.
왕이 사는 궁전이라 해도 경계가 매우 삼엄하지는 않았다.
부르사 왕국에서의 왕은 종교 지도자로 모두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할 뿐 세속적 권력은 없었기 때문에 군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왕의 조카인 므라드가 최근에 부르사 왕국의 통일을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키고 주변 세력들을 집어삼키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세력들이 왕을 옹위하면서 궁전을 지키는 호위 병력이 약간 늘어난 상태였다.
루산은 므라드에게 궁전의 구조와 왕의 거처에 대해 이미 들었고, 바이크와 시에나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시간은 새벽.
세 대의 파워 아머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산을 내려갔다.
산기슭 아래쪽에 궁전이 있었다.
궁을 둘러싼 담벼락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받쳐!”
“네!”
바이크와 시에나가 담벼락 아래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두 손을 보아 도약대를 만들었다.
루산이 달리기 시작했다.
후쿵후쿵후쿵-!
루산의 파워 아머 오른발이 두 사람이 만든 도약대를 딛자 두 사람이 힘껏 발을 들어올렸다.
묵직한 파워 아머가 담벼락을 넘어가 지상에 착지했다.
쿵!
루산은 그대로 달렸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저거 뭐야?”
“침입자다!”
궁을 경비하던 병사들이 깨어나 소리를 지르고 달려왔지만, 파워 아머를 처음 본 그들은 차마 그 앞을 막지 못했다.
어둠 속에 횃불에 비친 그 모습이 마치 괴물 같았기 때문이다.
금속으로 된 단단한 괴물!
사람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간간이 용감한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코뿔소에 받친 사슴처럼 나가 떨어졌다.
루산은 여러 건물들을 지나 신전 역할을 하는 가장 큰 건물 뒤에 있는 왕의 거처로 들어갔다.
병사들의 고함에 깬 시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왕의 침소를 지키는 최측근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파워 아머에 도끼를 내리쳐도 흠집만 조금 날 뿐이었다.
루산은 그들 역시 밀어 버리고 왕의 침실을 열었다.
“누, 누구냐!”
싸움 소리에 구석에서 떨고 있는 초로의 노인.
므라드에게 들었던 것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루산은 부르사의 왕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건물을 나섰다.
왕이 버둥거렸지만, 파워 아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횃불을 든 경비들이 더 늘어났지만, 왕을 들쳐 메고 있어서 활을 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정면을 막아 봐야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루산이 달려갈 때 함성 소리를 듣고 루산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린 바이크와 시에나가 문을 부쉈다.
경비들은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되는 데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왕을 떠메고 산으로 달아나는 괴물들을 망연히 바라보다 왕을 옹위하는 부족들 수뇌부에 이 소식을 알렸다.
국왕 측 세력이 발칵 뒤집혔다.
한편, 루산은 대형 거미까지 돌아가 왕을 내려놓았다.
부르사의 왕은 자신에게 갑자기 일어난 납치 사태에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파워 아머와 대형 거미를 보고 더욱 놀랐다.
루산이 파워 아머에서 나와 말했다.
“무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누, 누구냐?”
“개인적으로는 폐하께 살길을 열어드리고 국가적으로는 부르사의 통합과 발전의 길을 알려드리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므, 므라드가 보낸 것이냐?”
“그런 셈이죠.”
그렇다도 아니고 그런 셈이라니, 국왕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루산은 굳이 국왕을 이해시켜 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것은 므라드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파워 아머와 대형 거미를 통해 언제든 침소로 들어와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해하기가 무척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산을 타고 계속 이동해 므라드에게 도착했다.
놀라기는 므라드 역시 마찬가지.
루산이 장담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국왕을 데려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루산과 필센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므라드는 국왕과 대화를 나누었고, 루산은 다시 대형 거미에 국왕을 태워 궁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국왕은 자신을 옹위한다는 부족의 추장들 앞에서 선언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부르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신벌을 받을 것이다! 이웃과 다투지 말고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라!”
왕이 납치당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다시 돌아와 전쟁을 하지 말라고 선언하니 그를 옹위하기로 한 족장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므라드가 나를 섬기기로 하였으니 더 싸울 이유가 없다!”
“······!”
“······!”
“······!”
정신을 차린 족장들이 소리쳤다.
“왕질이 폐하를 속인 것입니다!”
“신의 사자가 신의 아들을 속인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그건······!”
“어쨌든 므라드가 이곳으로 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앞에 엎드려 복종을 맹세한다 하니 무익한 싸움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
므라드가 항복한다는데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떠도는 소문도 심상치 않았다.
므라드가 필센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
그동안 므라드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해됐다.
아우로라 연합군이 대패하고 페르보 제국이 망하기 직전이다?
바르나 왕국에서의 패전 소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국왕 진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해 므라드에 합류하려는 세력은 국왕 곁에 머물며 므라드를 영접할 준비를 했고, 싸움을 계속하려는 진영은 국왕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므라드가 통일군을 이끌고 당당하게 부르사 왕국의 수도로 들어왔다.
황갈색으로 통일하여 도색한 아우로라 연합의 주력 기체인 헤비 스틸을 앞세우고 수백 대의 재생 기체들이 그 뒤를 늠름하게 따라왔다.
도무지 항복하는 세력의 수장 같지가 않았다.
정복자처럼 수도로 입성한 므라드는 국왕 앞에 엎드려 절했고, 국왕은 므라드에게 걸어와 손을 내밀어 조카를 일으켜 주었다.
- 마얄리와 윙구!
- 마얄리와 윙구!
- 마얄리와 윙구!
멕 나이트 수백 대가 외부 확성기로 외치는 소리에 수도가 들썩였다.
저항하는 세력들이 아직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날 부르사 왕국은 신의 뜻대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므라드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하면서도 무척이나 두려운 마음으로 루산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