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억울해하지 마세요
353. 억울해하지 마세요
루산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오베론 공작을 잡아 버리면 황제에 대항할 방법을 찾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황제와 싸우라고 놓아 준다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예측하기 어렵고 오베론 공작조차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황제는 나중에, 일단 잡을 수 있는 오베론 공작부터 잡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루산이 입을 열었다.
“모두 붙잡······.”
그런데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밀수선 쪽으로 이동하던 오베론 공작 일행이 갑자기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현장을 지켜보던 스텐커가 놀란 목소리로 루산을 불렀다.
“기사님!”
“지금 다 잡아요!”
“네!”
스텐커가 차창을 내리고 호루라기를 불자 선착장 곳곳에서 밀수선을 반포위하는 모양새로 대기하고 있던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과 협력자들이 차를 타고 달렸다.
짐을 부리는 인부와 창고를 관리하는 일꾼들이 갑자기 질주하는 차량들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
은신처에서 나와 밀수선에 먼저 다가간 자동차들에서 서둘러 사람들이 내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동차들은 뒤에 오는 차량들을 막는 모양새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베론 공작과 그의 측근들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먼저 배에 오르려고 마구잡이로 차를 대고 내리나 보다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은 차와 차 사이에 틈이 없었다. 차를 치우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차로 벽을 친 것이다.
“어서 차를 치워라! 공작님이 아직 여기 계신다!”
오베론 공작의 측근들이 소리를 쳤지만, 자동차를 운전해서 차로 벽을 만든 루트의 수하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오베론 공작이 차 벽 너머에 있는 루트를 향해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당황과 분노로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바트에게 가서 군대를 데려오는 일은 그리 주목 받지 않는 제가 할 테니 공작 각하께서는 노바에서 막심을 상대하고 계시지요.”
루트 역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젠가는 결행하리라고 마음속으로 준비해 왔으나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가슴이 쿵쾅거렸던 것이다.
“뭐라고?”
“공작 각하께서 떠나시면 막심이 각하를 잡으려고 병력을 총동원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바트에게 가는 일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여기 남아 막심이 괜한 사람에게 반란죄를 씌워 괴롭힌다고 버티세요.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에 황궁이 점령당하고 적에게 붙잡힌 수모를 덮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요.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겁니다. 그동안 황가가 귀족들을 워낙 핍박해 왔으니 편을 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허!”
“그리고 공작께서 붙잡혀 있어야 바트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하지 않겠습니까?”
“······!”
오베론 공작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작이자 재상을 함부로 고문하거나 벌을 내리지는 않겠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트의 군대를 데리고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세요. 그럼 이만······.”
루트가 몸을 돌리자 오베론 공작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루트!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느냐?”
루트가 다시 오베론 공작을 쳐다보고 말했다.
“억울해하지 마세요. 아들과 손녀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다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잖아요?”
손녀라는 말에 오베론 공작이 배에 타고 있던 그레타를 찾았다.
먼저 배에 오른 손녀 그레타가 영문을 모른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무언가 외치고 있었다.
자동차 시동 소리에 묻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얼른 오세요!”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루트가 그런 오베론 공작에게 말했다.
“한 번도 희생 같은 걸 해 보지 않으셔서 모르십니까? 그러면 가문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세요. 공작님의 희생을 딛고 오베론 가문은 살아남아 번영을 누릴 겁니다.”
오베론 공작은 딛고 서 있는 땅이 갑자기 꺼져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과 허무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측근들이 차 벽을 넘어 루트와 그의 부하들을 공격하려 했다.
루트의 부하들이 거세게 그들을 저지했다.
마침내 루트가 배에 올라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밀수선 선장에게 말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엘버 강을 빠져 나가지.”
“예?”
“차 밀수를 계속하고 싶으면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루트의 부하가 옆에서 밀수 사업의 실질적인 주인라고 루트를 소개하자 선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리!”
선장이 명령을 내리자 선원들이 서둘러 배의 갑판과 선착장을 잇는 널빤지 다리를 걷고 긴 막대로 선착장을 힘차게 밀었다.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이 배를 향해 달려들고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배가 강가에서 서서히 멀어져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밀수선은 물살의 방향대로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레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아빠,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할아버지를 막아요?”
“막은 게 아니야. 우리 안전을 위해 남아 있으시겠다는구나.”
그러나 그레타도 눈이 있었다.
배 위에서 볼 때 양측이 몸싸움과 설전을 벌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더 캐물어 봐야 아버지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자 그레타는 입술을 깨물며 선착장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편 루산 일행은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골육상쟁에 놀라면서도 선착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오베론 공작 일행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루산 일행의 자동차들이 부채 모양으로 오베론 공작과 그의 측근을 에워쌌다.
자동차에서 내린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은 단검과 차에 싣고 있던 쇠파이프를 들고 소리쳤다.
“오베론 공작! 반란죄로 체포한다!”
이반 황제 시절 아버지와 할아버지, 친척 어른들이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숙청되었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반란에 기꺼이 가담하기로 했으나 오베론 일가에 속아 황제의 구귀족파 소탕 작전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남방군 출신 반란 파일럿은 격동을 참지 못해 목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오베론 공작의 부하들과 경호 기사들이 나섰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루트에게 배신당한 충격이 가시기 전에 갑자기 들이닥친 체포조의 기세가 너무나 강렬했다.
저항하던 경호 기사는 순식간에 쓰러지고, 나이 많은 가신들과 오베론 공작은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에게 거칠게 제압당했다.
루트를 놓쳤지만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과 사기 피해 가문에서 온 젊은 협력자들이 기세등등하게 오베론 공작과 그의 가신들을 자동차 뒷자리에 구겨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산은 한편으로는 허망하고 한편으로는 밀린 숙제를 하나 해결했다는 시원함을 느꼈다.
“기사님, 루트는 어떻게 할까요?”
스텐커가 멀어지는 밀수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잡을 수 있습니까?”
“시간상으로는 차를 타고 먼저 브레머 항으로 가서 경찰이나 해군의 배를 동원하면 엘버 강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런데요?”
“우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지 않습니까? 브레머 경찰청장이나 브레머에 주둔한 해군 사령관을 만나는 데만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고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만나더라도 우리에게 정식 신분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령서가 있는 것도 아니죠.”
“사실상 늦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잡았어야 했다.
경찰이나 군대였다면 곧바로 차를 달려 엘버 강 하구 브레머에서 배를 동원해 잡을 기회가 있겠지만, 스텐커 일행은 경찰도 군인도 아니었다.
전처럼 가짜 신분증을 사용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심각해 위험이 컸다.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이 너무 많아 자칫하다가는 반란죄로 잡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루산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루트를 놓쳤지만, 루산은 그리 미련을 갖지 않았다.
‘어쨌든 오베론 공작을 잡았다!’
루트가 형을 설득해 남방군을 노바로 돌릴 수 있을지 어떨지, 남방군이 노바로 입성해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과 내전을 벌이게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그건 나중 문제이고 일단 오베론 공작을 잡았다.
“형사국장으로 있다고 했던가요?”
루산이 꺼낸 사람이 누구인지 스텐커는 바로 이해했다.
노바 경찰청 수사과장에서 형사국장으로 승진한 그리마였다.
“그렇습니다.”
“루트가 사업을 하다 벌인 불법의 증거도 이미 확보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에 오베론 공작을 체포한 공이면 약간의 조력만으로도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네요.”
“······!”
“오베론 공작 일당을 형사국장에게 넘겨주고 그 사람을 경찰청장으로 밀어 보죠.”
“가능하겠습니까? 평민 출신에 연줄도 없고 승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어쨌거나 현 경찰청장은 오베론 공작을 조사했으면서도 반란을 막지 못했어요. 막심 황자의 눈 밖에 났을 겁니다. 그리고 율리안 님이야 노바에서 이름도 힘도 없지만, 그분의 외가인 밤베르크 백작가는 꽤 유력한 가문이죠.”
황궁이 점령당하고 오랫동안 적도들에게 구금당한 막심이 분노의 칼춤을 출 것이기에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오베론 백작의 죄상을 철저히 밝혀 놓으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스텐커가 사람들을 지휘하여 노바 경찰청으로 오베론 공작과 그 일파를 호송하도록 했다.
루산은 오베론 공작을 태운 자동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동차 뒷자리에서 남방군 출신 기사들 사이에 앉아 있던 오베론 공작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 루산과 눈이 잠시 마주쳤다.
분노와 상실감이 뒤섞여 있는 늙은 맹수의 눈.
루산은 포획된 맹수는 신경 쓰지 않고 멀어지는 밀수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벌써 다음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
프리드리히 황제는 동방군의 뒤를 따라 페르보 제국으로 들어가 있었다.
들려오는 것은 항상 승전보였다.
필센 제국군은 이미 페르보 제국의 영토 3분의 2 이상을 점령했고, 남은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들도 속속 항복 사절을 보내왔다.
아우로라 연합에 가입한 나라, 가입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연일 사신을 보내와 프리드리히 황제가 말한 새로운 질서에 대해 묻고 황제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고개를 조아렸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점령지 백성들 앞에서는 자애로운 어버이처럼, 아우로라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 앞에서는 위엄 있는 정복자처럼, 필센 제국군 장병들 앞에서는 대범한 영웅처럼 행동했다.
어떤 모습으로 행동하든 그는 늘 여유가 있었다.
이 전쟁의 끝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전쟁을 짧은 기간 안에 승리로 장식하고, 오카수스 대륙은 물론 아우로라 대륙까지 통치하는 위대한 황제라는 칭호를 얻을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프리드리히 황제의 얼굴에 금이 갔다.
노바에서 재상 오베론 공작이 보내온 긴급 보고서를 읽은 뒤의 일이었다.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가 노바로 침투해 황궁을 점령하고 황자를 비롯한 황족들을 인질로 삼았다는 내용이었다.
쾅!
분노한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자 비서와 장군들이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