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312.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마젠스 자작은 부하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슬라 사장이 직접 나를 찾아온다고 했다고?”
“그어씀미다.”
입이 퉁퉁 붓고 이가 몇 개 빠져 발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들킨 상황에서 좀 더 조심하지 그랬냐고 다그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부하들을 내보냈다.
“하아!”
마젠스 자작은 이웃집 여자의 방을 훔쳐보다 그 여자에게 들킨 사춘기 소년처럼 부끄러움을 느꼈다.
똥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미행하고 감시해 온 사실을 들켰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어떤 남자와 다정하게 쇼핑을 하고 식사를 하고 식물원 구경도 했다는 것을 목격했으면 그 남자가 누구인지까지 알아냈으면 좋으련만, 그 전에 들통이 나서 이제 더는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똑똑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현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라. 언젠가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동안 감시만 해 왔지 해를 끼친 적은 없으니 그 사실을 사과하면 되는 거야. 저쪽도 임신 사실과 남자를 들켰으니 마냥 당당하게 나오지는 못할 터,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쥔 셈이니 그 사실을 묻어 두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건설적인 이야기란 물론 루트 오베론과 자신이 꾸고 있는 큰 꿈에 고슬라 사장과 그 배후 인물이 기여하는 것이다.
고슬라 사장의 배후에 있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오베론 공작 가문을 무시할 만큼의 높은 지위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다소 부끄러움은 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들을 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음 날, 마젠스 자작은 고슬라 사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바람의 언덕 장원 별장이었다.
‘직접 온다더니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나? 자신의 본거지로 초청을 한 걸 보니 임신 사실을 외부에 들키기를 꺼려하는 모양이군. 아니면 생각보다 겁이 많은 스타일일지도······.’
마젠스 자작은 고슬라 사장이 찾아오지 않고 초대한 이유를 나름 추측해 보고는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
***
바람의 언덕 장원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겨울 방학 기간이라 전쟁 전이라면 언덕 위의 모든 고급 오두막이 휴가를 즐기려는 귀족들과 사업가들의 가족으로 채워졌겠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승 소식이 전해진 뒤에도 절반 이상은 비어 있었다.
그래도 모든 언덕 위 오두막과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 곳곳에 그윽한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손님이 없다고 꺼 버리면 캄캄하고 무섭고 사람이 찾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켜 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젠스 자작은 자동차를 타고 언덕으로 올라가다 다른 언덕들에 모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귀족들을 위한 별장 사업으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더니 이 시국에도 사람이 많군. 언덕마다 밝혀져 있는 조명들도 아름다워. 확실히 공을 많이 들였구나!’
가로등의 모양과 다채로운 불빛의 색깔, 언덕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도로 옆에 서 있는 조경수와 석상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언덕 위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을 때의 모습에 비하면 올라오면서 본 광경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것들이었다.
캄캄한 밤임에도 모든 언덕들이 마치 별들의 놀이터인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젠스 자작은 살면서 이런 광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바람의 언덕이 아니라 별들의 언덕이로군!’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운 밤 풍경이었다.
마젠스 자작은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고급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확 끼쳐 오고, 나무로 된 실내의 포근한 분위기가 바깥의 추위를 금방 녹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안을 죽 둘러보았다.
나무 벽, 목재 가구들, 그림과 장식,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책들··· 전체적으로 평범해 보였지만,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나하나 신경 쓴 것들이었다.
우아미와 세련미가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치열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이런 곳에서 며칠 묵으면서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왜 인기를 끌었는지 알 것 같군!’
그저 그런 평범한 숙소가 아니었다.
편안함과 포근함과 친숙함을 느끼도록 철저히 계산된 공간이었다.
아름다움과 귀족적 취향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마젠스 자작이 고급 오두막 실내를 감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는 첫눈에 바덴 고슬라 사장임을 알아보았다.
외투로 가렸음에도 튀어나온 임부의 배가 아니더라도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여유로운 미소와 영리한 눈빛을 보고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마젠스 자작님?”
“그렇소. 내가 마젠스 자작이오. 고슬라 사장이시오?”
“네, 바덴 고슬라입니다.”
바덴은 초대한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상대를 확인하는 말만 했다.
잠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때 마젠스 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과를 드리리다. 고슬라 사장의 명성이 워낙 높아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무례를 범했소.”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할 때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죠.”
“그렇소.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런데 고슬라 사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소?”
“···그런가요?”
“그렇소.”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보통의 방법으로 알아볼 수 없다.
보통의 방법으로 알아본 것이 아니더라도 넘어가는 게 좋다.
어차피 양쪽 다 보통 사람들이 지키는 법의 영역에서 문제를 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뉘앙스라는 것을 바덴은 읽어 냈다.
맞는 말이었다.
바덴은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임신 사실과 관련된 수많은 관심들에 시달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젠스 자작 역시 감시와 미행을 사주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사과를 하셨으니 받아들이죠.”
“고맙소. 그런데······.”
“······?”
“여기 숙박하는 데 얼마인지 알 수 있겠소?”
“네?”
“궁금해서 그럽니다.”
“재작년 기준, 도시 노동자 월 평균 급여의 절반 정도 합니다.”
작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마젠스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추가 비용이 붙을 수 있습니다.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숙박을 원하시면 상세히 안내해 드릴 거예요.”
“그렇군요. 무척 멋진 곳이오. 언젠가 와 보고 싶을 정도로.”
“그렇다면 이번 일로 회원 한 분을 유치한 셈인가요?”
바덴이 이번 일에 대해 과감하게 넘어갈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마젠스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요. 내 지인들에게도 소개하리다. 물론, 내가 먼저 이곳을 이용해 보고 만족스러웠을 때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나를 만족시킨다면 사업이 더욱 번창할 것이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우리 장원 별장 회원님들은 모두 만족하신답니다. 불행히 반란죄에 연루된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전쟁 기간에도 간간이 이용하실 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편이지요.”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특별한 외부 사정이 있는 사람들뿐.
특히 반란을 언급한 것이 마젠스 자작은 거슬렸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귀족들이 좋아할 만합니다. 무척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바덴은 마젠스 자작을 창가로 안내했다.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처음부터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차나 한잔 하자고 초대했다.
깨끗하게 닦은 유리창 옆에 앉으니 바깥 언덕의 야경이 매우 잘 보였다.
유리창 옆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다기 세트가 놓여 있었다.
바덴은 과자가 담긴 접시와 난로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가져와 직접 다과를 준비했다.
마젠스 자작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에를랑겐 노블이라고 상감돼 있는 고급 자기 뚜껑을 열자 하얗고 얇은 작은 천 주머니가 여러 개 들어 있었는데, 바덴은 그것을 하나 꺼내 찻잔에 넣고 물을 부었다.
기분 좋고 깔끔한 차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에를랑겐 노블이라면 새로 시작했다는 카페 이름이 아니오?”
마젠스 자작은 그동안 자신이 뒷조사를 해 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궁금한 점을 과감하게 물었다.
바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럼 이건······?”
“모든 귀족들이 늘 카페에 와서 차를 마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집에서 마실 수 있도록 만든 제품이에요. 최고급 찻잎을 엄선해서 간편하게 마실 수 있게 한 거죠. 맛과 취향에 따라 종류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에를랑겐 노블이라는 이름을 단 소포장 차 상품.
“음!”
마젠스 자작은 신음을 흘렸다.
“에를랑겐 노블이 있다면 에를랑겐 유스도 판매용 차를 이렇게 포장해서 파는 것이오?”
“당연히 에를랑겐 유스도 있습니다. 물론 에를랑겐 노블과는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만, 맛은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차가 우러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정적이 흘렀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바덴은 차 주머니를 꺼낸 찻잔을 마젠스 자작 앞에 놓았다.
“드셔 보세요.”
“고맙소.”
마젠스 자작은 뜨거운 찻잔을 조심스럽게 입에 대고 호로록 마셨다.
익숙한 고급 차의 향!
떫은 느낌이 전혀 나지 않고 깔끔하면서도 입과 코가 상쾌해지는 맛!
나푸라산 차를 많이 마셔 봤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바덴도 차를 마셨다.
시어머니인 보름스 자작 부인과 그 지인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회원들을 상대로 계속 시음을 거쳐 가장 만족도가 높은 차를 엄선해 만든 ‘에를랑겐 노블 클래식’ 판매용 소포장 제품.
차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금 괜찮네, 하고 말겠지만, 차에 익숙한 귀족이라면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젠스 자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나도 차향이 가시지를 않았다.
“이건 어디서 파는 것이오?”
“아직 시중에 판매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조만간 팔게 되겠죠.”
“얼마에 파는 것이오?”
“그것도 고민 중에 있습니다. 귀족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최고 가격이 얼마일까 생각 중이죠. 얼마가 적당할 것 같나요?”
“···어려운 문제요.”
취향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덴도 동의했다.
“그런데 이 차는 나푸라산이 맞는 것 같은데······?”
바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들여오는 것이오?”
나푸라산 차는 여전히 금수품 목록에 들어 있었다.
밀수품을 이렇게 고급 포장까지 해서 대대적으로 판매할 수는 없었다.
“이건 아라드 왕국 차 전매청에서 들여오는 것입니다.”
“음?”
마젠스 자작은 아라드 왕국도 뜬금없었고 그 나라에 차 전매청이 있다는 이야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푸라산 차는 여전히 금수품이지만, 최근에 동맹국이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들여와 우회적으로 판매하는 차를 수입하는 것은 허용한다는 정부 고시가 있었습니다.”
“······!”
마젠스 자작은 바덴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라드 왕국이 차를 들여와 필센 제국에 판매해야겠다는 한가한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동맹국을 통해 차를 수입해 판매하겠다고 설계하여 아라드 왕국을 구워삶은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아라드 왕국이 재건 비용으로 충당하겠다고 하면, 필센 제국의 황제는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기 위해 막대한 전비가 나가고 있어 동맹국 피해 복구에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체 가난한 데다 해운 능력이 떨어지는 아라드 왕국이 직접 나푸라까지 가서 차를 들여오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
이 일을 계획한 누군가가 나푸라에서 차를 구입해 아라드로 보내고, 아라드에서 차를 들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금수품 예외 조항에 넣도록 필센 제국 정부에 힘을 쓴 것이다.
‘이 복잡하고 엄청난 일을 설계하고 실행했다는 말인가!’
나푸라산 차가 금수품이 되었으니 차를 밀수해 팔면 큰 이익이 남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젠스 자작은 바덴이 그동안 사업을 발전시킨 과정을 살펴보며 막연히 뛰어난 경영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에를랑겐 노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차를 대접받으며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내가 차 밀수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는 흔한 것이지만 이 시점에 굳이 정성스럽게 직접 차를 대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바덴이 말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만 하면 됩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서로 협력할 수도 있고 경쟁할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누군가의 뒤를 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바쁘신 오베론 공단 사장님께서 노바까지 자주 올라오셔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마젠스 자작이 침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