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많이도 왔네
361. 많이도 왔네
루산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항상 율리안 곁을 지켰다.
막심은 예측이 불가능한 인물.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라 지금은 율리안을 믿고 곁에 두고 있지만, 언제 변심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심이 주재한 대책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율리안이 루산을 불렀다.
율리안의 옆에는 수도 군단 사령관과 군무대신이 서 있었다.
“이분들이 부장님께 물어볼 게 있다고 하시네요.”
루산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수도 군단 사령관이 루산을 한 번 쓱 보더니 율리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장이라는 직위는 뭡니까? 변경 8군단 2전단장 아닙니까?”
“우리 2전단장님은 변경 8구역에서 많은 일을 맡고 계십니다. 어느 한 자리만 맡기는 건 재능 낭비라 말이죠, 하하하! 그중 하나가 신사업부 부장이랍니다. 변경 8구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죠.”
“아! 그렇군요.”
수도 군단 사령관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의례적인 반응이었을 뿐 진심으로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변경 오지에서 능력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워낙 사람이 없으니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지.’
그러나 지난번에 황궁 광장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루산이 탑승한 멕 나이트가 제법 활약하던 모습은 기억하고 있었다.
변경 기사치고는 싸울 줄 안다고 생각했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니 그 정도는 당연한가?’
그럼에도 제국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 오죽 변변치 못하면 변경까지 흘러갔나 싶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린 시절에는 특출한 구석이 있어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면서도 출세할 자신이 없어 변경으로 흘러가 인재 노릇을 하고 있는 변변치 않은 녀석으로 루산을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통치자께서 변경 군단과 관련된 내용은 경에게 물어보라고 하셔서 말이오.”
“네. 말씀하시죠.”
“들어서 알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근위대와 함께 오고 계시오. 그런데 속도가 느려요. 정확한 날짜를 예상하기 어렵소. 남방군 쪽에서는 아예 소식이 없고. 그래서 남방군이 먼저 도착할 것에 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수도 군단 사령관이 군무대신을 쳐다보자 이번에는 군무대신이 말했다.
“아우로라 원정에 총력을 기울인 탓에 본토의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오. 그래서 변경 군단을 정식으로 동원할까 하는데······.”
“······!”
변경 군단 정식 동원!
정부 차원에서 변경 군단에 정식으로 동원령을 내린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루산은 적잖이 놀랐다.
군무대신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변경 군단의 실력을 잘 몰라서 말이오. 그리고 변경을 막기 위해 얼마나 남겨 두고 얼마나 동원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8구역 통치자이신 율리안 님께서 그 부분은 경이 대답해 줄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셔서 이렇게 묻는 것이오.”
루산으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변경 군단의 전력과 전투 능력을 정부에 알리는 것은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훗날 괴수 부산물 가격 통제권을 휘둘러 제국과 갈등이 생겼을 때 제국군이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밀고 변경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데, 변경 병력의 실력을 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변경 군단을 정식으로 동원하려 할 줄은 몰랐다!’
이번에 변경 8군단의 상경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군부에서 변경 군단을 동원하는 방안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변경 군단을 동원하자고 율리안을 충동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변경 군단 활용 가능성을 떠올린 것이니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루산은 마음이 복잡했다.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두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 못한 일이 닥치더라도 어떻게든 대응해야 했다.
그때그때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정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니 앞으로 눈치 보지 않고 변경 병력을 올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루산은 생각을 정리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변경에서 괴수나 사냥하고 정찰 임무나 수행하던 변경 파일럿의 수준은 제국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형편없이 떨어지죠. 야전에서 제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순식간에 박살 날 겁니다.”
“그 정도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멕 나이트를 상대하는 것과 괴수를 상대하는 건 아예 다른 일이니까요.”
“흐음······.”
군무대신과 수도 군단 사령관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때 루산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전투라는 게 꼭 맞붙는 몸싸움, 칼부림 실력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죠.”
“무슨 말이오?”
“많은 수로 위력을 과시하는 건 개별 전투 능력이 떨어져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남방군 멕 300대든 변경 군단 멕 300대든 눈에 보이는 건 똑같은 300대 아닙니까? 맞붙기 전까지 규모는 똑같아요. 실력이 떨어져도 방패를 들고 방진을 형성하며 좌우 멕 나이트와 함께 전진하는 것은 조금만 훈련해도 가능합니다.”
위력 과시용으로는 쓸 만한다는 뜻.
“변경 병력은 방패를 들고 방진을 형성하고 실제 전투는 수도 군단이 담당하는 거죠. 어쨌든 우리 병력이 많아 보일 테니 생각이 복잡해지겠죠.”
수도 군단 사령관과 군무대신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수도 군단 사령관이 물었다.
“위력을 과시하는 것 말고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파일럿은 어느 정도 된다고 보시오? 우리가 야전을 택할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소.”
수도 군단의 노바 방어 계획은 노바로 들어오는 관문에 기대어 다수의 적이 진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적에게 위력을 보일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제국군 파일럿 수준의 전투 능력을 지닌 파일럿을 묻는 것이라면 변경 8군단에는 예닐곱 명? 그 정도 될 것입니다. 열 명을 넘지 않아요.”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은 모두 뺀 수치였다.
수도 군단 사령관이 다시 한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변경 군단에는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알아볼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변경부에 묻는 것입니다. 아마 변경부에서 그런 정보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소?”
“네. 그리고 각 변경의 동원 가능한 멕 나이트 수, 순수하게 변경의 안전을 지키는 데 필요한 멕 나이트 수도 변경부에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8구역처럼 루산이 아라드 변경으로 빼돌리는 물량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비밀 감찰관의 수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대개는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변경부에 확인해 보면 된다?”
“그렇습니다. 5년 전 반란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른 변경 구역들이 상당히 타격을 받았지만, 1구역부터 8구역까지 모든 멕 나이트를 더하면 1천 대, 어쩌면 1천 5백 대도 넘을 겁니다.”
“음, 상당하군!”
“상당한 규모이긴 하지만, 실제로 맞붙으면 수수깡처럼 부러진다는 것 아니오?”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그 위세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차피 그것을 활용하여 작전을 수립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수도 군단 사령관의 몫이지만, 루산은 위력 과시로 시간을 벌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경 군단을 동원했을 때 문제가 되는 건 따로 있습니다.”
“무엇이오?”
“장기간 동원하면 괴수 부산물 생산에 막대한 타격이 생깁니다.”
수도 군단 사령관과 군무대신은 루산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루산은 다시 말했다.
“마나 연료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는 겁니다.”
“아!”
“당장 본토 산업이 마비되고 아우로라 대륙으로 원정을 떠난 군대가 타격을 받지는 않겠지만, 몇 개월 뒤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변경 군단은 길게 동원해서는 안 되고, 큰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변경부에 문의할 때 마나 연료 생산량과 비축분에 대해서도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겁니다.”
변경 군단.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만 1천 대가 넘는, 어쩌면 2천 대에 육박하는 멕 나이트를 보유하고 있는, 필센 제국군의 엄청난 예비 전력.
그런데 이 전력은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마나 연료 생산이 중단되면 200만 원정군이 대참사를 겪게 되거나 본토 산업이 마비된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소.”
군무대신과 수도 군단 사령관은 이번 대화로 루산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단지 수치에 능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자.
율리안이 왜 중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은 도움이 되었소. 바로 변경부에 가서 확인해 볼 테니 만약 변경 군단을 동원하게 되면 많은 협조를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군무대신과 수도 군단 사령관은 율리안에게 인사하고 자기들끼리 나직이 대화를 나누며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안이 루산에게 말했다.
“전쟁을 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네.”
변경 군단이 만약 전투에 동원되면 인적, 물적 피해뿐 아니라 2백만 제국군이 바다 건너에서 발이 묶이고 제국의 산업이 마비된다.
그러나 루산은 전쟁의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은 큰 피해를 입을지언정 이긴 자는 다 갖는다.
황제는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고 2백만 대군을 밀어 넣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우로라 대륙을 몽땅 차지할 수 있다.
남방군은 가문의 명운을 걸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면 필센 제국을 차지할 수 있다.
루산 역시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최종 승리를 거둘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우로라 연합.
필센 제국의 황제.
오베론 공작의 남방군.
이 강력한 세력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복수를 달성할 뿐 아니라 율리안을 황제의 자리에 앉혀 갈등과 불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동안 변경 8구역을 발전시켜 레이크 시티의 세금 징수권을 보유하고 있고, 아라드 변경에 수백 명의 멕 나이트 파일럿들을 숨겨 놓고 있으며, 아라드 왕국과 바다 건너 부르사 왕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가프 마법 연구소를 크게 성장시켜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한 사람이 해낸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들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대할 세력은 이러한 성과가 미미해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남방군이 거사를 일으킨다 해도 전처럼 내부 결속을 이루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렇다 해도 일단 본토에 먼저 상륙하면 그때부터는 일이 복잡해진다.’
산업이 마비되든 말든 눈앞에 닥친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필센 정부는 변경 군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바다를 제압할 힘이 있으면 남방군의 상륙도 막고,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필센 제국군의 귀환도 막고, 아우로라 연합군이 오카수스 대륙으로 건너오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동안 변경의 중요성만 생각해 온 루산은 새삼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갑자기 강력한 해군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일은 없었다.
며칠 뒤 정부에서 모든 변경 구역에 정식으로 동원력을 하달했다.
변경부 자료를 토대로 각 변경 구역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을 산출하여 동원해야 하는 멕 나이트와 멕 워커 수를 정확히 정하고 집결 장소까지 통보했다.
남방군이 상륙한 뒤에 명령을 내리면 늦다고 판단한 것이다.
괴수를 상대하던 변경의 멕 나이트들이 준비가 되는 대로 수송 열차에 실려 인간들의 도시를 구경하며 여러 날을 이동해 노바 서쪽 지방 라자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변경 1구역부터 변경 8구역까지 모든 변경 구역에서 출발한 멕 나이트들이 100대, 200대 모이더니 어느새 500대가 넘어가고 1천 대를 넘겼다.
“쓰벌! 많이도 왔네.”
거칠어 보이는 인상의 변경 파일럿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불안과 호기심, 두려움과 호기, 전쟁의 냄새는 그런 감정들과 함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