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355.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천운이십니다. 이대로 가만히 엎드려 계시는 게 좋습니다. 날도 더운데 움직이시면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덧나 고름이 생기고 열이 나고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어요. 옛날 검상으로 사망한 기사들이 꼭 상처가 깊어서 죽은 게 아닙니다.”
의사가 겁을 주고 당부했지만, 벤야민은 이대로 엎드려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꿰매지 않았소? 붕대로 꽉 조여 주시오.”
“······.”
“나라에 난리가 났는데 대신이라는 사람이 이대로 엎드려 있을 수는 없어요. 어서!”
“아휴!”
의사가 할 수 없이 상처에 연고를 바른 뒤 붕대로 몸을 감았다.
상무대신 벤야민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뼈를 다치지는 않았지만, 보통 사람은 평생 겪어 보기 어려울 만큼 깊고 긴 상처를 등에 입어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났다.
상처가 살짝 벌어지며 피가 새는 느낌이 들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움직이시면 절대 안 됩니다!”
“걱정 말아요.”
벤야민은 서서히 걸음을 내딛었다.
처음에는 아픔을 밀려와 힘이 쭉쭉 빠져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다.
상처 입은 부위가 오히려 시원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후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자동차를 타고 정부 청사로 들어갔다.
“괜찮으십니까, 대신 각하!”
“푹 쉬셔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벌써 나오셨습니까?”
“나라가 전쟁 중이라 할 일이 태산인데 어찌 쉴 수 있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은 통증 때문에 빨리 걷지도 못하고 걸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이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관리들이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저 사람도 독한 구석이 있군!”
“그러니 평민 출신으로 대신까지 됐지.”
“그렇다 해도 칼을 휘두르는 공작에 맞서다니, 보통 용기가 아니야!”
“이틀 만에 나온 걸 봐.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야.”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도 평민 출신으로 상무대신이 된 최초의 인물이라 능력은 어느 정도 있겠거니 하고 인정했지만, 평민이라는 선입견으로 비굴하고 계산적이고 약삭빠른 인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오베론 공작이 휘두른 칼에 베이고도 업무에 금방 복귀하는 것을 보고 -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지만 - 반란을 일으킨 재상 앞에 당당히 맞선 용기 있는 인물, 큰 부상을 입고도 나랏일을 하기 위해 곧바로 나온 충성스럽고 의지적인 인물로 인식이 바뀐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오베론 공작이 휘두른 대검에 맞은 것이 그를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정의롭고 용기 있고 책임감 있는 관리로 만들어 준 것이다.
관리들뿐 아니라 막심의 시선도 그러했다.
평민 출신의 대신이라 으레 황제파려니 하고 일을 시켜 왔으나 금방 출근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갔다.
“몸은 좀 어떠시오?”
갑작스러운 막심의 방문에 벤야민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 찌릿한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막심이 말했다.
“그대로 있으시오.”
“아닙니다, 전하!”
벤야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일어나 예를 올렸다.
“이거 참! 출근했다는 말을 듣고 그래도 몸이 그만한 줄 알았더니, 아직 쉬어야 하는 것 아니오?”
“상처 부위가 놀라 그런 것이지 상처가 심한 것은 아니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막심은 벤야민이 자기 대신 오베론 공작의 칼에 베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상무대신을 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른 가야 조금이라도 편히 쉴 테니 용건을 말하겠소.”
“말씀하시지요.”
“경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우로라 대륙으로 많은 병력과 무기, 보급품을 계속해서 보내야 하오. 이 일정이 틀어지면 큰일이 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일을 오베론 공작이 관장하고 있었단 말이오. 게다가 오베론 공단에서 많은 물량을 책임지고 있었고.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해 오베론 공단의 혼란은 불가피하단 말입니다.”
벤야민이 무거운 표정으로 막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역시 그 부분이 걱정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누군가 이 일을 총괄해야 하는데 상무대신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요. 가능하겠소?”
“······!”
재상의 업무를 총괄하라는 말인가?
벤야민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려 한 것이지 그 정도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다 건너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대군은 굶주리거나 무기 없이 싸워야 해요.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안 됩니다.”
벤야민은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찌릿함을 느꼈다.
등에 입은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막심의 제안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막심이 벤야민을 재상의 자리에 앉힐 권한은 없었다. 그러나 이 비상시국에 그 임무를 잘 수행해 낸다면 황제가 돌아온 뒤 그 공을 충분히 참작해 상을 내릴 것이다.
그 상에는 재상의 자리까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개혁 헌법 수립 이후 필센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이 법 앞에 평등하다지만, 평민 출신으로 대신까지 오른 사람은 그가 최초였다.
이제 평민 최초로 재상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토록 중요한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이 몸을 바쳐 기필코 완수해 내겠습니다!”
“몸을 바쳐서는 안 될 것이오. 쓰러지지 말고 해 내기를 바랍니다.”
“예, 전하!”
막심이 돌아가고 벤야민은 생각에 잠겼다.
‘당장 오베론 공단 문제 먼저 해결해야 한다!“
벤야민은 비서를 불렀다.
“고슬라 사장에게 가서 내가 급히 만나자고 한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각하!”
비서가 나가고 벤야민은 상무부 관리들을 데리고 재상부로 가서 그동안 오베론 공작이 해 온 보급품 관리 기록을 모두 수거해 왔다.
그런 뒤 재상부 관리들과 상무부 관리들을 시켜 현황을 파악하게 하고 당장 급한 일과 물품 공급 방식의 문제점을 찾아내도록 했다.
대검에 등이 베이고도 나와 일하는 상무대신, 더욱이 막심 황자로부터 보급품 총괄 권한을 받은 상무대신이 지켜보고 있으니 관리들은 최대한 정신력을 쏟아 일차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뽑아 보고했다.
상무대신 역시 그동안 각료 회의에 참석해 왔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보급품을 마련하고 공급해 왔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는데, 막상 보고 내용을 보니 보급품의 항목도 많고 공급 방식 또한 다양하여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물어 설명을 듣고 나서 자료를 챙겨 일어났다.
“농업부와 공업부, 군무부에서 보급품 공급 업무를 맡고 있는 관리들도 불러 오세요. 앞으로 모두 이 방에 모여 효율적인 보급 관리 체계를 만들고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일할 겁니다.”
“예, 각하!”
비상시국에 중요한 책임을 맡은 벤야민을 대하는 관리들의 태도는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벤야민은 통증과 희열로 인한 짜릿함을 느끼며 서서히 걸음을 옮겨 청사 밖으로 나가 자동차에 올랐다.
약속 장소로 바덴을 만나러 간 것이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바덴이 걱정스럽게 묻자 벤야민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으니 여기 나온 것 아니겠어요? 보는 사람마다 똑같이 묻는 말에 답하기도 고역입니다. 별일 아닌가 보다 생각해 주세요. 그보다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네.”
“오베론 공작이 재상부에서 해 오던 전시 보급품 총괄 업무를 내가 하게 되었어요. 막심 전하께서 그리 지시를 하는 바람에······.”
바덴은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상무대신이 급부상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사람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피를 철철 흘릴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이런 중책을 맡았으니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마냥 축하할 수가 없었다.
“경하 드립니다, 대신님. 다만 건강이 염려되는군요.”
벤야민이 여유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 웃음을 지으려다 등에 통증이 밀려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내 몸이 걱정되어 일을 덜 방법을 생각해 보다 고슬라 사장에게 만나자고 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종류도 많고 양도 많은 보급품을 정부에서 모두 책임지는 것은 무척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죠. 게다가 오베론 공단에서 책임지던 물량이 상당하여 당장은 아니더라도 점진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보급 업무의 상당 부분을 민간에 맡기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어차피 생산은 민간에서 해 온 것 아닌가요? 정부에서 발주하고 민간 공장에서 생산하고 정부는 다시 수량을 확인하고 제품을 검수해서 전선으로 보내죠. 우리 회사에서도 많은 제품을 군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도 정부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관리들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보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이 조금만 늘어나도 효율이 크게 떨어집니다. 부정도 많이 생기고 말이죠. 그래서 정부에서 하던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을 민간에 넘겨 효율을 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발주야 어차피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고, 검수와 유통 전반을 민간에 맡길 생각이에요. 물론 정부에서는 전체 제품 가운데 일부를 무작위로 검사하겠죠. 나머지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운송할 때 문제가 생기면 업체가 책임을 져야죠. 굳이 납품업자가 생산자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직접 만들든 다른 곳에서 사 오든 알아서 조달하면 되는 거죠. 운반도 더 저렴한 방식,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여러 물품을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효율적인체계를 찾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어떻습니까?”
바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에 전선 보급 총괄 업무를 맡으시고 나서 생각해 내신 것 같지가 않네요.”
“맞아요. 전부터 생각해 오던 방법입니다. 우리 제국은 워낙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관료 조직 또한 비대하죠. 그래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거든요. 이걸 개선하면 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합니다.”
바덴이 벤야민의 생각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통에 대해 조금만 신경 쓰면 부피가 크고 가벼운 짐과 작고 무거운 짐을 한정된 짐칸에 잘 실어서 운송 효율을 높일 수가 있는데, 정부 관료들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어차피 자기들이 운송비를 내는 것이 아니고 그런 낭비를 줄여 봐야 크게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민간에 맡기면 그런 낭비를 줄이는 건 민간 회사의 이익으로 귀결되죠.”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부분까지 업무를 넘길 것인지가 문제가 되겠군요. 제품 조달과 유통을 포괄적으로 넘겨주셔야 이익을 극대화할 여지가 있지 제품 단위로 맡기면 지금처럼 정부에 납품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현재 각 방면군 별로 조달할 물품 전체를 하나의 회사에 맡길까 해요. 그래야 조달, 관리, 수송 단계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으니까요.”
“······!”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었다.
“물론 멕 나이트 등의 무기 공급은 군이 별도로 하게 되겠죠. 그렇다 해도 운송은 함께 이루어지게 겁니다. 보급품의 안전한 호위를 위해서 말이지요.”
“······.”
“당장 바꿀 수는 없어요. 일단 고슬라 사장이 오베론 공단을 맡아 주세요.”
“네? 제가요?”
벤야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베론 공단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입주 업체의 실질적인 주인들은 오베론 공작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을 테니까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겠죠. 이미 달아난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말입니다. 생산 차질은 불가피해요. 그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관리하고 부족분은 고슬라 그룹에서 어떻게든 조달하세요. 그렇게 보급품을 차질 없이 공급한다면 고슬라 그룹을 동방군 전체의 보급을 책임지는 회사로 선정하겠습니다. 70만 대군의 보급품 전체를 책임지는 겁니다.”
“······!”
막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지만, 이익이 어마어마할 것으로 예상되는 제안이었다.
바덴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 벤야민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오베론 공작이 체포되기는 했지만, 그의 재산과 권리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것부터 빨리 처리해 주셔야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빠르게 특별법을 만들어 정리할 테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오베론 공작이 복권된다면 그의 재산에 손을 댄 저는 엄청난 보복을 받게 될 겁니다.”
바덴의 이야기를 들은 벤야민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오베론 공작이 복권된다면 고슬라 사장이 어떤 보복을 받을지는 몰라도 나는 확실히 죽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해야겠지요.”
오베론 공작의 칼에 베인 등의 상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공존이 불가능한 사이, 복권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짓밟을 것을 다짐하는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재상님.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슬라 사장님.”
벤야민은 만족스럽게 바덴과 헤어졌다.
바덴의 능력이면 오베론 공단의 결손을 최소한으로 막고 부족분은 어떤 식으로든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료들에게 맡기면 결코 쉽지 않을 일이었다.
이것으로 일단 200만 대군에 보급품을 마련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될 문제를 처리한 상무대신 벤야민은 과감하게 오베론 공작이 해 온 일을 뒤엎기 시작했다.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은 물론 오베론 제철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피닉스 제철을 조사하던 일도 중단시켰다.
피닉스 제철이 오베론 공단을 합법적으로 집어삼킬 길을 터 준 것이다.
피닉스 제철의 반값 공세가 다시 위력을 발휘하면서 오베론 제철을 비롯한 제철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장들을 피닉스 제철이 고스란히 인수했다.
바덴은 오베론 공단을 접수하고 피닉스 제철로부터 안정적으로 재료를 공급받기로 약속받았다.
체포된 오베론 공작이 노바 경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오베론 공작이 휘두른 칼에 베인 상무대신이 그의 기반을 확실히 무너뜨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덴은 아라드 왕국에 물자를 공급하던 상사 회사를 확대 개편하여 동방 물산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장차 동방에 대규모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