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또 다른 말이 등장한 건 좋은 일이죠
329. 또 다른 말이 등장한 건 좋은 일이죠
각료 회의란 재상의 주재로 대신들이 정부 각 부처의 업무를 논의하는 곳.
여기에서 논의된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거나 황제의 지시 사항을 여기에서 논의하기에 황제는 참석하지 않는다.
이런 자리에 필센 제국의 두 번째 황자인 막심 볼프스 마이센이 들어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와중에도 오베론 공작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게 예를 갖추고 물었다.
“전하, 어쩐 일이십니까?”
“아,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회의 중이었네요.”
막심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오베론 공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각료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정부 청사에 들어왔을 때는 물론이고 각료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에 밖에 있는 관리들이 미리 전달했을 것이다.
“어쩐 일이신지요?”
오베론 공작이 다시 물었다.
“재상께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럼 잠시 옆방으로 가시겠습니까?”
“다른 분들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요. 다들 나랏일을 하시는 바쁜 분들인데. 그냥 여기서 짧게 하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상관없습니다.”
각료들 앞에서 재상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두가 궁금해할 때 막스가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정사에 관심이 없어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나에게까지 말이 들어올 정도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적당히 해 먹어야지!”
황자의 입에서 나온 표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막심은 할 말을 해서 후련하다는 듯 몸을 돌리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오베론 공작이 막심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전하! 지금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막심이 다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재상께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자고로 왕이라 해도 신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여러 대신들 앞에서 저를 이렇게 모욕해도 되는 것입니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오베론 공작의 태도에 회의실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고, 다른 대신들은 더욱 얼어붙어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지나치다? 모욕이다?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에 모두 재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들만 사업자로 선정해 놓고도 이런 말을 하다니, 과연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까 선정되지 못하고 탈락한 자들이 전하께 저에 대한 악담을 한 것이로군요.”
막심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베론 공작 역시 굳이 막심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만일 제가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에 참여할 업체 선정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면 재상직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오베론 공작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이번에는 막심이 움찔했다.
싸움은 상호적인 것.
상대가 방어를 해냈다면 그 공격의 충격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오베론 공작의 부정을 증명하지 못하면 이번에는 막심이 이 나라의 재상을 함부로 모함하고 모욕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판을 벌린 마당이라 막심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들은 이야기가 있었고 나름 조사도 해 보았다.
“역시 시원하시군요! 세간에 떠도는 재상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 전반에 대해 철저히 검증해 보기로 하지요.”
서로를 바라보는 막심과 오베론 공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
상무대신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황제 폐하께서 동방 순시로 자리를 비우신 상황에서 국정을 책임지는 재상과 황궁을 책임지는 둘째 황자가 충돌했다는 소문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군요.”
함구령이 떨어졌다지만, 상무대신이 자신에게 말한 것과 같이 다른 대신들이나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관료들도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말했을 것이라고 바덴은 생각했다.
“사실 전하께서 성급하셨지요. 선정 과정에서 부정한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기준이야 있지만, 선정하는 사람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도 있는 거거든요.”
“그렇죠.”
사원을 뽑을 때에도 의지나 열정 같은 부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업체들 가운데 거래처를 선정할 때에도 객관적인 지표 외에 업체 사장이나 담당 직원의 태도, 말투 등에서 느껴지는 신뢰도에 추가점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에서 발주하는 사업은 더 엄격한 기준이 있지만, 판단 기준이 언제나 양으로 완벽히 제시될 수는 없었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금 신이 나셨던 것 같아요.”
“네?”
“황제 폐하와 형님이 없는 노바를 잘 지켜 보겠다는 의욕 같은 게 과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쩌면 황제 폐하께 인정받고 싶다는 의지도 발동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과하게 오베론 공작을 들이받은 겁니다. 그러나 노회한 공작이 황제 폐하도 아니고 황태자도 아닌 일개 황자에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겠죠.”
바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적으로는 너무나 서투르고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무모함과 서투름이 때로는 큰일을 내는 것 아니겠어요? 오늘날 누가 오베론 공작에게 그렇게 함부로 하겠어요? 얼마나 시원하던지, 하하하!”
상무대신이 그날 오베론 공작의 분한 표정을 떠올리고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바덴은 똑같이 웃을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어쨌든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은 검증 과정을 밟게 되었어요. 문제는 아무도 그 검증 과정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겠죠.”
검증 결과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지으면 오베론 공작의 미움을 사게 되고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면 둘째 황자와 척을 지게 된다.
상무대신보다 오베론 공작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 바덴이 생각할 때, 오베론 공작이 재상직을 걸고 벌을 받겠다고 호언한 이유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와 밀접하게 엮여 있는 오베론 공작은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한 정도로는 절대 황제에게 버림을 받지 않는다.
정확한 사연을 모르더라도 관료들 역시 황제와 재상의 끈끈한 관계에 대해 느끼고 있을 것이기에 오베론 공작에게 해가 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황자에게 해가 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황태자는 아닐지라도 현 황제의 친아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는 결론을 내 버린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막심 전하께서 나를 부르셔서 검증을 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거절했습니다.”
“네.”
바덴은 상무대신을 충분히 이해했다.
상무대신 역시 이 일에 끼어들면 정치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베론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평을 듣는 상무대신조차 하지 않으려는 일이니 누가 나서겠는가?
바덴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막심 전하께서는 재상에게 호통을 한 번 쳐서 관료들 기강을 바로 잡고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데, 재상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는 바람에 그게 안 되니 곤란한 지경에 빠지신 거로군요?”
“바로 그겁니다!”
“막심 전하로서는 이 일을 타개할 방법이 두 가지가 있겠네요.”
“뭡니까, 그게?”
상무대신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는 둘째 황자의 제안을 거절하여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황자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조언해 주고 싶었다.
“첫째는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을 검증한 결과가 애매하게 나는 거예요. 오베론 공작이 업체 선정 과정에서 부정하게 개입한 부분은 있지만, 직접 개입한 게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손을 썼다든지 개입 정도가 미미해서 탓하기 애매하다든지 하는 거죠. 오베론 공작도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지만, 막심 황자도 별일 아닌 것으로 관료들 앞에서 재상을 면박 준 것을 사과해야 할 정도 말이에요. 서로 사과하고 없는 일로 하고 넘어가는 거죠.”
“음!”
“둘 다 승자는 아니지만 패자도 아닌 거죠. 동부 공업 지구 사업은 그대로 진행 됩니다. 다만, 이후부터 오베론 공작이 조금은 조심을 하겠죠.”
상무대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막심 황자가 오베론 공작을 더 치명적인 사안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상무대신이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요?”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에 개입한 정도로는 절대 거꾸러뜨릴 수 없어요. 모르긴 몰라도 업체 선정 과정에서 공작이 직접 개입했겠어요? 아랫사람들을 시켰거나 알아서 했겠죠. 그의 책임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이권 다툼으로 공작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상무대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서투르고 무모하지만 이왕 충돌했고,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쓰러진다고 생각해 기어이 해치우고 말겠다고 생각하신다면, 더 치명적인 내용을 찾아 공격해야죠.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멀리 떠나 계신 지금이 적기인지도 모릅니다.”
“······?”
“황제 폐하께서는 오베론 공작을 쳐낼 생각이 아예 없으실지도 모르니까요.”
황제와 공작.
알력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반 황제 때부터 구상한 대제국을 함께 만들어 가는 동지였다.
구귀족파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계책을 오랜 세월 공유하고 실행하면서 필센 제국의 질서를 새롭게 확립한 협력자들인 것이다.
“치명적인 내용이라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덴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최소한 상무대신보다는 오베론 공작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상황에서 막심 황자와 오베론 공작의 갈등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 알고 있는 내용이 과연 위력을 발휘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산과도 상의해 봐야 했고, 막심 황자의 됨됨이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아 봐야 했다.
“제가 아는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내용일 테고, 그건 막심 전하께서 알아보실 문제가 아닐까요?”
바덴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바덴은 집으로 돌아왔다.
루산은 레오나에게 줄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다.
색깔과 모델이 다른 여러 개의 레오파드 모형 인형으로 모빌을 만들어 누워 있는 레오나의 머리 위에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덴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오늘 상무대신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으로는 모빌의 적당한 높이를 찾기 위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고 귀로는 바덴의 이야기를 듣던 루산이 마침내 적당한 높이로 고정을 마치고 모빌을 돌렸다.
레오나가 돌아가는 인형들을 좇아 눈알을 굴렸다.
“어때, 아빠 솜씨가? 다른 것도 만들어 줄까?”
그러나 레오나는 대답 대신 귀엽고 앙증맞은 인형들을 눈으로 따라가느라 바빴다.
루산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베론 공작을 공략할 또 다른 말이 등장한 것은 좋은 일이죠.”
“알아볼게요.”
“무리하지는 말아요.”
“네.”
바덴이 루산의 옆에 나란히 앉아 회전 속도가 떨어지던 모빌을 툭 건드려 다시 빠르게 돌렸다.
레오나가 레오파드 인형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지켜보던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