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서류 챙겨
321. 서류 챙겨
변경 8군단 2전단이 방어선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경 7군단 역시 웨이브 저지선에서 후퇴했다.
가장 큰 이유는 파일럿의 피로였다.
한 달 넘게 밤낮없이 쪽잠을 자며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괴로움을 견디고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것이 변경 파일럿들의 삶이지만, 이번 웨이브는 역대급 규모인데다가 멕 나이트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기 때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한 것이다.
방어선을 지키던 멕 나이트가 뒤로 빠지자 뒤에서 밀고 오는 압력에 밀린 괴수들이 둑 터진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겁먹지 마! 우리가 괴수에게 져서 물러나는 게 아니야! 너무 높아진 밀도를 낮추기 위해 평원으로 풀어놓는 거야! 멕 나이트는 멕 워커와 정찰대를 호위하면서 천천히 물러난다!]
그동안 정치 싸움과 이익 다툼에만 골몰하던 변경 7군단 지휘관들이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 인간으로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부하들을 다잡았다.
7군단 멕 나이트와 멕 워커가 넓은 들판으로 쏟아져 나온 괴수들을 지나 동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개척촌을 발견하면 사람들을 멕 워커, 멕 나이트 어깨에 태우고 이동했다.
넓은 변경 7구역의 서쪽 끝에서 본부가 있는 동쪽 끝까지 이동하는 것은 멕 나이트로 5일이 걸렸다.
그러나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아 15일이 걸렸다.
오스나 시에 도착해 보니 이미 8구역에서 지원 나온 멕 워커들이 바위와 나무를 이용해 도시 방벽을 높게 쌓고 있었다.
그 전에 투입된 8구역의 멕 워커가 거의 400대였는데 루산의 마지막 지원 요청을 받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200여 대를 추가한 덕에 무려 600여 대의 멕 워커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방벽을 튼튼하게 쌓아 올렸다.
수면 부족으로 무척 피곤한 가운데에도 주민들을 어깨에 태우고 손바닥에 올린 채 이동하던 변경 군단 파일럿들은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안전하다! 괴수들은 오스나 시로 들어오지 못한다! 힘을 내자!]
변경 8군단 2전단 병력과 7군단 병력이 주민들을 보호하며 방벽 사이에 난 통로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7구역 통치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주민들이 대피하지 못한 개척촌은 없는가?”
“없습니다! 이번에 들어오는 것으로 모두 대피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도착하지 않은 병력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후미에 남은 병력은 없는가?”
“8군단 2전단장이 소수의 멕 나이트로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육식 괴수를 최대한 솎아내어 웨이브 이동 속도를 줄여 보겠다고 말입니다!”
“그가 아직 안 돌아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통치자가 콧숨을 길게 뿜어냈다.
옆에서 새로운 군단장이 된 전 1전단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벽을 완전히 닫는 게 좋겠습니다.”
“······!”
“물론 방벽 사이로 멕 나이트 한두 대 드나들 정도의 작은 통로는 남겨 둬도 괜찮습니다만, 파일럿들의 피로가 너무 극심하니 며칠 푹 쉬도록 방벽을 완전히 닫는 게 낫습니다. 만약 2전단장이 괴수들을 뚫고 이쪽으로 들어오면 그때 방벽을 살짝 허물어 구하면 됩니다.”
고심하던 7구역 통치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멕 워커들이 오스나 시를 감싸고 있는 서쪽 방벽 사이의 통로를 완전히 메웠다.
그동안 저지선에서 웨이브를 막아내던 파일럿들이 그동안 못 잔 잠을 자느라 도처에 널브러지고, 오스나 시로 대피해 온 주민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가족들의 손을 꼭 잡고 관리들의 안내를 받아 임시 천막으로 이동했다.
높게 쌓아 올린 장벽 너머로 괴수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지선에 막혀 좁은 곳에 몰려 있던 괴수들은 7구역 넓은 평원을 서서히 채우며 마침내 오스나 시 동쪽 방벽까지 다가왔다.
둑 터진 물이 넓은 저수지에 천천히 고이듯 괴수들은 오스나 시 서쪽 평원을 야금야금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괴수들이 평원 전체에 가득 찼다.
밤이 되자 변경 7구역의 본부가 있는 오스나 시는 물이 가득 찬 호수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도시처럼 괴수들로 가득 찬 평원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반짝였다.
***
전투 거미 실험단과 탐사 부대를 이끌고 육식 괴수를 솎아내며 서쪽으로 이동하던 루산 일행은 잠시 괴수들이 뜸한 틈을 타 산기슭으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돌아가기는 늦었어. 지금 돌아가 봐야 괴수로 가득 찬 7구역을 뚫고 들어가야 해.”
비어슨이 말했다.
“맞는 말이야.”
루산도 동의했다.
아무리 멕 나이트가 등장한 이후 인간이 괴수와 싸워서 진 적이 없다지만, 7구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괴수를 고작 멕 나이트 10여 대와 전투 거미 2대만으로 뚫을 수는 없었다. 무장이 되지 않은 가프 마법 연구소의 대형 거미는 괴수와의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 거미도 만능이 아니었다.
철제 화살과 마나 진동 화살 수량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루산이 말했다.
“그리고 오스나 시는 우리가 없어도 방어에 지장이 없어.”
오스나 시 좌우는 협곡 지대, 서쪽 방벽만 높게 올리면 괴수들이 들어갈 수 없다.
멕 나이트도 7군단과 8군단 2전단의 수량을 합하면 200여 대나 되었다.
“봄 홍수 수위가 낮아지고 다시 괴수들이 동쪽으로 돌아가면, 아니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이제 오스나 시에서는 괴수를 조금씩 소탕하는 일만 남았지. 주민들이야 괴롭겠지만, 사실 7구역으로서는 어마어마한 괴수 부산물 수입을 올리는 셈이야.”
“그럼 우리는 어쩌죠?”
나뭇가지로 의미 없이 바닥에 낙서를 하던 바이크가 물었다.
“동쪽은 밀도가 높고 서쪽은 이제 밀도가 낮아졌겠지?”
“그렇지.”
비어슨이 대답했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루산은 원시의 땅 지도를 꺼냈다.
비어슨이 전에 작성해 놓은 원시의 땅 지도였다.
7구역 서쪽이 모두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대강의 위치는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는 것도 위험해. 밀림을 한참 동안 지나면 트리어가 이끄는 8군단 1전단이 있을 텐데, 그쪽으로도 웨이브가 흘러갔으니까.”
“그렇지.”
비어슨이 동의했다.
“이대로 서쪽으로 가다가 반달 호수 북서쪽 산지를 크게 돌아서 반달 호수 지역으로 들어가는 거야.”
“너무 많이 도는 거 아닌가요?”
대형 거미에 타고 있던 마법사 중 한 명이 물었다.
마법사들은 괴수 사냥에 참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전투 거미가 제대로 활약하고 있고 멕 나이트가 10여 대나 있다지만, 이 많은 괴수들 사이에서는 티도 나지 않았다.
두려웠던 것이다.
“이쪽 길이 더 안전합니다. 웨이브와 점점 멀어지는 거죠. 그리고 시간도 훨씬 빠를 거예요.”
“맞아, 맞아.”
루산의 말에 비어슨이 동조했다.
“그리고 이쪽으로 도는 김에 여기를 들렀다 가는 겁니다. 사실 워낙 멀어서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텐데,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가 보는 거죠.”
루산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타이폰’이라고 쓰여 있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는 타이폰이 무엇인지 몰라서, 누군가는 타이폰이 무엇인지 알아서였다.
그 무시무시한 세르펜스도 가볍게 사냥한다는 전설의 괴수 타이폰.
네오 우르사 시제기에 이 타이폰의 생명 구슬을 점화기로 채택한 엔진을 장착하기로 했던 것이다.
돌격형 멕 나이트, 최강의 멕 나이트 ‘네오 우르사’를 만들기 위해 가라로슈가 타이폰의 생명 구슬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루산은 그동안 여러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가서 특정 괴수만 잡고 돌아올 여유가 없었다.
타이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탐사 부대 대장으로 임명한 비어슨이 원시의 땅을 탐험하고 돌아다니다 마침내 타이폰의 서식지를 발견하고 지도에 표시해 왔던 것이다.
네오 우르사 시제기는 사실 루산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가프 연구소에도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니었다.
아우로라 대륙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필센 제국군이 돌격형 멕 나이트 없이도 승리함으로써 수요가 긴급하게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산은 이번 기회에 타이폰 사냥을 해 보기로 했다.
워낙 바빠 언제 다시 여기까지 올지도 모르고, 어차피 동쪽과 남쪽으로 가는 것보다 서쪽으로 돌아서 가는 게 시간이 단축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7구역 웨이브를 막기 위해 지원을 오면서 출산 예정일에 맞추기는 늦었다.
‘미안해요, 바덴.’
타이폰 서식지가 있는 서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레이크 시티로 복귀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원시의 땅에서 전투 거미의 능력을 최종적으로 실험하기에도 이보다 더 좋은 목표는 없었다.
기가스 엔진을 장착한 우르사 Ⅱ도 있었고, 003도 있었고, 대형 괴수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탐사 부대 파일럿들의 넝마주이 같은 중고 아이언 워리어들도 있었다.
루산이 힘주어 말했다.
“가자! 타이폰 잡고 레이크 시티로 돌아가는 거야!”
“응!”
“네, 대장님!”
“알겠습니다!”
비어슨, 바이크와 시에나와 파일럿들, 마법사들이 저마다 다른 각오와 표정으로 대답했다.
***
보름스 자작 부인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손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온 딸이 부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들 맞은편에는 바덴의 부모가 앉아 있었다.
따라오겠다는 쌍둥이 남매를 억지로 떼어 놓고 왔다.
사람이 많으면 좋지 않다는 바덴의 말 때문이었다.
미리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도록 병원 측에 특별히 부탁해 놓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소문이 나면 곤란했기에 바덴은 시댁과 친정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애 낳는 산모를 병원에 혼자 둔단 말이냐!”
보름스 부인이 완강하게 반응하고 친정 식구들도 펄쩍 뛰었다.
그래서 바덴은 최대한 평범하게 입고, 식구들을 많이 데려오지 말라고 타협한 것이다.
가족들이 별도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그 시각 바덴은 침대에 누워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장님, 이제 그만 보시고 저한테 주세요.”
비서 소피아가 옆에서 어쩔 줄을 모르다 기어이 한 소리 했다.
“아니에요, 소피아. 아직 견딜 만해요. 가만있는 게 더 힘들어.”
“그래도······!”
“후우우우, 하아아아, 후우우우, 하아아아. 이봐요, 괜찮잖아.”
바덴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오베론 지방에 굳이 장원 별장을 하나만 지을 필요는 없어요. 호수 옆에 하나, 바닷가에 하나 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담당자에게 그렇게 추진하라고 지시하세요.”
“···네, 사장님.”
“그리고 피닉스 제철에 자금 밀어 주는 거, 왜 이리 늦어요?”
“워낙 액수가 커서 은행에서 처리하는 데 시일이 걸린다고······.”
“지금 피닉스 제철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데! 2천만 골드도 처리 못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당장 처리해 주지 않으면 거래 은행 바꾸겠다고 하세요.”
“네, 사장님!”
“그리고··· 윽!”
“사장님! 괜찮으세요?”
바덴은 참으려 애를 썼지만, 갑자기 밀려오는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손에서 서류들을 놓치고 비명을 질렀다.
“악!”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원 관계자들이 급히 달려 들어와 바덴의 침대를 분만실로 옮기기 위해 밀었다.
바덴은 분만실로 들어가기 직전, 소피아에게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소리쳤다.
“서류 챙겨······!”
잠시 멍하게 분만실 앞에 서 있던 소피아는 병실로 돌아가 떨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모아 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괜히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