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죽은 자가 말하는 거 봤나?
335. 죽은 자가 말하는 거 봤나?
오베론 공작이 루트를 불렀다.
루트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버지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기에 미리 답변을 준비하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버지 서재로 들어갔다.
“요새 신문들이 연일 우리 가문을 때리고 있더구나. 특히 네 이름이 자주 거론되던데, 할 말이 있느냐?”
오베론 공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루트보다는 둘째 황자 막심을 향한 분노였다.
“신문 기자들이 감히 우리 가문을 겨냥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일의 순서를 보십시오. 막심 전하가 권한도 없이 신문 자유에 관한 포고령을 공포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신문에 대한 공격을 막는다고 한 뒤에 제 이름이 실린 기사가 나왔습니다. 누구 소행인지 빤하지 않습니까?”
“흠!”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 문제로 아버지와 충돌한 일로 앙심을 품고 벌인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오베론 공작은 루트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신문 기사에서 너에 대해 거론한 내용들은 다 거짓이다, 이 말이냐?”
여기에 대한 답변이 중요했다.
“물론 약간의 사실은 포함돼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네가 사실대로 말해야 내가 적절히 대응할 수가 있다.”
“네. 데사우로 형제를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 반란 공작을 시행할 때부터 부리던 자들이라 몇 번 만나 일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가공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무지한 백성들은 잘난 사람, 고결한 자, 영웅이 바닥으로 추락하기를 바라는 비열한 습성이 있으니까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나는 가문의 재산 내역을 샅샅이 훑어 볼 것이야.”
오베론 공작의 으름장에도 루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해 보십시오.”
마젠스 자작이 장담했다.
오베론 공단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재산을 빼돌릴 때 서류상으로 완벽하게 처리해 두었다고.
물론 새로운 사업으로 취득한 재산을 모두 살피다 보면 루트 오베론을 향하는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사실에 기초하여 대응하리라는 것을 알고 저렇게 나오는 겁니다. 사실을 검증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 사이 우리는 저쪽의 허위 공격에 만신창이가 돼 있을 것입니다. 훗날 사실 검증을 마치고 허위 사실임이 밝혀지더라도 회복하기에는 늦겠지요.”
“음······!”
“정치에는 정치로, 모략에는 모략으로 맞서야죠.”
오베론 공작은 루트의 말이 옳다 여겼다.
루트와 마젠스 자작이 자신의 지시 없이 허튼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물론 확인해 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자식과 오랜 가신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네 생각에는 어찌 대응하는 것이 좋겠느냐?”
오베론 공작의 어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저쪽에서 아버지의 명성을 더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리 아니라고 강조해 봐야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고결한 영웅의 악행과 이중성을 믿고자 하는 저열함이 있으니까요. 이때는 우리도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상대방을 흠집 내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죠.”
오베론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아라.”
“우리도 신문을 이용하는 겁니다. 오베론 가문을 공격하는 기사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따져 보는 것이죠. 황제가 순시를 떠나고 재상이 국정을 도맡은 데 자존심이 상한 둘째 황자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재상을 비난한다는 내용을 싣는 겁니다. 황태자는 대전쟁이 발발할 때부터 최전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고, 황제 또한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으로 갔는데, 평생을 놀고먹던 둘째 황자가 부친과 형이 없는 틈에 황제 노릇을 해 보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재상에게 부도덕한 이미지를 씌워 공격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몰아가는 것이죠.”
“음!”
오베론 공작은 루트에게 감탄했다.
“우리 가문의 부도덕성에 대한 고발 기사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둘째 황자의 치기 어린 질투심과 권력욕이 국정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고 쟁점을 전환하겠다는 말이로구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신문들이 우리 이야기를 실어 주겠느냐?”
“안 실어 주면 만들면 되지요.”
“사람들이 이름 없는 신문을 사서 보겠느냐?”
“무료로 뿌리면 되지요. 뭐가 어렵습니까?”
“그렇구나!”
오베론 공작은 연신 감탄했다.
“막심 황자는 신문의 자유에 관한 포고령으로 아버지를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겁니다. 기사의 진위 검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막심 황자가 기사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해당 신문사를 폐쇄하거나 기자를 잡아간다면 자신이 만든 법을 스스로 어기는 셈이 되니 그의 허물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죠.”
“네 말이 옳다!”
“신문사를 폐쇄하면 사람들을 사서 벽보를 붙이면 됩니다. 그걸 탄압하면 할수록 막심 황자에 대한 민심은 점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한 맞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도 상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어쨌든 군과 경찰을 휘어잡고 있지 않습니까? 신문을 통한 공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강제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쓰는 것도 생각해 보셔야 한다는 겁니다.”
“······!”
오베론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막심이 군을 장악했다지만, 수도 군단과 근위대 병력 상당수가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상태입니다. 노바에 병력이 얼마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우로라 대륙에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200만 대군이 있지 않느냐?”
“바다 건너에 있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일입니다. 수송선의 절반 이상이 우리 오베론 해운의 배들 아닙니까?”
“음!”
“해군을 장악하고, 장악에 실패하면 오베론 해운의 배들에 마나포를 장착해 필센 해군을 막으면 됩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필센 제국군은 아우로라 대륙에 있습니다. 아우로라 연합이라고 본국의 보급 없이 고립된 필센 제국군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바보들만 있지는 않겠지요.”
“······!”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영웅답게 당당히 대응하십시오.”
‘영웅답게 당당히’라는 말이 오베론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똑똑한 아들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알았다. 나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수행하며 정부의 관리들과 군대, 경찰을 내 편으로 돌려 볼 테니 너는 신문을 이용해 민심을 잡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오베론 공작은 루트를 물리고 대책 회의를 위해 다른 가신들과 참모들을 불렀다.
서재를 나선 루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도 일단 큰 고비는 넘겼다.
아버지를 속여 넘기기 위해 준비한 대답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이 방향이 맞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지!’
그는 자신이 마련한 계책에 만족하며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는 도중에 심복인 호위 기사에게 나직이 말했다.
“데사우로 형제가 경찰 손에 넘어가면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지.”
“어떻게 할까요?”
“죽은 자가 말하는 거 봤나?”
“······!”
“그동안 쏟아부은 게 아까우니 그 밑에서 일하던 녀석들 중에 입이 무겁고 똘똘한 자가 있으면 앉히도록 해. 나머지 간부급은 모조리 제거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궁 근처에 대기시켜 놓은 기사들 있지?”
“네!”
오베론 가문에서 길러낸 기사들로 파워 아머를 착용하고 언제든 황궁을 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은 병력을 말하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루트는 심복인 비서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노바에 신문사를 세운다. 인쇄소를 사들이고, 기자들을 모집해. 자격증 같은 건 필요 없어. 자극적인 글을 쓸 줄 아는 녀석들이면 충분해. 돈 받고 허위 기사를 쓰다 잘린 놈들이면 더욱 좋겠지. 일단 오베론 지방에 있는 신문사에서도 글 잘 쓰는 기자들을 데려와. 그리고 신문을 배포할 사람들도 잔뜩 모아야 할 거야. 돈은 상관하지 마. 막심 황자를 개망나니로 만들어 보는 거야.”
비서 레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네!”
오랫동안 아버지를 대신해 반란 계획을 총괄하며 구귀족파 기사들을 유인하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을 속여 온 루트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고 속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루트가 눈을 번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신문의 자유 좋아하네! 넌 금단의 상자를 연 거야.”
막심 황자 덕분에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이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훨씬 단축될 것 같았다.
***
노바의 보통 사람들은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은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경찰, 기자, 관리, 사업가, 그리고 폭력배들이었다.
노바 경찰청 형사국 경찰들은 지난 2년 동안 암흑가 조직들을 수사하고 계보를 파악해 온 국장 그리마의 지휘에 따라 매일매일 폭력 조직을 소탕하느라 집에 돌아갈 틈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사건이 오베론 공작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고, 내무대신과 경찰청장이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 사건을 엄정히 처리할 것을 특별히 강조했기에 칼날 위에 선 심정으로 사건을 다루어 나갔다.
기자들은 이 노바 경찰청 형사국에서 나온 소스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다 간간이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으로 오베론 공작가를 공격하면서 점점 희열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가 일어나면서 경찰들이 기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기사 내용을 검열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신문 자유에 관한 포고령은 그들이 자유롭게 펜을 놀리는 데 날개를 달아 주어 오베론 공작뿐 아니라 정부, 귀족, 경찰의 부정부패에 대한 내용도 과감하게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둘째 황자와 재상의 싸움이 점점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는 것 같아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신문의 내용에 따르면 오베론 공작은 너무나 부도덕한 사람이라 재상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관리들의 정점에 있는 재상을 함부로 모욕한 황자의 편을 드는 것도 꺼림칙했다.
어서 빨리 이 대립과 갈등이 종식되기만을 기도했다.
사업가들은 신문에서 연일 다루고 있는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의 문제와 오베론 공작의 사채업, 밀수, 유흥가 장악 소식에 놀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오베론 공작과 얽혀 있을지도 모르고, 이번 사태로 인해 정부나 기자의 검증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배들.
경찰들이 연일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함부로 외출하기도 어려웠다.
구름이 잔뜩 끼여 있는 밤.
고급 주점 골목 가까이에 근처 상점들이 사용한 물을 흘려보내는 하수도로 두 사람이 몸을 낮추고 기어가고 있었다.
상처를 입었는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덮개가 덮여 있는 하수도 중간중간에 난 구멍으로 가로등 불빛이 미미하게 들어와 그들의 얼굴이 간간이 드러났다.
데사우로 형제였다.
“개새끼들!”
형이 짓씹듯 내뱉었다.
“조용히 해!”
동생이 억눌린 목소리로 형을 제지했다.
그러나 형은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기어이 한 소리 했다.
“개처럼 부려 먹고 이렇게 버리겠다고?”
오늘 밤에 습격한 자들은 경찰이 아니었다.
경찰은 체포하려 하지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 죽이려 했다.
폭력배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솜씨!
기사들이었다.
누구 소행인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부하들이 몸을 던져 막아 주었기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몸에서도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여 버린다!”
“조용히 해!”
“잘근잘근 씹어 먹을 테다!”
“조용히 하래도!”
그들은 복수심과 생존 본능에 몸을 맡기고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도를 계속 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