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자유분방한 분입니다
328. 자유분방한 분입니다
“미안해요, 바덴. 변경에 대규모 웨이브가 발생하는 바람에······.”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연락도 없어서 걱정했거든요.”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가게 되어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요.”
루산은 바덴에게 키스하고 아기를 처음 보았다.
바덴이 출산한 지 45일 만이었다.
“딸이에요.”
아들이 아니라는 말에 루산은 살짝 서운함이 일었으나 그것은 강하게 아들을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수십 년을 남자로 살아온 초보 아빠들이 성별이 다른 자식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열차를 타고 오는 길에 딸이 태어났을 경우도 상상해 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루산은 서운함을 얼른 지우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를 닮아 이렇게 예쁘구나! 똑똑하고 지혜롭겠어!”
“피!”
바덴은 아기를 낳을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 일로 루산이 괜히 미안해서 자신의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해 입술을 비죽였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예쁜 아기, 이름이 뭐니?”
루산이 아기를 보고 물었지만,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아직 안 지었어요. 당신이 오면 지으려고요.”
“그럼 레오나로 할까? 우리 아기, 용감하고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되는 거야!”
“레오나?”
“응.”
“레오나, 레오나. 왠지 상큼함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전사 같은 강인한 느낌도 드네요.”
“그건 착각이에요. 얼마나 예쁜 이름인데. 그치?”
“뭐, 이름의 인상은 그 사람이 자라면서 만들어지는 거죠. 우리 아기가 훌륭하게 자라면 레오나라는 이름이 훌륭해질 거예요.”
“엄마도 좋다고 하는구나, 레오나.”
루산이 아기를 품에 쏙 안고 말했다.
레오나는 낯선 남자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세상에! 하품을 하잖아! 아빠 품이 편한가 봐요!”
“잘됐네요. 밤에 잠을 잘 안 자니까 아빠가 재워 주면 되겠어요.”
“그럼! 노바에 있는 동안은 내가 재우지 뭐.”
“두 시간마다 깨니까 그때 일어나서 젖도 먹여 줘요.”
“응? 두 시간마다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젖은 안 나오는데 어떡하지? 아빠는 어떡하니? 레오나, 어떡하지?”
루산이 레오나를 보고 과장된 목소리로 당황한 연기를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덴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레오나가 잠들자 루산은 바덴의 말에 따라 아기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루산이 눈으로는 레오나를 내려다보며 바덴에게 말했다.
“변경 7구역에 대규모 웨이브가 발생해 주민들이 모두 변경 본부가 있는 오스나 시로 대피하고 난리가 났어요. 다행히 8구역 병력과 장비가 대거 투입되어 오스나 시 주위에 방벽을 쌓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개척촌과 개척 도시가 완전히 쓸려 버렸어요.”
“세상에!”
깜짝 놀란 바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꼭 불행한 일은 아니에요. 이번 웨이브로 인해 7구역은 변경 정책을 완전히 바꾸어 오히려 성장에 도움이 될 테니까.”
루산은 8구역 통치자와 7구역 통치자 사이에 합의한 내용과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변경 7구역의 새로운 개척과 운영 방안>
- 높고 튼튼한 성곽 도시 건설
- 성곽 도시들을 잇는 고가 도로 건설
- 변경 투어
- 농업 회사
“이 거대한 사업을 고슬라 그룹이 맡게 될 거예요. 물론 중간에 변경부에서 7구역에 실사를 나오고 문제를 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기가 조금 늦춰질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건 현재 7구역 통치자가 책임질 문제는 아니에요.”
“이런 경우에는 보통 최고 책임자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지는 거 아닌가요?”
“그렇기는 한데, 이번 경우는 아니에요. 어찌 보면 반란 사건이 터지고 나서 변경부에서 7구역을 너무 뒤집어 놔서 웨이브 대응 능력을 떨어뜨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현재 7구역 통치자를 몰아붙이지 못할 거예요. 불가항력이라고 결론을 내겠지. 그리고 어쨌든 새로운 변경 정책이 7구역과 필센 제국에 더 이익이 되니까.”
“그렇기는 해요.”
“새로운 7구역 건설에 드는 막대한 자금도 정부에 매달리지 않고 7구역과 8구역이 알아서 해결하기로 했으니 전쟁 비용으로 예산 편성에 애를 먹고 있는 정부로서는 굳이 나무랄 일이 아니죠. 괴수가 변경을 뚫고 일반 영토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괴수 부산물 생산과 수입이 줄어들지 않고 변경 수입이 늘어나는 일이니까 문제 삼지 않을 거예요.”
바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변경 정책을 수립한 7구역을 좋게 보지 않겠지만, 이미 일은 발생했고, 그 일이 불가항력적이고, 사후 대책이 훌륭하다면 결국은 루산의 아이디어대로 갈 것이다.
“변경 구역 가운게 가장 넓은 7구역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사업이에요. 전문가들이 설계를 해 봐야겠지만, 성곽 도시 최소 여덟 개, 공업 도시와 웨이브 시즌 때 가축 대피용 성채들도 여럿 지어야 하고, 농산물 창고나 농업 기계 창고로 사용할 농업 거점 성채도 최소 여덟 개 정도는 지어야 할 거예요. 그것들을 잇는 고가 도로도 차량이나 열차가 다닐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야 해요. 어마어마하죠?”
자신의 구상을 자랑하듯 말하는 루산의 모습을 보고 바덴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주민 수와 면적을 고려하면 사업 규모가 1억 골드를 가뿐히 넘기겠는데요?”
루산이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나 많이 들어요?”
“아니, 그 정도도 모르고 이 사업을 밀어붙여 두 변경 통치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신 거예요?”
“나야 뭐 아이디어만 낸 거고. 자금은 통치자들이 마련할 테고, 진행은 사업가가 할 거니까.”
루산이 멋쩍게 말했다.
바덴은 그 모습도 멋져 보였다.
“맞아요. 사업은 사업가가 하면 되죠. 통치자들도 당신의 설명을 듣고, 이건 된다! 하고 느낌이 팍 오니까 받아들인 거고요.”
그 말에 루산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매년 괴수들이 몰려오고 그것을 보기 위해 달려온 관광객들이 주민들과 함께 도시 성벽과 고가 도로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걸 상상하면 아주 재밌는 사업이 되겠어요.”
“할 수 있겠어요?”
“해야죠! 건설에만 1억 골드가 넘어가는 사업을 안 하면 어떤 사업을 하겠어요? 게다가 얼추 생각해 봐도 농업 회사 수익도 8구역보다 훨씬 높겠는데요? 변경 투어 수입은 말할 것도 없고요. 회사를 새로 만들어야겠어요.”
바덴의 머릿속에 ‘변경 7구역 쇄신·재건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슬라 그룹에 건설 회사는 없지만,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의 계획과 수행 전 과정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팀은 있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과 바람의 언덕 장원 별장을 시작으로 별장 사업, 브레이브 랜드 사업, 보헨 지역 개발 사업, 라벤스 지역 개발 사업, 농업 회사 사업, 아라드 왕국 재건 계획 등 크고 작은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시공은 토목 회사와 건설 회사를 구간별로 선정해 맡기면 된다.
어느 회사들을 선정하는 것이 좋을지 바덴이 사장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고 있을 때 루산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 7구역 재건 프로젝트는 변경 장악 계획의 일환일 뿐이에요.”
“······!”
“바덴, 당신이 전에 내게 말한 적이 있죠?”
“···네.”
표현은 조금 달랐다.
바덴은 변경 8구역과 아라드 변경을 장악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괴수 부산물 가격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루산은 가격 결정권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게 하고 세상을 멈출 수 있는 힘을 틀어쥘 거예요.”
바덴에게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사님 뜻대로 하세요.”
바덴이 루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루산은 오른손으로 바덴의 어깨를 감싸고 왼손으로는 쌔근쌔근 자고 있는 레오나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
루산이 집에서 아기를 보는 사이, 바덴은 오랜만에 외출했다.
상무대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몸이 많이 불편하면 병문안을 위해 찾아가겠다고까지 말하자 만나자는 요청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계절이지만, 바덴은 바람을 쐴 때마다 몸이 시린 듯이 아파서 따뜻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동안 오베론 공작을 상대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상무대신의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늘어 있었다.
“고슬라 사장, 몸은 좀 괜찮습니까?”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대체 어디가 안 좋았던 겁니까?”
사실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로로 몸이 많이 축나서 활동이 어려웠습니다.”
“하긴, 보통 사람은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사업들을 많이도 하셨지요.”
“그래서 이번 일을 겪으며 손을 많이 뗐습니다. 계열사 사장들에게 책임지라고 했지요.”
“잘했어요. 건강이 우선이죠. 건강 잃으면 다 잃는 거예요.”
“대신님은 어떠신가요? 전보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은데······.”
“하하, 그게 티가 납니까? 좀 빠졌지요. 그래도 아직은 끄떡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대신님만 믿고 있거든요.”
“하하하!”
두 사람은 적당히 안부를 묻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문제 있지 않습니까?”
“네.”
필센 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이 될 것이라는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
바덴은 굳이 이 사업에 끼어들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미 상무대신에게 답한 바 있었다.
고슬라 그룹이 지금까지 수행해 온 개발 프로젝트는 바덴과 기획 팀이 계획을 짜고 구상을 한 뒤, 시공 단계에서 건설 회사를 선정해 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그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회원들 가운데 건설 회사 사장들도 많았기에 굳이 새롭게 건설 회사를 만들어 그들과 경쟁하여 얼굴을 붉히고 싶지도 않았다.
오베론 공작이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에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업가들을 과도하게 밀어주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시도한다 해도 굳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뛰어들어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사업에 참여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건설 회사들도 많지 않겠어요?”
“그렇겠죠.”
“그 회사들도 어떻게든 그 큰 사업에 끼고 싶어 여기저기 힘을 쓴 모양이에요. 그러다 몇몇이 오베론 공작을 상대해 줄 사람을 찾다가 막심 전하에게까지 손을 뻗은 모양이에요.”
“막심 전하라면······?”
“노바에 남아 있는 둘째 황자시죠.”
“아!”
바덴도 둘째 황자가 노바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황위를 이을 황자가 아니기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국가 운영을 잘 하도록 제왕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가 동방으로 순시를 떠난 기간에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재상을 지정한 것이다.
다만, 황태자 다음으로 제위 승계 순위가 높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노바에 남아 있으면서 황제의 친아들로서 재상의 전횡을 견제하라는 의도는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요?”
바덴이 물었다.
“막심 전하는 자유분방한 분입니다. 각료 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대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더군요.”
상무대신의 말에 바덴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다음에 어떤 충격적인 상황이 이어질지 귀를 쫑긋 세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