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부정한 것들을 모두 부숴라
348. 부정한 것들을 모두 부숴라
아라드 왕국군이 열차를 타고 노바로 들어온 사건은 오베론 공작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어떻게 아라드 왕국의 병력이 국경도 아니고 노바 안에 들어온 뒤에야 보고가 올라온단 말이냐? 이게 말이 되느냐!”
오베론 공작이 호통을 쳤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그는 그 이유를, 부하들로부터 변명을 듣기 전에 스스로 깨달았다.
아라드 왕국 병력이 노바에 입성한 뒤에야 보고를 받은 데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피닉스 제철이 아라드 왕국에서 철광을 개발해 운송해 오기 위해 철도를 부설했다.
그 이후 피닉스 제철과 고슬라 그룹이 아라드 왕국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가 오가는 바람에 화물 열차의 통행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로 인해 아라드 왕국에서 필센 제국의 수도까지 화물 열차에 멕 나이트와 병력을 싣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라드 왕국이 원체 필센 제국의 오래된 동맹국인 데다 아라드 왕국 재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양국을 오가는 화물량이 급증하면서 통관 절차 간소화 법률이 제정되어 국경 검문이 느슨해졌다.
게다가 과거에 오베론 지방에 주둔해 있던 많은 병력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원정을 떠났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병력은 황궁 함락 사태 이후 싹싹 긁어모아 노바로 불러올렸기 때문에 남쪽에서 올라오는 아라드 왕국군 수송 열차를 저지하거나 보고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노바 남쪽 관문을 지키고 있는 수도 군단 4전단이 아라드 왕국의 병력을 막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오베론 공작은 상황을 최대한 냉철하게 파악하려 애를 썼다.
‘수도 군단이, 기어이 돌아섰단 말이지!’
계엄령을 어기면서까지 노바로 들어오는 관문을 열어 외부의 군대를 들어오게 했다면 이것은 자신에 대한 적대 행위로 봐야 했다.
‘서쪽 관문도 열어 줄 것이다!’
남쪽을 열었는데 서쪽 관문만 닫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무엇보다 약소국이자 오랜 동맹국인 아라드 왕국의 군대가 자체적인 판단으로 필센 제국의 수도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필센 제국에서 누군가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맹군 군대를 움직일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현재 제국의 군과 관을 장악하고 있는 자신은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황족밖에 없었다.
막심 황자는 황궁에 구금되어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변경 군단을 이끌고 온 변경 8구역 통치자가 불러들였다고 봐야 한다.
‘수도 군단 사령관은 그에 호응한 것일 테고!’
계엄령을 어겼다는 것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뜻, 이제 무력으로 그들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병력이 극히 열세라는 것이다.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싸울 수 없다면 말로 설복시켜 그들을 돌아가게 만들거나 계엄령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군대를 움직여 반기를 든 사람들을 말로 설복시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싸울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다면?
‘일단 피해야 한다!’
여기서 잡히면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된다.
병력을 동원한 수도 군단 사령관이나 변경 8구역 통치자는 이대로 물러나면 자신들의 목이 달아나기 때문에 끝장을 보려 할 것이다.
‘바트에게 사람을 보내고 오베론 지방으로 달아나 바트가 남방군을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저항하거나 바트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 남방군을 이끌고 돌아와야 한다!’
남방군이 군대를 이끌고 노바로 입성하면 변경 병력과 아라드 왕국군, 현재 남아 있는 수도 군단 병력이 손을 잡아도 능히 물리칠 수 있었다.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필센 제국군이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남방군으로 필센 본토를 충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남방군이 먼저 회군하여 노바에 입성한다면 황제와 필센 제국군은 아우로라 대륙에서 몸을 뺄 수가 없다. 아우로라 연합에 필센 제국의 분열 소식을 알리면 남방군을 상대하던 시바스 왕국군이 페르보 제국을 공격하는 동방군을 포위 공격하고 황제가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으려 할 테니까!’
아우로라 연합으로서는 지금껏 밀리던 전쟁을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필센 제국군은 본토의 지원이 중단된 채 강력한 역공을 받아 궤멸될 것이고, 그동안 나는 남방군으로 변경과 아라드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제국을 장악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면 꼼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은 제대로 된 군대를 동원해야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루트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루트를 찾아 집으로 오라고 전하라! 서둘러야 한다!”
“예!”
오베론 공작은 루트를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정부 청사 1층에서 상무대신 벤야민을 만났다.
“재상 각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벤야민은 아직 아라드 왕국의 군대가 노바로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오베론 공작은 마음이 급했지만, 벤야민을 보고 불쑥 화가 치밀어 이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아라드 왕국과 교역할 때 통관 절차를 간소화하는 법률을 만들어 통과시킨 사람이 상무대신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그 덕에 열차가 아라드 왕국에서 노바까지 빠르게 올 수 있게 되었단 말이지.”
“······?”
“재무대신을 낙마시킨 것도, 은행 감사권을 가져간 것도,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을 뒤엎으려고 검증 작업을 맡은 것도 그대가 아닌가?”
“그건 막심 전하께서 맡기셔서 할 수 없이······.”
“하! 출신이 천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신이나 되어서 변명은 좀 치졸하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친 건 출세욕에 눈이 멀어 낄 데 못 낄 데 구분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를 방해한 네놈이지!”
오베론 공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지금은 늙은 재상이지만,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하고 1차 대전쟁 기간에 동방에서 아우로라 연합군 멕 나이트를 베어 넘기다 몇 년 전까지 남방군 사령관으로 지내온 기사!
그 눈빛을 보자마자 벤야민은 불길함을 느끼고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오베론 공작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경호 기사의 검을 뽑았다.
쓰릉!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정부 청사 1층에 울려 퍼졌다.
로비를 걸어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중앙으로 쏠렸다.
상무대신 벤야민이 몸을 돌려 뛰어가는 동작을 취했으나 아직 가속이 붙지 않았고, 오베론 공작이 검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나이가 든 데다 손에서 검을 놓은 지 여러 해가 흘렀다.
촥!
오베론 공작이 휘두른 검은 벤야민을 사선으로 내리쳐 그의 오른쪽 어깨와 등에 긴 상처를 내고 지나갔다.
그러나 생각한 만큼 깊이 베지는 못했다.
“악!”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아픔에 벤야민은 비명을 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정부 청사 경비 병력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의 원흉이 재상인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생각처럼 안 되는군!”
오베론 공작은 벤야민을 완전히 베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어쨌든 검을 휘두르니 답답함은 조금 가셨다.
그는 경호 기사에게 검을 넘겨주고 정부 청사를 나와서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집으로 이동했다.
***
황궁을 점거하고 있던 남방군 파일럿들은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계엄군 지휘관 파일럿으로부터 마나 통신기로 현재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변경 군단, 아라드 왕국군 그리고 수도 군단이 손을 잡고 자신들을 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우리를 돕겠다는 거야, 안 돕겠다는 거야? 확실히 말을 해!]
[사령관께서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뭐?]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셨다고! 아라드 왕국군이 노바로 입성한 게 바로 조금 전이야. 그들이 변경 군단, 수도 군단과 손을 잡고 이 일을 벌인 걸 조금 전에야 알았다니까!]
[으······!]
[저들의 병력이 너무 많아! 우리가 섣불리 나섰다가는 다 죽는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우리만 죽으라고?]
[그건······!]
[사령관께 전해! 우리를 치면 바깥의 너희는 무사할 것 같아? 결국 차례로 다 죽는 거야! 머저리같이 굴지 말고 싸우라고! 놈들이 황궁을 칠 때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붙잡아 두고 있을 테니까 그때 황궁으로 들이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놈들을 공격해서 먼저 쓰러뜨리라고!]
[음!]
[변경 병력? 그 허접한 놈들이 백이든 천이든 무서울 게 있어? 아라드 왕국? 스스로 자기 나라도 못 지키는 놈들이 겁나? 싸울 줄 아는 녀석들이라고는 수도 군단 놈들뿐인데 몇 안 된다고! 지금 너희는 최신 멕 나이트로 무장하고 있잖아! 겁먹지 말고 싸우란 말이야! 그게 우리 모두 사는 길이야!]
황궁을 점거하고 있던 파일럿들은 자신들을 잡기 위해 다가오는 멕 나이트들을 지켜보며, 고립된 채 버려지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외친 그들의 말은 상당 부분 옳았다.
황궁을 탈환한 병력이 과연 오베론 공작이 불러올린 남방군 병력을 그대로 둘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계엄령을 거역하고 병력을 동원했다.
오베론 공작과 적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목이 잘리고 재산을 몰수당한다. 남은 가족들은 경찰의 감시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운이 좋아 봐야 죄수 부대로 최전선을 전전하며 죽을 때까지 적과 싸우다 아우로라 대륙 어느 곳에서 죽어 가겠지.’
과거 반란을 일으켰던 기사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저것들을 모두 물리치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오베론 공작이 냉정하게 그들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모른 채 신남방군 지휘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마나 통신기로 황궁 안에 있는 남방군 파일럿에게 말했다.
[알았다! 버텨라!]
신남방군 지휘관이 아이언 워리어 Ⅱ에서 내려 슬레벤 백작에게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 우르사와 003이 가장 먼저 황궁 성벽에 다다랐다.
필센 제국의 황궁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선의 요새가 아니라 대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이기에 성벽이 높기는 해도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대장님, 어떻게 진입하죠?]
시에나의 질문에 루산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했다.
우르사가 마나 진동 기능을 활성화시킨 거대한 철퇴를 들어올려 뒤로 젖히더니 성벽을 향해 강하게 휘두른 것이다.
쾅!
돌 조각이 튀고 벽이 깊게 파였다.
“저런 미친······!”
아무리 황궁 탈환 작전을 벌인다지만, 황궁 성벽을 함부로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현장 지휘소에 있던 고위 귀족과 지휘관들이 입을 떡 벌렸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궁을 부수기 위한 우르사의 철퇴질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쾅!
쾅!
쾅!
연이은 철퇴 공격에 성벽이 그대로 무너져 내려 우르사를 덮쳤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고 무너진 성벽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우르사의 모습이 보였다.
우르사가 외부 확성기로 당당히 외쳤다.
- 부정한 것들을 모두 부숴라!
그 외침에 아라드 변경에서 온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가장 먼저 호응하여 우르사의 뒤를 따라 무너진 성벽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는 낡았지만, 황궁과 오베론 공작을 부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기에 강한 기세를 뿜어내며 성벽을 통과했다.
황궁을 점거하고 있던 오베론 지방의 파일럿들이 반짝이는 근위대 멕 나이트를 타고 우르사와 아라드 변경의 흙이 묻어 있는 낡은 멕 나이트에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