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약속을 지켜 주시오
350. 약속을 지켜 주시오
오베론 공작이 정부 청사를 떠나던 시각, 루트 오베론은 변경대신을 만나고 있었다.
노바로 올라온 변경 군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변경 8군단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5년 전 반란 사건 여파가 워낙 컸기 때문에 다른 구역의 변경 군단이 움직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대신께서는 앞으로 변경의 병력을 더 엄격히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일럿들을 정기적으로 다른 구역으로 이동시켜 순환 근무를 하도록 하거나 통치자를 황족으로 하지 말고 중앙에서 임기를 정해 임명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임기가 정해지지 않은 황족이 군대를 보유한다는 것 자체가 이런 위험을 내포하니까요.”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황족을 변경의 통치자로 삼아 황가를 수호하고 제국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은 필센 제국의 오랜 관례라 황제 폐하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루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필센 제국 같이 튼튼하고 체계적인 정부 조직, 군사 조직을 갖추고 있는 나라에서 아직까지 핏줄을 믿고 황가를 수호하려는 황제의 나약한 마음과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온 변경대신의 타성이 한심했던 것이다.
자신이 황제라면 -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만 - 황족에게 힘을 나눠 주는 이런 제도는 당장 없애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황제가 아니니 언행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 간할 근거가 하나 마련된 셈이죠. 변경대신께서도 변경 구역의 군대가 올라올 때까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셨으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책임을 혼자서 오롯이 지시겠습니까?”
“그것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노바 서쪽 관문 밖에 있는 변경 8군단을 해산시킬 수 있는 방안도 서둘러 찾아보세요. 당장 변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파일럿 개개인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처벌을 가할 수 있는지 찾아보시란 말이에요. 근무지 무단이탈, 철도와 열차 무단 점거, 교통 방해, 군사 무기 무단 사용··· 어떤 명목이든 찾아서 경고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변경대신이 땀을 뻘뻘 흘리며 메모했다.
“이렇게 많은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밖으로 돌려도 변경 8구역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동안 8구역이 지나치게 많은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잖아요?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압수하고 감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경고하는 것도 저들을 주눅 들게 만들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데 국력을 낭비할 상황이 아닙니다. 조속히 처리하세요.”
“네!”
이때까지만 해도 루트는 변경 8군단의 상경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변경 군단은 노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수도 군단이 관문을 틀어막고 있었고, 계엄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변경 8군단이 무단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법이기에 정당성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노바로 입성하지 못하고 여러 경로로 압박을 받으면 제대로 된 군인이 아닌 생활인에 불과한 변경 파일럿들은 저절로 흩어질 것이고, 이번 기회를 변경 질서를 바로잡을 계기로 삼으리라고 다짐했다.
‘어차피 변경은 한번 손을 봐야 한다.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가 있는 필센 제국군에 대한 보급을 중단하려면 변경을 틀어쥐어야 하니까!’
변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변경의 생리와 운영·감독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지금의 변경대신을 휘어잡아 그대로 기용하면서 변경을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루트는 변경 대신과의 만남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청사에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야?”
“재상께서 퇴청하시는 길에 1층에서 상무대신을 만나셨는데 검을 빼서 그를 베셨답니다!”
루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대체 왜? 상무대신은 어떻게 됐는데?”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고, 상무대신은 죽지 않고 상처를 입고 달아났답니다. 그 일로 지금 청사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때 오베론 공작의 부하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이야? 재상께서 상무대신을 벴다고 하던데?”
“저도 현장에 있지 않아 말로만 들었는데, 그 전에 공작님께서 도련님을 찾아 집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또 왜?”
오베론 공작의 부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라드 왕국군이 노바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퇴청하셨습니다.”
“뭐라고!”
상무대신을 벴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너무 놀라 눈의 흰자위가 다 드러날 정도였다.
“아라드 왕국군 멕 나이트를 실은 열차들이 남쪽 관문을 줄줄이 통과해 노바로 들어와서 황궁 쪽으로 갔답니다. 멕 나이트가 250여 대나 된답니다! 수도 군단 놈들이 통과시켜 줬다는 거죠.”
“이 새끼들이!”
루트가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오베론 공작이 왜 서둘러 퇴청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수도 군단이 계엄 사령부에 알리지 않고 동맹국 병력을 수도로 들였다.
그 말은 곧 오베론 공작을 적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트는 부하들과 함께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청사 1층은 혼란스러웠다.
루트는 앞을 막아서는 경비들을 밀고 밖으로 나와 자동차를 타고 오베론 공작의 저택으로 달렸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 완벽한 계획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가 황궁을 점령하고 막심 황자를 구금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정부와 군경을 장악한다.
정부와 군의 요직에 오베론 공작과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을 앉힌다.
그렇게 필센 본토를 장악해 나가며 아우로라 대륙에 가 있는 필센 제국군에 대한 보급을 은밀하게 끊고 그 사실을 아우로라 연합에 알린다.
황제와 황태자는 아우로라 대륙에 고립된 채 쓰러진다.
‘본토에서는 이 계획을 저지할 사람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수도 군단 사령관이 아라드 왕국군을 불러올 만한 능력이 있단 말인가? 변경 8구역 통치자가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말이 되지를 않았다.
수도 군단 사령관이 비록 황제파이기는 하지만, 아라드 왕국이 그런 군인 한 사람의 요구가 있었다고 해서 움직일 리가 없었다.
변경 8구역 통치자는 이번에 병력을 이끌고 올라오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인데······.’
열차를 타고 노바 안으로 들어와 병력이 황궁으로 향했다면, 황궁을 점거하고 있는 부대나 계엄군 역할을 하고 있는 부대는 이미 구하기 늦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오베론 공작이 도망치듯 퇴청한 것이다.
저택으로 오라고 한 것도 달아날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내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와 황태자가 대군과 함께 아우로라 대륙에 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본토에서 지원을 끊으면 전멸하게 돼 있어! 어쨌든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본토를 먼저 차지하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루트도 오베론 공작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남방군을 데려와야 해! 남방군 병력이면 아라드 왕국군이나 변경 군단 정도는 가볍게 짓밟을 수 있다! 그 뒤의 과정은 동일해! 필센 제국군에 대한 지원을 끊고 고립시키는 거야.’
생각을 정리한 루트가 경호 기사에게 지시했다.
“밀수 차를 관리하는 조직 있지?”
“네? 네!”
“그 녀석들에게 가서 차를 싣고 엘버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가 언제 노바 선착장으로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들어온 배를 보내지 말고 잡아 놓고 있으라고 해. 그 배를 타고 떠나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나를 내려 주고 바로 떠나.”
“예!”
“은신처에 남아 있는 자들 중세 실력 있는 녀석들은 그 배를 탈 수 있게 준비시켜 놓고.”
“알겠습니다!”
루트가 타고 온 자동차는 그를 오베론 공작의 저택에 내려놓고 떠났다.
오베론 공작은 가족들과 가신들에게 대피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루트가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라드 왕국군과 변경 군단이 수도 군단과 함께 계엄군을 포위하고 황궁을 공격했다.”
오베론 공작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궁에서 벌어진 일을 그 사이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노바를 봉쇄하기 전에 빠져나간다.”
“어디로 말입니까?”
“바트가 지휘하고 있는 남방군과 합류할 것이다.”
‘역시 같은 생각이시군요!’
루트는 이 와중에도 아버지와 자신의 생각이 같다는 데 화가 나면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이 위기가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은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가 뒷받침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력을 챙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모두 다 챙길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일단 가족들 먼저 챙겨라. 그리고 부하들 중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는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 돌아온 뒤에도 일을 해 줄 사람들은 필요하니까. 그리고 데려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잠시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해. 돈은 아끼지 말고 풀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동안 충성하던 자들도 복수하려 드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트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아시는 분이 저를 버렸습니까!’
그러나 공작이 눈치 채기 전에 얼른 감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용건을 끝낸 오베론 공작이 손짓으로 루트를 내보내고 반드시 챙겨야 할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때 루트가 말했다.
“남방군과 합류하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할 텐데, 그 배편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응?”
“그동안 이용하던 수단이 있어서요.”
“그러겠느냐?”
“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오베론 공작은 도주할 배편을 루트에게 맡기기로 했다.
“···알았다. 가서 준비해라.”
“네.”
루트가 몸을 돌릴 때 오베론 공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루트야.”
“네?”
“그레타에게는 걱정하지 않도록 잘 둘러대는 게 좋겠구나.”
“······!”
그레타는 루트의 딸 이름.
이 순간만은 오베론 공작이 손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루트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오베론 공작이 가신과 부하들을 불러 도피 준비를 하는 사이, 루트는 밖으로 나가 공작가의 자동차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부하들을 챙겼다.
잠시 후 루트의 호위 기사 군터가 돌아왔다.
“모레 들어올 거랍니다. 선착장 창고 근처에 관리하는 녀석들의 숙소가 있는데 이틀 정도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경찰이 한동안 우리 뒤를 샅샅이 캐고 다녔는데, 그곳이라고 안 걸렸을까?”
“데사우로 형제를 쳐낸 뒤에 창고와 숙소를 다 옮겼답니다.”
그렇다면 이틀 정도는 경찰에 들키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자네도 챙길 게 있으면 챙겨. 함께 가기 어려운 가족이나 부하들에게는 이야기를 잘해서 잠시 숨어 있도록 하고.”
그러면서 루트는 금고에서 지폐 다발을 모두 꺼내 나눠 주었다.
“알겠습니다.”
비장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다.
“시간 없으니 어서 가!”
“네!”
루트의 재촉에 그의 비서와 경호 기사가 돈다발이 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경호 기사 군터는 자신의 집으로 갔다가 은신처에 숨어 있는 부하들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루트의 비서 레톤은 곧바로 스텐커를 찾아갔다.
그는 루트가 처한 상황과 그의 계획에 대해 모두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동안 꾹 참아 왔던 죄책감이 온몸을 휘감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레톤에 격동을 억누르고 호소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시오!”
“···알았다.”
레톤을 돌려보낸 스텐커는 남방군 출신 기사들과 사기 당한 가문에서 온 협력자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우리의 일도 이제 곧 끝날 것 같소.”
사람들이 스텐커를 응시했다.
“큰 사냥감을 잡아 봅시다!”
고문을 당해 팔다리가 불편한 남방군 출신 기사들과 사기 당한 귀족 가문의 협력자들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