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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343화 (343/450)

`343. 노바가 비게 됩니다

343. 노바가 비게 됩니다

루산은 변경 8구역 본부 건물로 먼저 갔으나 율리안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

그래서 그가 살고 있는 관사로 갔다.

통치자의 관사를 경비하는 요원이 안에 연락을 넣자 율리안이 간편한 차림으로 나왔다.

직접 나올 줄은 몰랐기에 루산은 조금 당황했지만, 변경 통치자의 관사가 귀족 대저택처럼 큰 것도 아니고 평소 워낙 소탈한 성품이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부장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결례라니요, 부장님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죠. 들어오세요.”

“네.”

루산은 율리안과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잘 가꾼 남방의 정원.

희미한 마나 등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노바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 꽃들이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루산은 남편과 비슷하게 소탈한 율리안의 부인에게 늦은 시간에 방문한 데 대해 사과의 인사를 하고 서재로 올라갔다.

잠시 후 부인이 차가운 차를 내왔다.

노바보다 훨씬 더운 8구역에서 이 정도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귀하지도 않았다.

8구역의 간부들과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냉각기 정도는 갖추고 살았고, 점점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고 있는 8구역 주민들도 냉각기와 냉방 장치를 갖추는 추세였다.

변화에 민감하고 사업 수완이 뛰어난 상인은 벌써 노바 중산층 이상이 구입하는 이런 제품들을 들여와 판매하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율리안이 찻잔에 맺혀 있는 차가운 이슬을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달라졌죠?”

“네?”

“우리 8구역 말이에요.”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8구역의 이런 변화를 보고 뿌듯해 하셨을 거예요.”

루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혼자 사는 처지라 심심해서 놀러 오신 거라고 해도 저는 환영합니다만, 왠지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율리안의 농담에 루산도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루산은 율리안을 벌써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8구역이 전보다 크게 발전하고 영향력이 강해졌지만, 아직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기준에 들지 못했다.

딱 한 번 등장해도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파괴력을 갖게 되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모두의 주목을 받고 부상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괴수 부산물 가격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부족했다.

루산은 7구역을 시작으로 나머지 변경 구역과도 협력하고 교류하여 8구역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생각이었다.

반란 사건 이후 나머지 변경 구역이 큰 피해를 입어 상대적으로 8구역이 급격히 성장했지만, 최소 7구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라드 변경을 안정화시켜야 괴수 부산물 유통에 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섣불리 등장하면 정부의 강력한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국을 힘차게 뛰게 만드는 마나 연료와 괴수 부산물을 일개 변경 통치자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정부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이 나라가 오베론 공작의 수중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계엄령 하에서 변경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부산물 처리에 깊이 개입한다면 앞날을 기약하기는커녕 아예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사그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 제대로 힘을 갖지 못했음에도 율리안을 등장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루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율리안 님.”

“말씀하세요, 부장님.”

“황궁이 함락되고 오베론 공작이 계엄령을 내렸습니다.”

율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로 인해 율리안도 요즘에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루산의 권유로 야심차게 진행하던 7구역 재건 프로젝트가 멈춘 것도 문제이지만, 황족으로서 노바 황궁이 적에 의해 점령당한 초유의 사태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궁 점령은 오베론 공작의 소행입니다.”

“네?”

“황궁을 점령하고, 막심 황자를 구금하고, 이 일을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의 짓으로 꾸며 세상에 알리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필센 본토의 군대와 경찰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죠.”

“······!”

“아시다시피 저는 오베론 공작을 늘 주시해 왔습니다. 증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그는 황족들의 안전을 핑계로 황궁 탈환 작전을 지연하고 있어요. 최대한 오랫동안 끌면서 군과 경찰,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넣겠죠. 그렇게 완전히 장악이 끝나면 이 나라를 가로채려 할 겁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20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황제에 충성하는 군대 말이에요. 본국에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장악해 봐야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그 병력은 바다 건너 동방에 있지 않습니까? 그 병력에 보급 물자와 연료,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본토 정부고요. 오베론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그 200만 병력은 식량과 무기, 마나 연료 공급이 중단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본국의 관리와 군대가 그런 짓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필센 제국 영토의 8분의 1을 지배하던 가문입니다. 중요 보직을 차지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오베론 해운의 배들이 필센 제국 전쟁 물자 수송량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 물자가 바다 건너 필센 제국군에 제대로 전해지는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는지 본토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아!”

“바다 건너 병력은 멕 나이트가 1만 대든 2만 대든 상관없어요. 마나 연료 보급이 중단되면 움직이지 않는 기계덩어리일 뿐입니다. 200만 병력은 식량이 없어 쫄쫄 굶다 분노한 아우로라 연합군에 쫓기게 될 겁니다. 포로가 되면 다행이고 어쩌면 멕 나이트에 짓밟히게 될지도 모르죠.”

루산이 말한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자 율리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200만 병력이 아우로라 대륙에서 비참하게 궤멸된다!

이것은 단지 황위 찬탈이 아니라 필센 제국의 국력이 심각하게 꺾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2만 대의 멕 나이트, 그에 육박하는 멕 워커, 200만의 성인 남자들이 사라지면 제국은 무너진다.

성난 아우로라 연합군이 설욕하겠다고 다시 쳐들어올 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장님?”

“황궁을 탈환하고 이번 사태가 오베론 공작의 자작극임을 밝히고 그를 체포해야죠.”

“계엄 하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어떻게든 해 봐야죠.”

율리안이 무겁게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요?”

“황궁 탈환과 오베론 공작 체포는 비밀리에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상당한 병력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요. 변경 이름을 걸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변경 이름을 걸고?”

“정확히는 변경 8구역의 통치자 율리안 님의 이름으로 움직여야겠지요.”

이게 무슨 뜻인가?

“실패하면 반역죄, 성공해도 변경 병력을 움직여 노바로 입성한 황족이 되는 겁니다.”

율리안이 얼음처럼 굳었다.

황궁을 탈환하고 오베론 공작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귀국한 황제가 과연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온 변경 통치자를 가만히 둘 것인가?

가만히 둘 수도 있다.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율리안은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거나 최소 막심 황자의 요청에 따라 움직였다면 모를까 독자적인 판단으로 변경 병력을 이끌고 상경한다면 황제의 눈에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로 보일 것이 자명했다.

율리안은 어느 쪽도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루산이 말했다.

“이번 일로 율리안 님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될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계획이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말씀을 드리면 율리안 님은 자신의 존재를 더욱 드러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가 임명한 일개 변경 관리인이 아니라 변경의 주인이 되어 괴수 부산물 유통을 통제해야 합니다. 황제와 당당히 협상을 하는 것이죠. 당연히 황제는 이를 허용하려 하지 않겠죠? 군대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좁은 길목을 막고 버틸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입니다.”

“최소한?”

“네. 이렇게 존재감을 부각시키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으음······.”

율리안이 길게 콧숨을 내쉬었다.

“최소한이라······.”

최소한이라는 말은 최대한의 조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율리안의 똑똑한 사람이라 루산이 말하는 최대한의 조치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러나 차마 본인의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산은 율리안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내친김에 그 이야기까지 했다.

“황궁을 탈환하고 반란을 일으킨 오베론 공작을 처단한 공로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단기간에 혼란을 수습한 영웅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겁니다. 막심 황자는 이 혼란을 초래한 인물이고, 오베론 공작은 쓰러졌으니 노바가 비게 됩니다. 율리안 님이······.”

“그만하세요!”

그러나 루산은 멈추지 않았다.

“책략과 술수가 아닌 마음과 정성으로 다스리는 율리안 님이 필센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는 것이 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허!”

“이반 황제의 개혁 정책 이후 필센 제국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상처 받고 몰락한 사람들, 지속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루산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필센 제국을 벗어나면 불행한 사람은 더욱 많지요. 전쟁 난민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아우로라 대륙 백성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루산은 두 번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아라드 왕국과 폐허가 된 바르나 왕국의 백성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 8구역은 그 사람들의 불행 덕에 발전할 수 있었고, 우리 8구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나마 율리안 님 덕분에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되시어 8구역 바깥의 사람들도 불운을 끝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율리안 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살피고 들어주고 고민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루산의 말에 율리안은 눈만 껌벅였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있던 율리안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저를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장님.”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너무 나가셨어요. 저는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다만, 이 나라의 위기를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으니 황궁을 탈환하고 막심 전하를 구출하는 일에는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베론 공작의 죄상이 밝혀진다면 그를 체포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루산은 묵묵히 율리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까지 미리 고민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아시고 부장님이 생각하시는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루산은 율리안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약간은 실망스러웠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변경 통치자의 이름으로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리안이 5년 전 풋내기를 벗어나 자신의 힘을 과감히 사용할 줄 아는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후에 전개될 사태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계속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본인이 거부해도 존재감을 키우고 부각시킬 방법이 루산에게는 있었다.

“알겠습니다.”

루산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고, 율리안은 그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밤이 점점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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