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차라리 모두 물러나
319. 차라리 모두 물러나
의식을 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의식을 하고 매일 수위 변화를 측정하니 확실히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수위가 올라가면서 습지가 점점 넓어졌다.
이러한 변화가 변경 7구역과 가까운 곳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7구역 북쪽에 있는 변경 1구역과 2구역 서쪽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산지의 눈이 녹아 일어난 것이라는 비어슨의 설명은 놀라웠다.
그가 광활한 원시의 땅의 지형과 기후, 식생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맘때 반달 호수 수위가 올라갔던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그럴 거야.”
비어슨이 말했다.
“웨이브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어.”
루산도 웨이브의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 웨이브는 봄 홍수가 원인일 거야. 중부 산지의 눈이 녹으면서 강을 따라 상당히 넓은 면적이 범람을 하게 되지. 강 주위의 평원과 초원, 밀림과 습지가 물에 잠기는 거야. 그러면서 그 땅은 더 비옥해 지고 나무와 풀이 더욱 잘 자리게 돼. 어쨌든 그 땅에 살던 괴수들은 봄 홍수를 피해 이동해 왔고, 그 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다 보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몸에 새겨진 것인지도 몰라. 봄이 되면 괴수들은 지대가 높은 땅으로 가고자 하는 거지.”
루산은 비어슨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좁은 지역으로 괴수들이 모이고 밀도가 높아져 저절로 밀어내기가 이루어졌겠지? 그 방향이 변경 7구역이었을 거야. 7구역이 다른 변경 구역에 비해 많이 크지. 왜 이렇게 클까? 웨이브가 봄마다 찾아오니까 빠르게 성장한 것 아니겠어?”
“아!”
그럴싸했다.
변경 구역의 발전은 괴수 부산물 수입과 비례하는 것, 정말로 웨이브가 매년 찾아왔다면 다른 구역에 비해 매우 높은 수입을 거두었을 것이다.
“물론 이동해 오는 괴수의 규모가 매년 똑같지는 않았겠지. 대이동이라는 것은 원래 한쪽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야. 이쪽으로 왔으면 저쪽으로 돌아가는 거지. 봄 홍수를 피해 이동을 했던 괴수들은 수위가 낮아지면 돌아갈 거야. 마침 봄이 되고 물에 잠겨 있던 땅에 풀이 잔뜩 자라잖아. 그런데 사람이 사냥해 버리는 거지. 지나치게 많이 잡아 버리면 이듬해에는 저 멀리서 원래대로 웨이브가 발생했다 해도 여기까지 연쇄적으로 밀고 오지 않겠지.”
“그렇겠지.”
“그래서 강 상류에서 매년 발생하는 웨이브라 해도 여기서는 매년 발생하지는 않을 수 있어. 그런데 최근에 7구역에 파일럿이 부족해 주변 지역 사냥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며?”
“맞아. 4년 정도 그랬지.”
“그러니 그동안 늘어난 괴수들이 크게 밀어닥친 거지.”
루산은 비어슨이 추측하는 웨이브의 원인이 맞는 것 같았다.
비어슨의 말이 계속되었다.
“7구역 면적이 크다는 건 무슨 말이냐면 평평한 땅이 많다는 거야. 사람이 들어와 살기 전에는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는 거지. 내 생각에 대이동은 7구역 초입까지였을 거야. 협곡 지대가 펼쳐져 있잖아. 괴수들이 건너지 못해.”
변경 구역은 괴수가 바깥세상으로 가기 어려운 지형을 최후의 방벽으로 삼을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7구역에서 바깥세상으로 가는 길은 깊은 협곡 지대였다.
“특히 이 계절에는 협곡 지대에 물이 가득 차 있지 않겠어? 그러니 괴수들은 인간이 개발하기 전의 7구역 땅에서 풀을 뜯다가 수위가 낮아지면 다시 풀을 찾아 돌아갔을 거야. 육식 괴수들은 그런 초식 괴수 뒤를 쫓아갔을 테고. 내 생각에는······.”
비어슨이 평소 모습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려고 끙끙대며 말했다.
“변경 구역 설계를 다시 하는 게 좋아.”
“무슨 말이야?”
“대규모로 밀려오는 괴수들을 다 죽일 게 아니라 그대로 살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봄 홍수 웨이브 같은 경우, 매년 발생할 텐데 이때 다 잡아 버리면 몇 년 동안 웨이브는 없겠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잡으면 부산물 가격도 확 떨어지잖아. 적당히 잡고 나머지는 돌아가게 두는 거야. 그러면 내년에 또 올 테니까.”
“아!”
루산은 정말 감탄했다.
그동안 변경에서 웨이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웨이브가 찾아오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이 잡아서 얼마나 높은 수입을 거둘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필센 제국 변경은 괴수에 벌벌 떨던 먼 옛날의 변경이 아니잖아. 멕 나이트, 멕 워커가 수백 대씩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주거 지역이나 공장들은 높고 튼튼하게 둘러싸 보호하고 농경지는 봄마다 찾아오는 괴수들을 위해 양보해 주는 거지. 멕 나이트들이 나와서 잡을 만큼 잡고 시간이 흘러 돌아가는 괴수들은 돌려보내고. 안 돌아가면 쫓아 버리면 되잖아.”
루산은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봄이 오기 전 겨울부터 눈 녹은 물이 범람할 무렵까지 괴수들이 찾아와 7구역 평지를 가득 채운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인간 거주 구역에서 멕 나이트들이 나와 육식 괴수 위주로 사냥을 한다.
괴수들이 싼 똥이 들판에 가득하다.
수위가 낮아지고 괴수들이 돌아가고 남은 괴수들도 쫓아 보낸 뒤, 이 비옥한 땅에 삼모작 농사를 짓는다.
더 흥미로운 변경 투어도 가능하다.
들판을 가득 채운 괴수들을 높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광객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하다.
물론 도로가 파손되고 사람이 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는 어렵겠지만, 어찌 보면 괴수 목장보다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괴수를 상대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고 두려움에 떠는 아라드 변경과 달리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변경 땅을 일정 기간 동안 괴수에게 내 주는 것이다.
더욱 안정적이고 더욱 높은 수입을 위해.
“내가 통치자라면 자네 말대로 하겠지만, 나는 잠깐 찾아온 이웃에 불과해. 어쨌든 7구역 통치자를 만나면 이야기는 해 볼게.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어떻게 하지?”
“수위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지만, 지금 방어선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거야.”
“그러니까.”
“차라리 모두 물러나 버려. 개척촌이든 개척 도시든 다 빠지라고 하는 거야. 한두 달 뒤면 괴수들이 물러갈 테니 어차피 못 버틸 걸 억지로 버티다가 사고 나는 것보다는 낫지.”
“음!”
미리 대피를 시키지 않고 억지로 막고 있다가 사고가 터지면 변경 군단 변경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개척지 주민들은 그야말로 횡액을 당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주민들을 뒤로 물리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면 거주지는 큰 피해를 입을지 몰라도 드넓은 7구역 전체에 흩어져 있는 괴수들을 안정적으로 사냥하다 몰아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멕 나이트가 도입된 이후 필센 제국 변경 구역의 역사에서 개척촌과 개척 도시를 포기하고 물러난 역사가 없었다.
멕 나이트는 괴수를 물리치고 인간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인간의 무기였던 것이다.
7구역 통치자와 요원들, 그리고 주민들은 이것을 패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루산은 7구역 통치자에게 이 의견을 전하러 갔다.
***
“···주민들을 7구역 본부가 있는 오스나 시로 물리고, 다 수용하지 못한 주민들은 8구역 본부가 있는 라돔 시에서 수용하겠습니다. 길어 봐야 두 달입니다. 이 방법이 인명 피해 없이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루산의 설명을 들은 7구역 통치자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괴수들이 다시 돌아간다는 보장이 있소?”
어디까지나 비어슨의 예측이었다.
루산은 믿었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돌아가지 않더라도 드넓은 7구역 전체로 흩어지기 때문에 밀도가 낮아져 차분히 사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농사는 어떻게 짓고 생업은 어찌 한단 말이오? 부서진 집과 마을은 언제 다시 복구하고?”
“후회하면 늦습니다. 괴수 밀도가 좀처럼 낮아지지 않고 있어요. 7군단 방어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희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
버티기가 어렵다는 보고는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나 괴수에게 개척지가 모두 쓸려 나간 변경 구역의 통치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필센 제국에서 가장 크고 발전한 7구역이 아닌가!
통치자의 고민이 깊어졌다.
루산이 그 고민을 덜어 주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이오?”
“주민들을 대피시켰으나 현재 저지선에서 아무 피해 없이 웨이브를 막아냈다면, 그동안 주민들이 일하지 못한 손해, 먹이고 재우는 데 드는 비용을 제가 다 대겠습니다.”
“······!”
통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7구역은 여덟 개 변경 구역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말은 인구도 가장 많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돈이 많기에 그 돈을 다 댄다는 것인가!
“허언은 안 되오!”
“어차피 몇 년 치 괴수 부산물 수입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레이크 시티 시장입니다. 들어는 보셨죠?”
물론 루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은 것이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만약 방어선이 무너졌는데, 제 말씀대로 그 전에 주민들을 대피시켜 인명 피해가 없다면 제게 감사 인사를 해 주십시오.”
루산이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말하자 통치자는 마음이 흔들렸다.
누가 남의 구역에서 욕먹을 줄 알면서 이런 요청을 하겠는가?
루산의 화려한 이력도 신뢰를 더해 주었다.
그럼에도 모든 주민에게 대피 명령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관리들이 움직여야 할 것이며, 그들은 또 뭐라고 험담을 할 것인가.
“잊지 마십시오. 통치자님께는 권한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벌을 줄 권한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벌을 줄 권한이 있는 분이 뭘 고민하십니까? 방어선 상황을 들으셨으면 당장 실행에 옮기십시오.”
변경 7구역.
필센 제국 변경 구역 가운데 가장 발전하고 규모가 큰 변경 지방.
4년 전 반란 사건에 연루되면서 세가 크게 꺾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150대 이상의 멕 나이트를 운용하고 있으며 인구 또한 가장 많은 지방.
반란 사건 이후 재작년에 이곳으로 부임한 통치자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어떤 인연인지 몰라도 자신을 통치자로 자각시킨 루산의 말을 듣기로.
“그렇게 하겠소!”
그는 즉시 본부 간부들을 불러 주민 대피 명령을 내렸다.
많은 반발이 일어났지만, 통치자는 방어선 기동 부대의 어려움을 근거로 밀어붙였다.
“책임은 내가 진다! 당장 이행하도록!”
변경 7구역의 모든 요원과 관리들이 전 지역을 돌며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루산도 율리안과 가라로슈 - 초반에 테스트를 참관하고 돌아갔다 - 에게 연락을 보내 지원 요원과 지원 물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물이 점점 불어나 저지선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괴수 떼는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았다.
7군단 방어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 대피가 다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방어선이 무너질 것 같았다.
루산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시간을 벌어야겠어!”
“어떻게?”
“괴수들을 뚫고 가면서 육식 괴수들을 최대한 솎아내야지. 그래야 압력이 조금이라도 줄 테니까.”
“같이 갈게.”
“좋아!”
루산은 버티지 못하면 오스나까지 주민들을 보호하며 퇴각하라고 명령을 켐니츠에게 내리고, 비어슨이 이끄는 탐사 부대 대원들과 함께 밀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전투 거미 실험단과 합류했다.
[으악! 저게 뭐야?]
깜짝 놀라는 비어슨에게 루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투 거미야. 상당히 도움이 될 거야.]
그들은 괴수들이 밀려오는 서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육식 괴수들을 솎아내면서.
그러는 동안 습지에 물이 점점 차올라 마침내 깔때기 방어선까지 찰랑거렸다.
더 견딜 수 없어 켐니츠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2전단, 습지 뒤쪽까지 물러난다!]
멕 나이트, 멕 워커들이 첨벙첨벙 물을 건넜다.
탐탐들이 물에 들어가기 싫어 버둥거리며 저항했으나 멕 워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나무들이 물에 둥둥 뜨면서 방어선이 흐트러졌고, 쌓여 있던 괴수들이 일제히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