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옆에 있어 주면 안 되겠니?
351. 옆에 있어 주면 안 되겠니?
마침내 막심 황자가 구출되어 황궁 정문 옆 첨탑에서 내려왔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하고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은 그대로였다.
아니, 이번 사태를 겪으며 더욱 거칠고 사나워졌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느냔 말이야!”
수도 군단 사령관과 경찰청장이 쩔쩔 매며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막심이 살벌한 눈빛을 하고서 짓씹듯이 말했다.
“오베론 공작, 그자가 기어이······!”
눈앞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지금 어디에 있소?”
“오베론 공작 말씀이십니까? 전하를 구출하는 일이 우선이라······. 체포 병력을 보냈으니 곧 잡아 올 것입니다, 전하!”
막심이 제멋대로 자란 수염을 나풀거리며 수도 군단 사령관을 노려보았다.
“나를 구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렇습니다!”
“구출 작전을 이딴 식으로 하나? 황궁을 다 때려 부수면서? 하마터면 첨탑이 무너져 깔려 죽을 뻔했잖아!”
“그건······.”
“그리고 애초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고 황궁이 함락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도 수도 군단의 책임자야!”
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변명할 상황이 아니었다.
수도 군단 사령관은 묵묵히 막심의 호통을 받아 냈다.
그때 보다 못한 율리안이 가까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형님!”
“형님? 누구야?”
“율리안입니다, 형님!”
막심이 율리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족이라는 뜻, 다섯 살에서 열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친족 동생들의 어린 시절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겹치는 얼굴을 찾아냈다.
앞에 나서지는 않지만 남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라 기분을 좋게 하는 똑똑한 아이였다.
“아! 율리안! 네가 웬일이냐?”
“황궁이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있을 수 없어 병력을 이끌고 왔습니다.”
“병력?”
수도 군단 사령관이 옆에서 거들었다.
“지금 변경 8구역 통치자로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차림이 독특했다.
약간 통통한 살집에 어울리지 않게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두 발로 황궁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대한 도마뱀 모양의 괴수들도 눈에 띄었다.
“아! 변경 병력을 이끌고 와 주었구나!”
“네, 형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제야 막심은 분노가 가라앉고 안심이 되었다.
어린 시절 함께 궁에서 뛰어놀던 친척 동생이 황가의 어려움을 듣고 머나먼 변경에서 도우러 왔다는 말에 위로를 받은 것이다.
역시 믿을 만한 사람은 혈족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고맙구나! 근위대고 수도 군단이고 경찰이고 간에 무능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막지 못해 머나먼 오지에서 고생하는 황족을 수고하게 만들었어!”
그 말을 들은 수도 군단 사령관의 얼굴이 굳었으나 막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 율리안이 말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무조건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베론 공작이 워낙 은밀하게 황궁 가까이에 있는 귀족 저택들을 은신처로 만들어 병력을 숨겨 두었다가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죠. 그보다 서둘러 형님께서 건재하심을 알리십시오. 그래야 불안해하던 노바 백성들이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당장 나의 건재를 알려야지!”
“그리고 오베론 공작의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잠시 묻어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자의 반란을 널리 알려야지!”
“나중에 알리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황궁을 탈환하고 형님 전하께서 건재하심을 알려 백성들을 안심시켰는데, 그 원흉이 아우로라 연합군이 아니라 오베론 공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백성들이 다시 놀라지 않겠습니까?”
“음······!”
“부서진 황궁을 수습하고 전투 현장을 정리하고 오베론 공작이 선포한 계엄령을 해제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뒤에 그동안 조사한 증거에 따라 오베론 공작 가문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십시오. 그러면 백성들도, 놀라기는 하겠지만, 엄정한 일처리 덕에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막심이 율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일단 의관을 정제하시고, 대신들을 불러 이 사태의 수습 방안을 의논한 뒤, 기자들 앞에서 전하의 건재함을 드러내신다면 사태 수습의 첫발을 떼는 것입니다.”
“알겠다.”
막심이 경찰청장과 수도 군단 사령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었소? 경찰청장은 황궁의 비서들과 대신들을 불러오시오!”
“예, 전하!”
“수도 군단 사령관은 황궁과 주변 광장을 정리하고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율리안의 진언에 막심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태 수습의 방향을 잡자 욕을 먹던 수도 군단 사령관과 경찰청장이 율리안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었다.
율리안이 막심에게 말했다.
“사태가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으나 형님께서 무사하시고,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을 모두 물리쳤으니 저는 이만 변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뭐라고?”
막심뿐 아니라 경찰청장과 수도 군단 사령관도 깜짝 놀랐다.
“변경의 군대가 노바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필시 말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무사히 형님을 구출했고, 형님께서 노바의 안정을 되찾으실 것이니 제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허! 이런······.”
막심이 감동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역시 내심 약간의 의문은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율리안의 말로 인해 의문과 의혹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막심이 율리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근위대가 궤멸되고 황궁이 무너진 마당에 네가 가 버리면 나는 누구를 믿고 밤에 잠을 이루겠느냐?”
“형님!”
“근위대를 재건할 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어 주면 안 되겠니?”
“하지만······.”
“누가 너에게 허튼 소리를 한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율리안은 갈등했다.
다른 사람의 의혹과 비난이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근위대는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수도 군단과 경찰 병력은 미미하고, 어떻게 동원했는지 모르지만 아라드 왕국군은 루산의 편지를 받고 멕 나이트를 무려 250여 대나 동원했다.
노바에 머물러 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욕망과 의지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루산이 다가와 말했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어차피 변경에도 할 일이 많으니 변경의 멕을 모두 돌려보내 혹시나 제기할지 모르는 의혹을 차단하는 겁니다. 아라드 왕국군의 멕 나이트도 당연히 돌려보내고 말입니다. 그 대신 통치자께서는 탐탐 정찰병과 함께 남아 계시어 막심 전하께서 정국을 수습하실 때 힘이 되어 주십시오. 변경이 제국과 황실의 어려움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막심이 크게 환영했다.
속으로 아라드 왕국군과 변경 군단 병력이 부담스럽던 수도 군단 사령관도 고개를 끄덕여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렇게 한다면 율리안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율리안만 루산을 복잡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부장님,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다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루산이 눈으로 대답했다.
율리안이 할 수 없이 막심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근위대를 재편할 때까지만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율리안!”
막심이 다시 한번 율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율리안은 변경 8군단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막심 곁을 잠시 벗어났다.
“1전단장은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모두 데리고 8구역으로 돌아가세요. 나는 탐탐 정찰병과 함께 당분간 노바에서 지낼 겁니다.”
트리어가 물었다.
“그러면 8구역은 누가 통치합니까?”
“통상 업무는 해 오던 대로 하면 되고, 특별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8구역 북부는 1전단장이, 8구역 남부는 2전단장이 결정하고 보고하세요. 2전단장 역시 당분간 나와 함께 노바에 있게 될 테니까 실질적으로는 남부의 의사 결정은 켐니츠가 하게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통치자님.”
그때 막심이 율리안을 찾는다는 말에 율리안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말했다.
“전단장님도 알다시피 우리는 매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통치자님. 저희는 걱정하지 마시고 노바에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율리안이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막심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산은 곧바로 율리안을 따라가지 않고 트리어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언 워리어 Ⅱ 한 대만 빼돌릴 수 있겠어요?”
“응?”
“아직 정리가 덜 된 틈을 이용해서 우리 멕 사이에 숨겨서 한 대 들고 가자고요.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뭐 하려고?”
“아이언 워리어 Ⅱ는 아직 본 적이 없잖아요. 가프 연구소에 선물하면 좋아할 거예요.”
연구용으로 가져가려는 것이다.
“수도 군단은 병력도 얼마 안 되고 할 일이 워낙 많으니 빈틈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알았어. 하지만, 못 가져갈 수도 있어.”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해서까지 억지로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조심해요.”
“너나 조심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요?”
“우리 통치자님. 눈치를 보니 뭔가 있는 거 아니야?”
확실히 트리어는 감이 특별했다.
루산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만에 하나 내가 연락하면 병력을 다시 올려 보낼 수 있겠어요?”
“진심이야?”
루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어가 루산의 눈을 탐색하듯 보다 말했다.
“설마 목 떨어지는 일은 아니지?”
트리어 역시 아라드 왕국군이 움직인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사실은 루산이 움직인 것이지만, 율리안의 연락을 받고 움직인 줄 알고 율리안에게 이런 능력이 있나 싶어 깜짝 놀랐다.
루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누가 알겠어요.”
“난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가늘고 긴 것보다는 굵고 긴 게 낫지 않겠어요?”
“가능성은 있고?”
이번에도 루산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네 이야기를 들어서 손해 본 게 없기는 해.”
“······.”
“알았다.”
“고마워요. 근데 너무 긴장하지는 말아요.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한 말이니까. 아무 일도 안 생길 가능성이 커요.”
“알았다고.”
트리어가 얼른 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루산은 율리안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트리어는 변경 8군단 병력에 이동 명령을 내렸다.
루산은 율리안 경호 명목으로 시에나, 모리츠, 파비안 그리고 파펜을 남게 했다.
이번에 동원한 병력에는 서브 파일럿이 없었기 때문에 루산을 비롯하여 노바에 남는 파일럿들은 멕 나이트와 함께 남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 군단 사령관도 노바에 남는 변경의 멕 나이트가 몇 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체류를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막심 전하께서 율리안 님의 체류를 원하고 계시니 그때까지 머무는 것으로 알겠소.”
“감사합니다.”
황궁의 비서들과 대신들이 막심의 부름을 받고 긴급히 달려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베론 공작 체포를 위해 떠났던 부대가 돌아왔다.
“집에도 청사에도 없습니다! 급하게 달아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당장 찾아!”
오베론 공작이 청사에서 상무대신에게 칼부림을 하고 빠르게 퇴청했다는 이야기가 대신들을 통해 전해졌다.
막심이 노발대발하며 수도 군단 사령관과 경찰청장에게 소리쳤다.
“반란을 일으킨 대역죄인을 잡지 못하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알라!”
수도 군단 병력과 노바 경찰들이 오베론 공작을 비롯하여 그의 가족과 부하들을 잡기 위해 총출동했다.
그러나 오베론 공작 일파는 종적을 감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스텐커가 추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루산이 율리안에게 조용히 말했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율리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루산은 일단 집으로 갔다.
신문을 통해 자신이 노바에 왔음을 알고 있을 바덴을 안심시키고, 스텐커가 그녀에게 알려 준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법원 근처에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가로등이 밝혀져 있었다.
문지기 겸 정원사가 루산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문을 열었다.
루산이 집으로 들어가자 바덴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씻지 못해 수염이 덥수룩한 루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격한 환영을 받은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바덴을 다시 꼭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