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이것이 제국이다
354. 이것이 제국이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곧 있으면 끝이 날 것으로 보이는 대전쟁을 자신이 직접 마무리한 뒤 성대한 환호를 받으며 개선할 생각이었다.
전투가 모두 끝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페르보 제국은 점령하고 페르보의 황제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에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바를 저 지경으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분노와 아쉬움을 가라앉혔다.
“근위대와 함께 돌아갈 테니 동방군 사령관이 페르보 정벌을 마무리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하루 속히 페르보 정벌을 마무리 짓고 아우로라 대륙의 다른 나라들을 신속히 제압하여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노바의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된 라이네 후작이 굳은 표정으로 황제를 안심시키려 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방군 사령관의 마음을 받아 주었다.
“괜히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장병들에게 노바의 소식을 알리지 마시오.”
“예, 폐하!”
마침내 황제가 귀환 길에 올랐다.
외교부 관리들은 다른 나라 사절을 상대하도록 그대로 남겨 두고 근위대와 함께 돌아갔다.
동방군 지휘관들과 외교부 관리들이 옆에 없자 이번 사태를 들은 뒤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근위대장이 황제에게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폐하, 노바에 주둔해 있는 우리 병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황궁을 점령할 만큼의 병력이 노바로 은밀히 숨어들었다는 말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내부 소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동방군 지휘부나 관리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소관인 근위대의 무능을 감추려고 새로운 분란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말을 아낀 것이다.
“내부 소행이라······.”
“예, 폐하! 보고서만으로 모두 헤아릴 수는 없으나 황궁을 점령한 적도들이 멕 나이트를 가지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근위대의 멕 나이트를 탈취해 장악했다는데, 황궁 사정을 어지간히 잘 알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설사 매우 뛰어난 적 기사들이 들어왔다 해도 근위대는 야전 부대보다 경계 근무 편성 방식이 훨씬 비밀스럽고 자주 바뀌기 때문에 동선을 미리 파악하여 근위대를 무력화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힘으로 눌렀다는 건데, 그 정도로 뛰어난 기사들을 대거 동원할 능력이 있었으면 아우로라 연합이 이렇게 밀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 병력을 전선에 투입했으면 전쟁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정도로 아우로라 연합군이 노바의 황궁을 점령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근위대의 경계 근무 편성 규칙은 모르더라도 황궁과 근위대 병영의 구조, 근위대 병력 규모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일을 꾸민 것입니다. 만약 아우로라 연합의 첩자가 그걸 알아냈고 이번 사태가 아우로라 연합의 소행이라면 대전쟁 초기에 감행할 일이지 승기가 우리 제국으로 완전히 기운 지금에 와서 우리 군의 철수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저지를 만한 일이 아니지요.”
묵묵히 근위대장의 말을 들은 황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말라.”
“예, 폐하!”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결국 우리 필센이 강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것이며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 일은 그 과정에서 겪는 작은 장애물에 불과하지. 밖에서 왔든 안에서 생겼든 치우면 되는 것이야. 그러니 근위대 기사들도 이번 일의 배경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거나 호들갑 떨지 말고 맡은 바 임무를 굳건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탄 마차는 근위대 멕 나이트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서쪽으로 나아갔다.
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무거웠으나 마음이 급하다고 허둥지둥 돌아갈 수 없었다.
황제는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적의 간첩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태연한 척 위엄을 지키며 백성들을 만나면 자애롭게 구호 활동을 하며 위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황제가 노바 소식을 일선 장병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으나 그 당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보급품과 함께 들어오는 신문들에 노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던 것이다.
황궁을 점령한 자들이 황궁 성벽에 내건 요구 조건 - 필센 제국군의 철수 - 이 사진으로 찍힌 것을 보고 라이네 후작이 노발대발했다.
“어느 미친놈이 전쟁 중에 이런 걸 신문에 싣게 내버려 두는 거야!”
막심 황자가 신문 자유에 관한 포고령을 공포했고 오베론 공작이 이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방치했다는 것을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필센의 장병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신문을 통해 본국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향수를 달래고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기사는 오히려 장병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사기를 떨어뜨린다.
여기서는 사건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기에 신문에 실린 내용보다 더 불안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황궁이 점령당했다면 노바가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아우로라 연합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는 사이에 적들도 우리의 고향 땅을 야금야금 삼키는 것이 아닌가?
이 땅을 점령해도 우리 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라이네 후작이 보급품과 함께 들어오는 신문을 장병들이 보지 못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미 노바 사태에 대한 소식이 필센 제국군 장병들에게 좍 퍼진 뒤였다.
***
오베론 공작을 잡았다는 보고를 들은 뒤에야 막심 황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황궁을 침탈당하고 적도의 손에 잡혀 첨탑에 구금되어 있던 수모를 갚아 줄 수 있게 된 데 기뻐하는 잔인한 미소였다.
“오베론 일족뿐 아니라 이번 반란에 연루된 자들을 모두 체포하라! 3족을 멸할 것이다!”
율리안이 막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형님, 반란죄에 엄벌을 내리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사태의 규모를 키우지 말고 최대한 은밀히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황궁이 아우로라 연합군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백성들이 황궁 탈환 소식에 겨우 안심하고 있는데, 사실은 오베론 공작의 소행이라고 하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장병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오베론 공작의 큰아들이 남방군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태를 키우면 소식이 그의 귀에 더욱 빨리 들어갈 것입니다. 오베론 공작을 반란 혐의로 체포하고 일가와 가신들을 모두 엮어 넣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가 가만있겠습니까? 필시 군을 움직이겠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남방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말에는 막심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공작의 큰아들이 있었어!”
황궁 비서들과 군무부 장군들을 불러 남방군 규모와 무장 상황을 확인한 뒤에는 더욱 놀랐다.
수도 군단 사령관이 말했다.
“바트 오베론이 이끌고 있는 남방군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트의 부대는 원래 남방군 1군단이었던 병력을 전시 증편한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방군 2군단과 3군단이 북방군과 동방군, 네세베르 공략군으로 차출되었습니다. 그 병력에도 오랫동안 오베론 가문에 충성해 온 기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흐음!”
막심이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고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둘째 황자라 해도 이번에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큰일이 벌어질지 깨달은 것이다.
“바트를 체포할 부대를 보내야 하나?”
“순순히 체포에 응하겠습니까?”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암살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지만,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루산으로부터 이미 언질을 받은 율리안이 말했다.
“오베론 공작을 체포할 당시에 둘째 아들인 루트는 놓쳤다고 합니다. 오베론 지방으로 돌아가 봐야 잡힐 것이 뻔하니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형에게로 갔겠지요. 이대로 있으면 바트는 아버지가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루트가 도착하기 전에 해군에서 가장 빠른 배로 바트에게 먼저 명령서를 전하시지요.”
“어떤 명령을 내리라는 말이냐?”
“오베론 공작이 반란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출두해서 조사를 받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올 리가 없지 않느냐?”
“알 수 없지요.”
“음?”
“오지 않으면 명령을 거부하고 진짜 반란에 연루되었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면 큰일이 아니냐?”
“바트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서 남방군 모두가 기꺼이 동참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오베론 지방에서 올라온 계엄군이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
수도 군단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트도 알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권위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단단하여 부하들 모두가 기꺼이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고민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율리안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막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방군의 규모가 크고 무장이 대단하다 해도 우리 제국의 여러 부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남방군 말고도 동방군, 북방군, 네세베르 공략군, 수도 군단, 근위대가 있습니다. 바트가 과연 남방군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킬까요? 부하들이 기꺼이 따를까요?”
사실은 율리안도 확신하지 못했다.
오베론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다면 가문은 끝이 났다고 봐야 했다.
수중에 있는 군사로 무엇이든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그렇다면 부하들 가운데 반발하는 자나 소극적인 자들이 있다 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자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필센 제국에서 황제의 인기는 무척 높았고 황제를 따르는 군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체포 부대를 보내는 것은 괜히 자극하여 반란을 부추기게 됩니다. 암살자를 보내는 것은 당당한 제국이 취할 방법이 아닙니다. 무엇이 무서워 암살을 꾀한단 말입니까?”
“음!”
“의연하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명령을 받고도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에 대응하면 됩니다. 반란군은 필시 내부 분열을 일으켜 자멸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바트는 분명 고민하다 출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공정한 조사를 약속하시고 오베론 공작, 루트 그리고 반란에 연루된 가신들 외에 나머지 가족과 가신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바트가 순순히 출두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흔들림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정론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국이다!’
수도 군단 사령관과 군무부 장군들 그리고 황궁 비서들은 율리안의 당당함과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바트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반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일 뿐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사상자가 발생하기야 하겠지만, 승리는 필센 제국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센의 장군과 관리로서의 자신감을 저도 모르게 깨닫게 되었다.
막심 또한 율리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하자. 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리고 부대를 떠나 있는 동안 지휘할 사람은 그가 적임자를 임명하도록 하라. 어차피 내가 후임자를 보내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골이 더 깊어질 테니까.”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율리안의 찬사에 막심은 미소를 지었다.
여유를 찾은 것이다.
남방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떠올리면 여전히 두려웠으나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국으로서의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해 처리할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오베론 공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관직을 채워야 했다.
무너진 황궁도 복구해야 했다.
전쟁터로 갈 막대한 양의 물자를 차질 없이 챙기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재상인 오베론 공작이 주도해 왔다. 공백이 불가피했다.
어떤 연유로 노바에 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라드 왕국군을 위해 선물과 감사도 해야 했다.
막심은 할 일이 너무 많아 미칠 것 같았다.
이토록 바쁜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버틴 막심 황자, 노바를 구하다!>
신문에 간간이 보이는 자신에 대한 찬양 기사가 그나마 즐거움을 주었다.
그 뒤에 율리안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으나 찬양하는 화려한 수식어도 없이 그저 변경 8구역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변경을 제법 잘 다스려 온 모양이네.’
‘변경이 이런 곳이었군!’
막심은 그 기사로 율리안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율리안에 대해 흥미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율리안의 기사보다 자신의 기사를 더 즐겁게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