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믿음의 바탕 위에서
313. 믿음의 바탕 위에서
마젠스 자작은 이대로 열패감을 느끼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 사업 분야에서 고슬라 사장과 그 배후 인물의 능력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 해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최종 목표는 차 사업이 아니라 루트를 오베론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고 이 나라의 황제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슬라 사장 혹은 그 배후 인물이 이 일을 돕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의 사업 능력은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일인 것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 협력할 수 있다고 하셨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나와도 협력할 수 있다는 말이오?”
바덴은 마젠스 자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 초대에 응해 주시고 사과를 하셨으니 지난 일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다만······.”
“······?”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려면 앞으로 더 많이 노력하시고 진심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충분히 협력할 수 있죠.”
마젠스 자작은 바덴의 당당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젊은 평민 여자가 오베론 공작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자작에게 어쩌면 이리도 당돌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당돌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지닌 능력과 이룩한 결과물이 뒷받침된다면 이것은 결코 허세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베론 가문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어지간한 공격에 쉽게 꺾이지 않을 만한 배경이 있으니 저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겠지!’
필센 제국은 넓고 귀족도, 부자도 많았다.
마젠스 자작은 바덴의 배후가 어느 가문일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른 만큼 성급하게 접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바덴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마음을 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자작님.”
“······?”
“만남을 요청하셨어도 거절했을 겁니다. 몸이 이러니 누굴 만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여자의 몸으로 여러 사업을 해 나가다 보니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이런 모습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사람들의 입방아를 견디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음!”
바덴의 솔직한 고백에 마젠스 자작은 놀랐다.
“자작님을 직접 뵙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답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오베론 가문의 이름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났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었다.
“소문을 내시지는 않으리라 믿을게요.”
“걱정 마시오!”
마젠스 자작은 연유야 어찌 됐든 고슬라 사장이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밝히고 속마음을 터놓은 마당이니 협력의 고리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오베론 지방에도 별장 사업을 한번 해 보시는 게 어떻소?”
“네?”
“필센 제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땅이오. 귀족들도 많고 선대 공작께서 길을 잘 닦아 놓으신 덕에 사업가들도 많지요. 이런 수준의 휴양 시설은 충분히 통할 것 같소만······.”
“아!”
“부지 마련부터 사업 인허가 절차까지 최대한 도와주겠소.”
말뿐인 사과가 아니라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진심을 다할 테니 알아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고슬라 사장에게 이제 별장 사업은 그리 큰 사업이 아니겠지만, 지난 일은 잊고 이렇게 협력 관계를 시작하는 건 어떻소?”
바덴은 마젠스 자작의 제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빠르게 헤아려 보았으나 손해 볼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업적으로도 그렇고, 루산의 복수를 위해서도 그러했다.
“자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장 추진해 보겠습니다.”
“반가운 말이오.”
마젠스 자작은 그제야 편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첫 만남은 삐걱거렸지만, 빼어난 수완으로 앞으로 필센 제국의 재계를 주무를 것으로 보이는 고슬라 그룹과의 연결 고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숨을 쉴 때마다 진한 차향이 입 안과 코 안을 간질이며 기분을 좋게 했다.
바덴은 돌아가는 마젠스 자작에게 아직 출시하지 않은 최고급 차 ‘에를랑겐 노블 클래식’을 선물했다.
마젠스 자작은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이 뜻대로 되었음에 만족하며 별들의 놀이터 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람의 언덕 장원을 떠났다.
마젠스 자작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덴의 차 안에서 지켜보던 루산은 밖으로 나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마젠스 자작을 상대하느라 지친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루산에게 몸을 기댔다.
“괜찮아요. 재밌었어요.”
루산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
“마젠스 자작이 앞으로 대놓고 감시하는 짓을 하지 않더라도 사실 바덴, 아니 고슬라 사장을 감시하고 뒤를 캐려는 사람은 많다고 봐야 해요.”
“맞습니다, 기사님.”
루산의 말에 스텐커도 동의했다.
“그렇다고 집 안팎을 경호원들이 에워싸거나 움직일 때마다 많은 차량이 따라붙는 식은 안 좋죠. 오히려 눈에 띌 테니까요.”
바덴의 임신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누구보다 곤란한 사람이 바덴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너무 끌면 곤란했다.
“고슬라 사장도 이번 일로 경호 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경호원을 확충하겠지만, 주목을 끌지 않는 범위로 한정할 거예요. 그런데 그 정도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집 근처에, 돈을 더 많이 주더라도 집들을 구입해서 남방군 출신 기사들을 살게 하세요.”
“그들은 눈에 띕니다. 장애가 있어서······.”
“심각한 수준은 아니잖아요. 다리를 조금 저는 정도이지. 그리고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라는 게 아니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외출할 때 차를 타고 따라다니고 멀리서 지켜보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고슬라 사장님 경호원들과 별개로 멀찍이서 지키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정식 경호원들은 한계가 있어요. 이번처럼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죠. 그래도 경호원들이 비밀 경호 팀의 존재는 알고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서로 충돌할 수 있으니까. 그건 내가 고슬라 사장에게 말해 놓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루산의 경호 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평민 여자 사업가를 지켜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바덴을 경호하다 보면 루산과의 관계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루산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루산은 그들을 직접 만났다.
“고슬라 사장을 경호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체 복수는 언제 하는 것이오?”
보르비스가 대표로 따져 물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복수는 어떤 겁니까?”
“그야 오베론 공작과 황제를 죽이는 것이지!”
다른 남방군 출신 기사들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일을 어떻게 할 겁니까?”
남방군 출신 기사들이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과 황제의 힘은 너무 강해 그 일을 직접 할 수 없기 때문에 루산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공작의 저택에 칼을 들고 가서 찌를 겁니까? 아니면 차를 타고 출근하는 공작에게 차로 돌진하는 건 어때요? 황제는 어렵겠지만, 공작은 경호 차량이 몇 대 있다 해도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어떤 기사가 몰랐던 방법을 깨달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다가 동료들이 말없이 루산을 노려보기만 하자 무안하여 입을 다물었다.
“여러분도 알 겁니다. 그건 자살이죠.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운이 좋아 공작을 죽였다 칩시다! 첫째 아들은 어쩌죠? 둘째 아들은요? 공작 가문의 힘과 재산은요? 공작의 명예는요? 여전히 건재하죠! 공작은 반란 분자들의 공격을 받아 순직한 충신으로 기억될 것이고, 여러분은 아우로라 연합과의 전쟁 와중에 필센 제국의 중신을 죽여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죄인으로 기록되겠죠. 그리고 여러분의 남은 가족은 더 큰 고초를 겪게 되겠죠.”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의 코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여러분이 원하는 복수라면 그렇게 하세요. 그동안 협조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차량 정도는 제공해 드리죠.”
씩씩거리던 보르비스가 루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경이 생각하는 복수는 무엇이오?”
“원수의 목숨을 빼앗고 내 남은 가족이 고초를 겪는다면 그게 복수일까요? 적어도 그건 내가 생각하는 복수가 아니에요. 저들에게 힘도 재산도 명예도 남지 않아야죠! 나와 내 가족이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되죠! 내 가족의 억울함이 풀리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가족의 명예가 복원되어야죠! 그게 진정한 복수가 아니겠어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야기였다.
보르비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요?”
“어렵지만, 해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얼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오?”
“루트를 풀어 주어 오베론 공작 가문을 분열시키고 있고, 오베론 공작 가문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의 기반이 되는 어마어마한 재산 말입니다. 그 일을 고슬라 사장이 하고 있는 겁니다.”
스텐커를 돕고 있던 남방군 출신 기사들은 고슬라 사장을 남은 가족들에게 지원되는 생활비를 마련해 주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고슬라 사장은 오베론 가문의 재산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먹었다고 바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에게 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겁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앞으로도 설명할 일이 없을 겁니다.”
루산이 단호하게 말했다.
피닉스 제철이 철강을 독점하면 필센 제국의 광산과 제철소들이 무너진다.
거기에는 오베론 지방의 광산들과 오베론 공단에 입주해 있는 제철소도 포함돼 있었다.
피닉스 제철이 철강 제품을 독점하면 오베론 공단의 기계 공업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이미 마젠스 자작이 루트에게 오베론 가문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오베론 공단이 입을 타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위해 루산은 아라드 왕국에 공을 들여 왔고, 부르사 왕국 통일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무력 충돌에 대비해 구귀족파 기사들을 빼돌리고, 부르사 왕국의 전사 포로들을 아라드 변경으로 이주시켰다.
이 모든 일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지만, 비밀 유지를 위해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해 온 일, 여러분이 해 온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믿고 이번 일도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랍니다. 결코 나와 내 가족의 영달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가 가장 어렵기도 했다.
믿음은 장래에 대한 달콤한 말이 아닌 지나온 걸음으로 쌓이는 것.
여기 있는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은, 루산에 의해 반란을 저지당하고,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된 뒤, 원수나 다름없는 루산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뒤 루산의 말에 따라 스텐커를 도와 오베론 가문의 뒤를 캐고, 루트 오베론을 고문해 오베론 가문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풀어 준 루트에 의해 오베론 가문이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산은 경찰의 감시를 뚫고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믿어야 할 때였다.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이 잠깐 상의하고는 루산에게 말했다.
“알았소. 복수를 위해 고슬라 사장을 목숨 걸고 지키겠소!”
그들은 바덴 비밀 경호 임무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로 받아들였다.
그제야 루산은 한시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