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따를 테니 뜻대로 하라
342. 따를 테니 뜻대로 하라
루산이 퇴근했을 때 에밀리와 찰스가 유난히 호들갑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기사님, 기사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기사님의 부하라고 해서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래? 잘했다.”
루산이 궁금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한 남자가 루산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산을 대신해 가프 용병단을 지휘하여 부르사 왕국 통일 전쟁을 수행해 온 미켈 슐츠였다.
“대장님.”
미켈이 반갑게 루산을 불렀다.
루산은 좋은 소식임을 직감했다.
그는 먼저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네, 기사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는 찰스를 에밀리가 재촉해 돌아갔다.
“대장님, 부르사 통일 전쟁이 끝났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슐츠 경!”
루산이 오랜만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미켈도 검게 탄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고생이랄 게 있나요. 이미 다 끝난 싸움, 마무리만 하다 온 건데요.”
“그래도 타국에서 수행하는 전쟁이 어디 쉽겠어요? 앉으세요.”
“네, 대장님.”
루산은 냉각기에서 시원한 음료수 두 병을 직접 꺼내 와 하나는 미켈에게 주고 하나는 자기가 뚜껑을 따서 마셨다.
미켈이 루산을 따라 뚜껑을 열고 과즙 음료를 마셨다.
반달 식품에서 새로 나온,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음료에 미켈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병을 내려놓고 보고했다.
“바르나 왕국에서 구출한 귀족 기사들을 포함하여 남은 병력 전원 철수했습니다. 사망자는 없고 다섯 명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좀 했는데, 지금은 다 회복된 상태입니다.”
“다행이군요.”
아무리 잔당 소탕 임무라 해도 사망자도 없고 부상자도 대단하지 않다는 것은 미켈 슐츠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에 함께 배를 타고 온 부르사 전사 포로가 50여 명, 그 가족들이 300명 가까이 됩니다. 아라드 변경에서 확인해 보니 그동안 데려온 부르사 전사들이 300여 명이나 되더군요. 그중에서 당장 현역으로 뛸 만한 멕 나이트 파일럿은 80명 정도, 나머지는 나이가 어리고 멕 나이트 경험이 부족해 당장은 어렵지만 충분히 파일럿 자원으로 활용 가능해 보였습니다.”
아라드 변경에는 파일럿이 많이 필요했다.
포로로 잡혀 온 부르사 전사들은 단기간에 넓게 확대된 아라드 변경 개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라드 변경에는 워낙 출신이 다양한 파일럿들이 많아 통제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잘 다스려 놓으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미켈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남아 있는 멕 나이트는 므라드에게 모두 넘기고, 그에 상응하는 가액을 확인받았습니다. 여기······.”
미켈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루산에게 내밀었다.
부르사 국왕의 조카이자 실세인 므라드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였다.
루산은 봉투를 열어 금액을 대강 확인하고 내려놓았다.
“잘했습니다.”
부르사 왕국은 가난하여 용병을 고용해도 지급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멕 나이트 판매 금액과 용병 고용 대금은 피닉스 제철로부터 받고 피닉스 제철은 그에 상응하는 부르사 왕국 개발권을 므라드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일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루산은 피닉스 제철로부터 막대한 금액을 받게 되었다.
“므라드가 대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왜요?”
“앞으로 필센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게 될 때 다리 역할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므라드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필센 제국은 이미 아우로라 주요 국가들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므라드는 루산을 필센 제국에서 부르사 왕국에 파견한 특수 요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루산이 자신의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한 적은 없었고 오히려 나중에 필센 제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게 될 때 이번 가프 용병단 개입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주변에 새로이 자리 잡은 강대국과 어떻게든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부르사 왕국으로서는 루산이 거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했다.
루산은 부르사 왕국과 필센 제국 사이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부르사 왕국은, 피닉스 제철이 철광석을 독점하고 고슬라 그룹이 왕국 전체의 개발 프로젝트를 장악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공연히 더 나섰다가는 정체를 들키게 되고,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볼 것 같았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었다고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 방문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미켈이 다시 음료수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신문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루산도 신문 기사에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대답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죠. 황제가 동방으로 순시를 떠나고, 오베론 공작과 막심 황자가 노바에 남아 있다 힘겨루기를 하게 됐는데, 막심 황자가 오베론 공작의 군기를 잡으려 하다 역으로 당했어요. 오베론 공작의 아들 루트가 병력을 동원해 황궁을 점령하고 막심을 비롯한 황족들을 구금한 거예요.”
“······!”
“그런데 오베론 공작은 그 병력을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라고 세상을 속이고 있죠. 신문들은 막심 황자가 쓸데없이 오베론 공작을 견제하느라 병력을 함부로 빼돌린 바람에 특작 부대가 노바로 침투해 황궁을 장악한 것으로 기사를 내고 있어요. 오베론 공작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하고 남방군을 새로 조직해 노바로 불러올렸죠. 황제가 동방으로 떠나고 없는 틈에 비상 대권을 쥐고 필센 제국을 장악하려는 거예요.”
“흐음!”
루산의 말을 듣고 나서야 미켈은 신문 기사들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가 루산을 쳐다보고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베론 공작 측의 말을 믿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죠. 갑자기 황궁을 침탈할 정도의 병력이 노바로 들어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수도 군단 사령관과 노바 경찰청장은 철저한 황제파입니다. 오베론 공작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예요. 대신들 중에도 오베론 공작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고요. 그들도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그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미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쨌든 우리도 오베론 공작에게 불리한 증거와 증인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루트 오베론이 병력을 동원하기 전에 우리는 막심 황자 손을 빌려 오베론 공작을 실각시키고 도덕적, 법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오베론 가문을 몰락시킬 준비를 착착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성공이 눈앞이라고 생각했죠.”
“아!”
“그런데 어찌 됐든 오베론 공작이 군과 경찰, 관리, 법원을 모두 손에 넣은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황제파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황궁을 장악하고 있는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 그러니까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을 소탕하는 것이 급선무로군요? 오베론 공작은 질질 끌면서 자신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 할 테니까요.”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켈이 핵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래야 오베론 공작이 비상 대권을 휘두르는 근거가 사라진다.
바덴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가 가서 황궁을 장악하는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을 소탕하면 어떻겠습니까?”
미켈의 질문에 루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구귀족파 파일럿을 구출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건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이라 모두가 거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오히려 빈틈이 있었죠. 이건 도무지 침투할 공간이 없어요. 수도 군단과 오베론 공작의 남방군이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흐음······.”
“들키지 않고 황궁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당당히 밝히고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정체를 뭐라고 밝히죠? 변경 군단?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명령도 없이 변경 병력이 뜬금없이 수도로 간다? 이건 반란이란 말이에요. 오베론 공작의 명분만 강화해 줍니다.”
“···그렇겠군요.”
“앞뒤 재지 않고 아라드 변경에 있는 우리 병력을 다 동원한다 해도 황궁을 포위하고 있는 수도 군단과 남방군 병력보다 많지는 않아요. 우리는 파일럿은 많이 늘었지만, 멕 나이트 수가 아직 현저히 부족하니까요.”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생산하는 레오파드는 여전히 전선으로 공급되는 물량이 많아 변경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수리 공장에 들어와 있는 파손 멕 나이트를 재조립해 아라드 변경으로 빼돌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설사 우리가 일당백의 힘을 발휘해 황궁을 장악하고 있는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과 노바의 병력을 다 물리친다고 해도 그다음은 어쩌죠? 공연히 우리의 존재만 부각시킬 뿐 우리에게는 노바를 장악할 명분이 없어요.”
바덴의 편지를 받은 뒤 루산은 계속 고민해 왔다.
어떻게 해야 황궁을 탈환하고 막심 황자를 구출하여 오베론 공작의 비상 대권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군사적 상황뿐 아니라 정치적 상황도 고려해야 하기에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찾아온 미켈을 보니 루산은 갑자기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남방군 파일럿들 말입니다.”
“저희들 말씀이십니까?”
“네. 무엇을 목표로 거사를 일으키려 한 겁니까? 현 황가가 원수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현재의 황가를 쓰러뜨리고 오베론 공작을 추대하려는 거였나요?”
“그렇게까지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복수 자체가 목적이었지 오베론 공작을 추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요? 다만, 황제를 쓰러뜨리면 우리의 복수를 도운 오베론 공작이 필센 제국의 황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겠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죠.”
“적극적으로 오베론 공작을 떠받들 생각으로 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반사 이익을 얻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요.”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수긍이 되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지금은요?”
“네?”
“거사라는 것, 반란이라는 것은 단지 무력만 동원하는 군사적 행위가 아니잖아요. 정치 질서를 바꾸는 것이죠. 황제와 오베론 공작을 향한 복수를 여전히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거사 이후 어떤 질서가 세워질지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건 어려운 질문이군요.”
“어렵나요?”
“네.”
“어떤 점이 어렵다는 건가요?”
미켈이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 우리는 오베론 공작에게 당한 이후로 갈 곳을 완전히 잃은 개미들이었습니다. 원래 살던 개미집은 황제에 의해 짓밟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땅속 작은 구멍에서 숨죽이며 살던 우리를 오베론 공작이 끌어내 물에 빠뜨렸죠. 그런 우리를 구한 게 바로 대장님 아닙니까?”
미켈이 쳐다보자 루산은 심장이 덜컹했다.
“현재를 무너뜨리지 않는 복수를 고민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은 가족들에게도 경찰에 들키지 않도록 몰래 생계비를 보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 어떨지 모르지만, 대장님이 저에게는 새로운 삶을 인도해 주는 길잡이이고 새로운 질서입니다. 잘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
“그래서 오베론 공작이나 황제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 그 이후의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복수심은 남아 있지만, 이미 많은 게 무너졌고 가진 게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가진 것을 지켜 주며 복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대장님을 믿고 거사 실패 이후의 5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
“대장님이 어떤 방법을 선택하고 어떤 질서를 계획해도 모두가 따를 겁니다.”
처음에 남방군 파일럿들을 풀어 준 것은 복수를 향한 자신의 싸움이 길고 어려워질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에 따라 필요하면 그들을 이용하고 도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자신은 갈 곳을 잃은 개미들이 한데 모여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개미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개미들 중 하나가 말한다.
따를 테니 뜻대로 하라고.
루산은 어깨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쳐 용기와 힘을 주었다.
루산이 미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어떤 방법, 어떤 질서든 따르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미켈이 굳게 맹세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미켈이 진지함을 살짝 풀고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뭡니까?”
“거사가 끝나고 괴수 목장의 운영을 다시 맡겨 주신다는 약속을 꼭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권력과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 흥미를 갖게 된 괴수 연구를 진행하며 변경에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루산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슐츠 경의 바람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싸움이 계속되면 슐츠 경을 붙잡아 둘 것이고, 싸움이 완전히 사라지면 보내 주겠죠.”
“···그렇군요.”
“어쨌든 좋습니다. 모두의 뜻이 슐츠 경과 비슷하다면 과감하게 가기로 하죠.”
“어떻게 말입니까?”
루산은 미켈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미켈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걸요?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루산은 쉽게 믿지 못하는 미켈의 시선을 받으며 그 자리에서 서둘러 편지를 써서 그에게 주고는 말했다.
“방금 오셨을 텐데, 아라드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네, 대장님!”
미켈 슐츠가 타고 온 멕 나이트를 타고 밤길을 달렸다.
미켈을 보낸 뒤에 루산은 한참을 서성이다 집을 나서서 레이크 역으로 갔다.
이번 일은 최대한 많은 힘을 끌어 모아야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시장님?”
역무원이 루산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라돔 시에서 내릴 겁니다. 가장 빠른 열차 편이 뭐죠?”
“동부 항구로 마나 연료를 실어 나르는 화물 열차입니다. 여객 운송 열차는 오늘 끝났습니다만······.”
“그걸 타죠. 신경 쓰지 말아요. 기관사에게 라돔 시에 내려 달라고만 해요.”
“알겠습니다!”
루산은 율리안을 만나러 화물 열차를 타고 갔다.
동방 전선에서 사용될 마나 연료를 잔뜩 실은 화물 열차는 밤에도 낮처럼 밝은 레이크 시티를 출발했으나 잠시 후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