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난 이렇게 컸는데, 넌?
333. 난 이렇게 컸는데, 넌?
“지금 돌이킬 수 없다고 했습니까?”
막심이 상무대신 벤야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되물었다.
마치 황야를 떠도는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
“네? 네.”
벤야민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늘 오베론 공작, 오베론 공작, 하기에 그저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어요.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니 모든 관리들이 그 앞에서 설설 기더군요.”
“그런 것은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내가 각료 회이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갑자기 들어가 그를 모욕한 부분은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지만, 그 뒤에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 검증을 위한 조직 구성이 지지부진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 아닙니까!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
“오베론 공작의 힘이 너무 커서 황제 폐하께서 잠시 궁을 떠나시자마자 전횡을 저지르고 있단 말입니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눈치를 볼 정도로 힘이 세다는 게 문제란 말이에요! 이 나라가 그의 나라입니까?”
이게 막심이 생각하는 첫 번째 문제였다.
“둘째, 관료들이 옳고 그름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자기 보신, 자기 이익에 따라 눈치를 보고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어릴 때 배우기로는 황제 앞이라도 옳은 말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맞습니까?”
벤야민은 필센 제국의 관리들이 그 정도로 불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황족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돌이킬 수 없다? 마치 내가 오베론 공작을 상대로 반역을 결심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처럼 말하는군요.”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뭡니까? 처음에 내가 각료 회의장에 갔을 때 여러 대신들 앞에서 재상을 다소 모욕한 일이 잘못되었음을 간하고 재개발 사업 검증을 철저히 하겠다고 나선 관리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상무대신 역시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뭐, 더 긴 말이 필요하겠어요? 내가 현실 정치를 몰라 이러는 것이겠지요.”
상무대신은 세련되지 않게 피아도 식별하지 못 하고 분노를 마구 터뜨리는 황자 앞에 세련된 말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동안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는 동안 황궁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에 따를 뿐이지요. 돌이킬 수 없다? 하! 한번 해 봅시다!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오베론 공작도 오베론 공작이지만, 관리들 정신 상태가 썩어 빠졌어요. 전선에서는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어느 줄을 타는 게 보신에 유리할지 따지고 있는 꼴이라니, 쯧쯧쯧!”
그 순간, 벤야민은 막심 황자가 오베론 공작을 도발한 일이 정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황제가 미리 계획한 일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필센 제국은 원래 큰 나라였으나 대전쟁에 승리하고 아우로라 대륙의 많은 나라들을 다스리게 된다면 지급보다 몇 배는 더 커진다.
그런 거대 제국에서는 관리들이 수많은 이권과 청탁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든 시비를 걸어 오베론 공작을 쳐내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보신주의를 타파해 새로운 제국을 세워 나가려는 황제의 큰 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막심이 각료 회의장에 난입해 오베론 공작이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매도한 것은 순전히 앞뒤 재지 않는 막심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황궁에 분명히 자신이 있는데, 오베론 공작이 자신에게 전혀 상의하지 않고 홀로 국정을 처리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때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에서 탈락한 사업자들이 부정이 개입했다고 탄원을 해 와 괘씸함과 정의감에 저지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오베론 공작이 고개를 빳빳이 들며 반박하고, 관리들이 몸을 사리는 바람에 검증단이 제대로 꾸며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
이 나라가 과연 마이센 황가의 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황자인 자신의 권위가 전혀 서지 않았다.
그에 분개하고 있을 때 그나마 반오베론 공작 파에 속한다는 상무대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을 하자 꾹 참고 있던 화가 터져 버린 것이다.
물론 막심이 전적으로 이런 감정들에 휘둘려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아우로라 대륙으로 순시를 떠나기 전에 막심에게 황궁을 맡기며 당부한 말이 있었다.
“이참에 국정을 좀 배우도록 해라.”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전쟁이 끝나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아우로라 대륙의 땅을 일정 기간 나눠 주어 다스리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니?”
“아니오.”
“쯧쯧쯧! 어쨌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라니? 신하들에게도 나눠 주는데 자식인 너에게 땅을 못 주겠니? 그리고 옆에 황족이 딱 박혀 있어야 신하들이 마음대로 못할 거 아니냐?”
“아!”
“그런 줄 알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관심을 갖고 좀 배우란 말이다.”
“예!”
프리드리히 황제도 이런 사건이 벌어지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국정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들은 막심은 정부 현안에 관심을 갖다가 재개발 사업 부정 문제를 알게 되었고,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줄을 몰랐기에 과감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상무대신의 보고를 받은 막심은 곧바로 내무대신과 경찰청장, 근위대 부대장 - 근위대장은 황제를 따라갔다 - 과 수도 군단 사령관을 호출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전하?”
의아해하는 신하들에게 막심이 말했다.
“국가사업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려야 하다니, 통탄할 지경입니다.”
“예?”
“부당하게 타인을 위협하고 해를 가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체포할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특히 신문의 언론 활동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거나 거짓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는 이 나라를 더욱 건강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를 위협하는 행위는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
갑자기 불려온 신하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막심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막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은, 신문 자유에 관한 포고령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과연 둘째 황자의 포고령 발령이 적법한 것인지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군대와 경찰의 황가에 대한 충성심은 강력했기에 이 포고령의 적법성 논쟁은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한참 후에야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신문의 자유에 관한 포고령을 가장 반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문사들이었다.
모든 신문사에서 이 포고령의 의의를 분석해서 기사로 실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경마 신문에서 놀라운 기사를 처음으로 실었다.
<충격! 노바의 밤을 지배하는 데사우로 형제에게 누가 자금을 대었는가?>
데사우로 형제 조직에 목숨을 걸고 잠입 취재!!
세상을 흔들 만한 소식이었다.
어느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이 어느 술집에서 몇 시에 데사우로 형제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마치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것처럼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제공한 정보에 기초해 흥미진진하게 재구성된 내용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오직 기사의 내용만 접할 뿐 그 과정을 알 방법은 없었다.
경마 신문을 보지 않는 오베론 공작이 이 이야기를 접한 것은 기사가 나오고 사흘이 지난 뒤였다.
오베론 공작은 경마 신문에 기사가 나온 다음 날, <필센 데일리>와 <노바 신문>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먼저 접했다.
이 두 신문은 유력 일간지라 자극적이고 흥미롭게 써 나가는 경마 신문보다는 격조가 있고 차분한 어조로 기술되었지만, 그렇기에 더 사실적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오베론 공작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
<필센 제국 영토의 8분에 1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에 기반을 둔 유력 귀족 가문은 왜 노바의 밤을 지배하려 했는가?>
누가 봐도 오베론 가문임을 알 수 있지만,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은 기사들이 나오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오베론 가문과 그 가문의 사람들을 정확히 거론하기 시작했다.
<루트 오베론과 데사우로 형제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오베론 가문의 자금이 얼마나 노바의 유흥가로 흘러들었는가?>
<특종: 유흥가 자금은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사채?>
<마젠스 자작, 뷔르츠 건설의 사장을 만나 막대한 자금을 안기고 1년 만에 이 회사를 가로채다!>
<유흥가 장악에서 사채업 그리고 밀수까지, 끝없는 검은 그림자>
루산은 에밀리가 거실 테이블에 보기 좋게 깔아 놓은 여러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하고 있는 기사들을 쭉 훑어본 뒤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나갔다.
노바에서 발행된 신문이 변경으로 배달되기까지는 사흘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지, 바덴이 혹시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변경에서 자신의 일을 해 나가면서 신문 기사와 바덴이 보낸 편지를 놓치지 않고 읽어 나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침 식사 준비 끝났어요, 기사님. 식기 전에 드세요.”
신문을 모두 읽고 루산은 이제는 요리 실력이 많이 나아진 에밀리가 차려 준 아침 식사를 먹고 출근했다.
“갔다 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 알았지?”
“네, 기사님.”
“다녀오세요, 기사님!”
누나를 따라 찰스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루산은 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이크와 함께 오랜만에 탐탐을 타고 라돔 시까지 달렸다.
회의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라돔 시에 가려면 레이크 시티에서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르지만, 많이 변화한 8구역의 풍경을 제대로 살필 기회가 없어 직접 보고자 한 것이다.
반달 호수 지역의 풍경은 개척이 진행되기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연적 조경을 중시하는 바덴의 뜻에 따라 반달 농업 회사에서 개척하는 농지와 마을은 나무숲과 갈대숲을 곳곳에 남기는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었음에도 전과 비교하면 드넓은 갈대숲은 거의 사라지고 너른 농토가 반듯반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도로 양옆으로는 보기 좋은 가로수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이것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농토에 심어져 있는 밀들이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풍경도 마음을 풍성하고 따뜻하게 했기 때문이다.
레인보우 시티도 레이크 시티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가프 마법 연구소의 규모가 더욱 커짐에 따라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레인보우 시티를 지나 이전 델타 기지였던 개척촌 역시 전과 비할 수 없이 집들이 들어서고 농지가 전보다 훨씬 넓어져 있었다.
화물을 잔뜩 실은 마나 열차가 도로 옆으로 지나가고, 도로에는 시바렌 운송의 화물차 외에도 다른 화물차들이 돌아다녔다.
변경 8구역의 풍경을 이토록 크게 변화시킨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루산은 뿌듯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자연을 몇 년 만에 이토록 바꿔 냈다는 자신감, 원시의 땅도 바꿨는데 인간 사회라고 바꾸지 못할쏘냐 하는 패기, 이렇게 바꾸어 봤자 보고 싶은 어린 딸도 매일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이것을 다 누리지 못하고 늙어 죽을 것이라는 유한성에 대한 원망.
이런 것들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더 감상에 젖고 더 상념에 빠지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바이크.”
“네, 대장님!”
“그동안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이번에 회의가 열릴 텐데, 그 안건 중에 3전단 신설에 대한 내용이 있거든. 나는 굳이 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승진할 자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어쨌든 자리가 새로 생기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 굳이 빠질 필요는 없지. 3전단으로 가라.”
“네? 제가 3전단장이 되는 건가요?”
“뭐? 하하하!”
루산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역시 바이크와 함께 다니는 것은 재미있었다. 이런 바이크와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아직 캡틴도 안 해 봤으면서 부슨 전단장이야? 캡틴부터 시작해. 3전단은 규모가 작게 시작할 테니 넌 3전단과 함께 성장하게 될 거야. 이삼 년 후에 전대장이 되겠지.”
“에이! 전단장도 안 시켜 줄 거면 그냥 2전단에 남을래요. 대장님 따라다니면 재밌는 일도 많고 돈도 많이 버는데 굳이 신설 부대로 가고 싶지는 않거든요.”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이크였기에 그리 밉지 않았다.
“야, 바이크!”
“예?”
“네가 볼 때 나는 점점 커 나가고 있니 아니면 처음 봤을 때 그대로니?”
“대장님이 캡틴 때 처음 봤으니까 엄청나게 크셨죠. 공식적으로도 변경에서 가장 크게 성공하셨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말도 못하죠.”
비공식적이라는 것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 구 귀족파 파일럿들, 이스타드 변경 출신 파일럿들, 아라드 파일럿들, 부르사 전사들을 포함한 아라드 변경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었다.
“난 이렇게 컸는데, 넌?”
“예?”
“난 나를 도울 수 있는 큰 사람이 필요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바이크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웠다.
“···예!”
“3전단으로 갈래, 아니면 2전단에 남을래?”
“가겠습니다!”
바이크가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바이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시에나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