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피는 피를 부른다
306. 피는 피를 부른다
“어느 병원을 다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임신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룩 나온 배가 옷으로 감춰지지 않더군요. 회사 업무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는 시기를 고려하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마젠스 자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바덴에 대해 파악해 보라고 지시한 이유는 인수를 생각하고 작업을 진행 중이던 에를랑겐 유통 상사를 그녀가 중간에서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바르나 왕국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이라 어떤 사업가도 침체된 유통 경기가 살아나리라고 전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과감하게 거액을 투자해 에를랑겐 유통 상사를 살리려 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이름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크게 부상한 여성 사업가.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경영하는 사업체들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원 별장 사업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출발했고, 반란 가담 귀족들의 사업체를 비교적 저렴하게 매입하여 사업 규모를 엄청나게 키운 점도 놀라웠는데, 그 이후가 더 대단했다.
반달 그룹, 정직한 기계 그룹, 용감한 나라와 브레이브 랜드··· 이들 사업체들은 전쟁 기간에 급성장을 기록했다.
용감한 나라와 브레이브 랜드 사업은 유사 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독보적인 회사들이고, 반달 그룹, 정직한 기계 그룹은 동종 업계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동차와 조선은 업계 순위권은 아니지만, 장래를 보고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사업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필센 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사업 규모인데 더 어마어마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농업 기지 사업과 국가 공단 이전 대상지 주변 개발 사업.
마젠스 자작은 아라드 왕국 재건 프로젝트나 부르사 왕국 철광석 도입 계획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음에도 이 두 가지 사업의 규모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고슬라 그룹의 규모와 영위하는 사업들을 보고, 모두를 완전히 파악한 것이 아님에도, 얼마나 놀랐는지 조사 인력을 더욱 늘리는 한편 바덴의 뒷조사에도 인원을 추가해 들키지 않는 선에서 모든 것을 파악해 오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바르나 왕국에서 필센 제국이 대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를랑겐 쇼핑 거리와 백화점 할인 광고가 모든 신문에 대대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광고 내용은 놀라웠다.
‘이게 재능이라면 충격적이고, 누군가가 뒤를 봐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무서운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를랑겐 쇼핑은 대박을 쳤다.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연일 발 디딜 틈도 없다고 했다.
필센 제국의 승리 소식에 소비 경기는 살아날 것이고, 에를랑겐 유통 상사가 선두의 자리를 확실히 잡게 되었다.
에를랑겐 백화점과 쇼핑 거리에 입점한 두 종류의 카페도 놀라웠다.
차 수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카페라니?
어디서 차를 들여온다는 말인가?
고슬라 그룹은 궁금한 점투성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임신이 확실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고관대작의 정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그나마 고슬라 그룹의 엄청난 규모와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엄청난 실력자가 뒤를 봐준다는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겠지만, 마젠스 자작은 필센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국가 공단을 제외하면 첫 번째로 큰 오베론 공단의 총책임자였다.
오베론 공작이 뒤를 봐줘도 이렇게 크기는 어렵다고 확신했다.
‘황제라면?’
마젠스 자작은 그 가능성도 지웠다.
황제는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존재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바덴과 황제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뒤를 봐주는 사람은 분명 있어! 지금까지 투입된 막대한 자금은 평민 출신 빵집 딸이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이 정보력 역시 노바 대학 동기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하지만, 나머지는 실력이라고 봐야 한다!’
어느 유력자가 누군가를 앞에 내세우고 배후에서 조종해 사업을 할 것이었으면 굳이 여자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가 큰 사업을 한다면 이목이 쏠리기 때문이다.
굳이 여자를 선택했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재능 때문인 것이다.
바덴이 앞서 추진한 사업들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름에도 마젠스 자작은 에를랑겐 쇼핑 거리와 백화점 광고 문구를 보고 확신했다.
‘자금이든 정보든 누군가가 뒤를 봐주고 있다! 아이는 그 사람의 아이일 것이다. 하지만, 사업은 고슬라 사장의 재능과 노력을 결과물이다!’
오베론 지방에서 태어난 최고의 천재라는 마젠스 자작.
그는 바덴의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이 없었기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어쩌면 필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일지도 몰랐다.
루트 오베론과 자신을 위해서도.
“앞으로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사를 계속하고,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마련해 봐.”
“알겠습니다.”
***
아라드 왕국에 도착한 루산은 곧바로 바덴에게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라드 변경으로 갔다가 변경 8구역으로 가서 밀린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바덴에게 갈 수 있는 것이다.
호리아 평원을 지날 때 주택과 공장 건물이 올라가고 많은 농기계와 멕 워커들이 투입되어 농지가 정리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도로였다.
모든 구간이 완전히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넓어진 도로로 인해 통행이 원활했고, 그 옆으로 철로가 놓이고 있었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려면 그 지역 도로를 보면 되는 거야. 내가 볼 때는 노바가 1등, 그다음이 레이크 시티야. 부르사 왕국이 꼴지, 그 바로 위가 이스타드 변경이지. 아라드 왕국도 부르사나 이스타드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점점 나아지고 있군.”
바이크가 문명사를 비교 연구 하는 학자인 양 아라드 왕국의 변화를 품평했다.
비록 태도는 겸손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품평할 만한 바탕은 갖추고 있었다.
모두 직접 가 본 곳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바이크는 변경 구석의 실력 없는 파일럿에서 세상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아 온 파일럿이 돼 있었다.
수도에서도 수백 대의 멕 워커를 투입하고 난민들을 대거 동원하여 대규모 주택 지구와 공업 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필센 제국에서 출발한 화물 열차들이 쉴 새 없이 건축 자재와 식량과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고슬라 그룹과 피닉스 제철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루산은 변경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니트라 공작을 방문했다.
니트라 공작이 그를 크게 반겼다.
“바르나 왕국에서 대승을 거두었다지요?”
“그렇습니다, 재상 각하. 제가 그곳에 있다 돌아오는 거라 조금은 잘 압니다.”
“그렇구려. 궁금하니 이야기 좀 해 주시오.”
루산은 간단히 설명했다.
“수도 라브나와 그라데 평원에서 양측 도합 1만 대가 넘는 멕 나이트가 격돌했는데, 우리 군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우리 군도 적지 않은 멕 나이트가 상했지만, 거의 전멸한 아우로라 연합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지금쯤이면 아마 페르보 제국 안으로 밀고 들어갔을 겁니다.”
“아! 드디어······!”
아우로라 연합의 침공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아라드 왕국의 재상은 격동하여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제국의 생산 능력이 최고 수준까지 올라와 있으니 부서진 멕 나이트를 대체할 신규 물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산이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레오파드 생산 능력뿐이지만, 다른 멕 나이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합니다, 필센 제국의 역량은!”
훨씬 거대한 적을 상대로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고, 먼저 공격을 받았음에도 역습에 성공해 역으로 적의 본거지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것도 이전의 대전쟁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동맹국들이 희생과 도움 덕이었습니다. 제국은 그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니트라 공작은 루산의 말에 감격했다.
실제로 아라드 왕국 재건 계획이 실행되고 있지 않은가!
단지 말뿐이 아닌 실질적인 복구와 발전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니트라 공작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리아 평원 개발이 시작되면서 해당 지역 영주들을 중심으로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요.”
루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호리아 평원 개발 계획은 단지 지역 복구 계획이 아니라 이 나라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는 사회 개조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소작농이 사라지고 자영농을 육성하며 산업을 발전시킨다.
마치 이반 황제의 개혁 헌법 수립과 각종 개혁 정책들이 반영된 프로젝트 같았다.
영주들의 반발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니트라 공작은 아라드 왕국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이 계획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의 침공을 겪으며 효과적인 전투 수행을 위해 군대가 중앙으로 집결했고 여전히 대전쟁이 끝나지 않아 그 편제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국왕이 군대를 쥐고 있었기에 영주들의 반발을 예상하고도 이 개혁 조치가 담겨 있는 아라드 왕국 재건 계획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대전쟁 이전까지 아라드 왕국은 영주들이 자신의 봉토에 대한 지배권을 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봉건 국가였다.
비록 이웃 나라인 필센 제국에서 개혁이 일어나 귀족들의 지위가 크게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주도 있었으나 자신 역시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보상을 해 준다고는 해도 땅을 빼앗기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필센 제국의 조치를 답습하여 반발하는 자들로 부대를 조직해 전선으로 보내는 것은 어떨지······?”
“······!”
“아직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니니까 죄수 부대는 아니고, 애국 부대 같은 이름으로······. 그리고 그 부대를 제국군이 지휘해 애국할 수 있는 전투에 투입하는 것이지요.”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겠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필센 제국과 동일한 개혁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니 제국으로서도 기껍게 도와줄 수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루산은 가슴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현재 모든 멕 나이트는 국왕 폐하 직속으로 편제되어 있소.”
힘으로 밀어붙이면 저항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제게는 국가 대계에 대해 언급할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만, 허락하신다면 제 견해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기꺼이 경청하겠소.”
루산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말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반발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한다면 반드시 원한이 남을 것이고 그 원한은 대대로 이어져 화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루산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기에 니트라 공작은 깜짝 놀랐다.
루산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겠지만, 이번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제국에는 반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개혁 정책에 저항해 최전선으로 끌려간 가문의 후손들이 거의 다 참가한 엄청난 규모의 반란이었지요. 조기에 진압하여 그들을 모두 최전선으로 끌고 갔습니다. 사망률이 엄청났죠.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가족들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으음······.”
“필센 제국의 개혁 정책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고 좋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이면을 보면 엄청난 피가 흘렀습니다. 이번에 사망한 죄수 부대 파일럿들의 후손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반란을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싹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다 죽일 겁니까?”
거의 모든 귀족들이 반란 예비자가 될 것이다.
니트라 공작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소?”
“필센 제국에도 개혁 정책에 피해를 보는 귀족들을 지원하는 대책들이 있었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았기에 그 덕을 본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지요. 어렵더라도 설득하고 최대한 보상책을 마련하고 그쪽으로 유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오.”
가난한 아라드 왕국이 보상을 제대로 마련해 주기는 어려웠다.
“제 가문도 장원의 5분의 4를 빼앗기다시피 했습니다. 다행히 유제품 가공업을 시작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반란에 가담했을지도 모르죠.”
개혁 정책으로 인한 변화를 직접 겪었다 하자 니트라 공작은 루산의 말이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필요하시다면 사업으로 성공한 필센 제국 귀족들을 섭외해 영주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할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반발하는 귀족들에게 어떤 대책을 마련해 주는 게 좋을지에 대해 아라드 왕국 정부에도 도움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니트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나 그게 정치가 아닐까요? 피는 피를 부릅니다. 이건 확실해요.”
다름 아닌 그 자신이 복수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루산의 목소리는 더없이 설득력이 있었다.
“진심 어린 충고, 고맙소.”
니트라 공작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니트라 공작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알 수 없었다.
루산은 공작과 작별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동안 깊은 인연을 맺게 된 니트라 공작이 부디 어려운 길을 선택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