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단검이 답이다
308. 단검이 답이다
가프 용병단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가프 마법 연구소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부르사 왕국이 통일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종교 지도자에 불과하던 왕이 통일된 부르사를 다스리게 된 거죠. 하지만, 실권은 왕의 조카인 므라드가 쥐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국왕이 조카인 므라드에게 양위를 선언하게 될 거예요.”
오랜만에 만난 루산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가라로슈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가프 용병단은 므라드를 도와 부르사 통일에 기여했습니다. 그 대가로 피닉스 제철은 부르사의 철광석을 거의 독점하게 될 겁니다. 가프 용병단은 피닉스 제철의 주선으로 므라드에게 고용된 형태로 들어갔거든요. 나중에 혹시라도 필센 제국 정부가 가프 용병단이 왜 부르사에 있었냐고 물어보면 피닉스 제철에서 해외 자원 확보를 위해 고용하기를 원한다고 해서 계약했다고 하면 될 겁니다. 탈은 없을 거예요. 필센 제국에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가라로슈는 이 사건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피닉스 제철이 부르사 왕국의 철광석을 독점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원래 피닉스 제철이 부르사에 가장 먼저 진출해 철광석을 들여오고 있었죠. 값싼 부르사의 철광석과 가프에서 연구하여 적용한 제철 공정 효율화 설비로 단기간에 철강 점유율을 확 끌어올리지 않았습니까?”
제철 공정 효율화 연구는 루산이 가프 마법 연구소에 가져다 준 것이었다.
슈텐달 남작을 사기 치기 위해 작업을 진행하던 툴롱 마법 연구소의 위장 이름 루앙 마법 연구소에서 제철 공정 효율화 연구를 발견하여 가프 마법 연구소에 주고 연구를 계속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요.”
“이제 므라드에 의해 부르사가 통일되었으니 더 많은 철광석을 들여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라드 왕국에서도 철광석을 들여오면 피닉스 제철은 철강 제품 단가를 확 낮출 수가 있죠.”
가라로슈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제철소들은 모두 도산하겠군요?”
“그렇게 되겠죠. 제철소뿐 아니라 광산도 폐광이 속출할 겁니다. 피닉스 제철은 그것들을 다 사들이게 될 것이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 제철 공정 효율화 설비 제작을 의뢰하겠죠.”
그야 해 주면 된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는 새로운 수입원인 셈이니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가라로슈가 주목하는 것은 피닉스 제철의 독점이 미칠 영향이었다.
철강 제품을 독점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은 필센 제국의 산업 전반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제작하는 레오파드도 피닉스 제철에서 공급하는 철강 제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제작할 예정인 멕 워커도 피닉스 제철과 협력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피닉스 제철에서 우리 연구소와 협력 업체들에 더 저렴하게 철강 제품을 공급해 준다면 가격 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는 것이다!’
레오파드는 이번 전쟁 기간 동안 많은 활약을 하며 성능을 충분히 증명했고 바덴의 홍보 전략 덕분에 대중적 인지도까지 획득하여 앞으로도 잘 나가게 될 테지만, 멕 워커는 완전히 후발 주자였다.
그런데 피닉스 제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시장 점유율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도 있고, 잘하면 시장을 석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라로슈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루산이 말했다.
“앞으로 멕 워커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겁니다. 필센 제국도 도로 건설 사업, 국가 공단 이전 사업 등 굵직굵직한 토목, 건설 프로젝트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엄청난 게 아우로라 대륙의 재건 사업이죠. 멕 나이트 수천 대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와 마을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그렇지요!”
“바르나 왕국의 수도 라브나는 완전히 폐허가 돼 버렸습니다. 멕 나이트 수천 대가 시가전을 벌였거든요.”
“그렇습니까?”
가라로슈는 루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루산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넘어갔다.
“멕 나이트 제작 설비를 충분히 확충하셨다면 이제는 멕 워커입니다. 멕 나이트 시장도 크지만 그보다 훨씬 큰 시장이에요.”
“알겠습니다.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설비 공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가라로슈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그런데 피닉스 제철 이야기는······?”
“피닉스 제철은 가프 마법 연구소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는 사이인 것이죠.”
“아! 저희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기사님! 레오파드도 다 피닉스 제철에서 공급해 주는 철강 제품으로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네?”
가라로슈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닉스 제철이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단기간에 계속 새로운 공장을 짓고, 부르사 왕국과 아라드 왕국에 철도를 놓고 광산을 개발하느라 자금 압박에 좀 시달리는 모양입니다. 개발이 늦어지고 철도 건설이 늦어지면 결국 독점이 늦어집니다. 가프 연구소에도 손해가 되겠지요. 그러니 자금을 좀 융통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어, 얼마나······?”
“2천만 골드 정도면 될 겁니다.”
“아······.”
가라로슈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계산하기 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멕 나이트 시장보다 훨씬 큰 멕 워커 시장에서 후발 주자라는 약점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는 파트너를 돕는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4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아마도 가프 마법 연구소일 것이다.
레오파드 판매를 아예 제외하고도 그러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원래 마나 연료와 윤활유, 각종 소모품을 제작해 판매해 왔다.
그런데 전쟁 전에 필센 제국의 변경 구역들이 8구역을 제외하고 죄다 반란에 연루되어 그쪽에서 같은 제품을 생산하던 마법 연구소들의 생산량이 급감해 버렸다.
전쟁으로 인해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괴수 부산물과 그것으로 만든 제품들의 가격이 급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8구역은 반란과 무관한 상태 - 오히려 루산이 반란 진압에 기여하여 유일하게 반란 사건으로 인해 타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성장했다 - 에서 레이크 시티에 장벽 생산 시설을 건설해 수중 거대 괴수들의 체액을 채취하고, 원정 사냥으로 많은 괴수 부산물을 획득했다.
게다가 괴수 목장에서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혈액도 점점 더 많아졌다.
루산과 8구역의 수입도 늘었지만, 가프 마법 연구소의 수입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거기에 레오파드 판매와 손상된 기체 재조립으로 얻는 수입까지 더하면 가프 마법 연구소는 지난 4년 동안 20억 골드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필센 제국을 대표하는 멕 나이트 아이언 워리어를 생산하는 물랭 마법 연구소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입을 거둔 마법 연구소로 올라선 것이다.
물랭 마법 연구소는 워낙 규모가 커서 공장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고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분을 나눠 놓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1위 규모의 마법 연구소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변경 구석에 있는 마법 연구소의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기사님이지!’
빌려 준다.
더 큰 수입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그동안 받은 이익이 훨씬 크니까.
그런데 그때 가라로슈의 머릿속에 생각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결국 기사님을 중심으로 피닉스 제철과 고슬라 그룹이 움직인 것이 아닌가!’
가프 마법 연구소는 루산을 매개로 피닉스 제철, 고슬라 그룹과 협력 사업을 진행해 왔다.
루산이 피닉스 제철, 고슬라 그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루산의 능력과 행보를 보면 결코 이 회사들의 하수인일 수가 없었다.
루산이 가프 용병단을 이끌고 있다고 해서 가프 마법 연구소의 하수인이 아닌 것처럼.
대등하거나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현명했다.
어차피 가프 마법 연구소는 루산을 최대한 돕겠다고 약속했다.
가라로슈는 루산이 도움을 요청할 때 마지못해 돕는 소극적 모습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돕는 것,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앞으로 필센 제국의 철강 시장을 석권할 피닉스 제철.
이미 레오파드 홍보와 레오파드 설비 건설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엄청난 규모의 농업 기지 사업과 식품 사업으로 경제 기반을 장악해 나가려는 야심만만한 고슬라 그룹.
이들 회사와 굳건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가프 마법 연구소의 장래에도 이로운 일이었다.
“사실, 우리 연구소는 여력이 조금 있습니다. 기사님 덕분에 크게 성장했지요. 그러니 2천만 골드 대신 6천만 골드를 빌려드리겠습니다.”
4천만 골드에 이어 6천만 골드면 1억 골드를 빌려주는 셈이 된다.
이번에는 루산이 깜짝 놀랐다.
“네?”
“기사님을 전폭적으로 도와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이 변함없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가라로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산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빚을 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라로슈 님.”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늘 기사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루산은 어차피 하기로 한 이야기를 더욱 의욕이 넘치게 할 수 있었다.
레오파드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는 바르나 왕국에도 갔었습니다.”
“네, 기사님.”
“어쩌다 보니 대첩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부르사와 바르나에서의 경험으로 레오파드 생산 방향에 대한 제언을 드릴까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기사님.”
가라로슈가 메모지와 펜을 준비했다.
“레오파드 슈퍼 모델들은 딱히 말할 게 없습니다. 어차피 더 높은 가격의 기체에 우수한 파일럿이 탑승했으니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죠. 특별 기체로서 순간적으로 전황을 바꾸고 국면을 전환하는 용도로 아주 훌륭했습니다.”
훌륭한 기체들이지만, 세르펜스의 생명 구슬을 구해야 추가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프 마법 연구소의 성장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일반형 기체가 훨씬 중요했다.
“레오파드 스피드는 설계한 의도대로 활용을 해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적을 우회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일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더군요. 정면으로 적과 교전할 때 중량 차이로 심하게 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문제고 지휘관이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극복할 부분이죠.”
그라데 평원 전투 막바지에 레오파드 스피드로 이루어진 특별 전단이 굴다크 공작군을 공격하다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라이네 후작이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피해를 각오하고 내린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피해가 크다고 성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레오파드 파워인데요, 숲과 산악 지대가 많은 오카수스 대륙에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는데 평야가 많은 아우로라 대륙에서 대회전이 벌어질 때는 한계가 있더군요. 대회전에서 방진을 형성하여 서로 밀어붙일 때 중량 차이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라로슈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우로라 대륙이라면 방진을 구성하는 멕 나이트 수가 많지 않아 진형 변경이 자유롭기 때문에 무게가 적게 나가는 것은 빠른 진형 변경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수백 수천 대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방진에서 무게가 가벼운 것이 무조건 불리합니다.”
“레오파드 파워는 대회전에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겁니까?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가라로슈가 절실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오파드를 만드는 것은 마법사들이지만, 전투는 루산이 전문가였다.
“파워는 동일한데, 중량에서 밀린다. 민첩성은 더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회전에서는 그 뛰어난 민첩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어요. 서로 완전히 밀착해 있으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부르사의 전사들에게서 레오파드 파워 활용법에 대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어떤 겁니까?”
“부르사의 전사들은 소형 원형 방패와 도끼를 들고 싸우더군요. 난전에서는 큰 방패와 대검이 거추장스럽습니다. 오히려 움직임을 방해하죠. 작은 원형 방패와 도끼로 적들 사이를 누비는데 아주 위력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음!”
“대회전에서도 적용이 가능할 것 같더군요. 적이 대형 방패를 붙여 방패 벽을 만든다 해도 방패와 방패 사이는 힘으로 밀면 어느 정도는 벌어집니다. 볼록한 모양의 작은 원형 방패나 다이아몬드 모양의 소형 방패로 그 틈을 밀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적은 대검을 들고 있습니다. 밀집 대형이라 휘두를 수도, 찌를 수도 없죠. 그런데 방패 사이로 밀고 들어간 레오파드 파워는 단검을 드는 겁니다. 좁은 틈이지만 찌를 공간이 나오죠.”
“단검이라!”
“대검은 뛰어난 기사가 아니면 활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단검이 더 위력적일 수가 있는 겁니다. 대회전이나 난전에서는 확실히 그렇고요.”
멕 나이트는 대검을 드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해 온 기사들이 전통적으로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됐기 때문이다.
루산은 그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말하고 있었다.
“필센 제국군의 멕 나이트 파일럿 비율을 생각해 보세요. 점점 평민 출신이 늘고 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한다지만,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한 기사들이 아니기 때문에 대검 숙련도는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검이 훨씬 위력적이죠. 동일한 출력에 중량은 낮지만 더 민첩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단검이 답입니다. 적의 방패와 방패 사이를 밀고 들어가 적 기체의 옆구리를 찔러 방진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루산이 말한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가라로슈는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