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우리가 더 빠르다
362. 우리가 더 빠르다
8개 변경 군단의 전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기 전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투덜거렸다.
“파일럿들 불만이 장난이 아니에요.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만데, 그거 다 정부에서 보상해 주는 겁니까?”
“동원 명령을 받고 오기는 했지만, 우리가 대체 왜 온 것이오? 아니, 소문대로 정말 우리더러 남방군을 막으라는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그러게 말이에요. 몇 년 전에 그렇게 들쑤셔 놓고 이제 와서······.”
“우리를 동원해 버리면 앞으로 마나 연료는 어떻게 충당하려는 건지 원······.”
“그야 뭐 비축분이 있겠죠.”
“비축분으로 되겠어요? 멕 나이트 전력이 두 배나 늘었는데? 열차, 선박 운송량도 크게 늘고 공장 가동에 소모되는 양도 엄청 늘어서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뭐 어쩌겠어요? 나라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문제가 생기면 정부 놈들이 책임지겠죠.”
잠시 후 수도 군단 사령관과 군무부 고위 장교, 그리고 루산이 들어왔다.
변경 지휘관들이 분분히 자리에 앉았다.
“반갑소! 나는 수도 군단 사령관 그라이츠 자작이오.”
변경 군단의 지휘관들이 일제히 수도 군단 사령관을 주목했다.
“곧 정식 발표가 있겠지만, 오베론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체포되었소. 그의 아들이 남방군 1군단을 이끌고 노바를 공격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변경 군단을 동원한 것이오.”
“음!”
소문으로 도는 내용을 수도 군단 사령관이 사실로 확인해 주자 변경 군단 지휘관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다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남방군이 회군하지 않으면 전투에 투입되지 않을 것이오. 설사 남방군이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변경 군단은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시간을 끄는 임무를 맡을 것이오. 실제 전투를 벌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오.”
실제 전투에 투입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말에 살짝 안심하는 변경 지휘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변경 군단이 시간을 끄는 동안 황제 폐하께서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고, 수도 군단이 본토에 남아 있는 멕 나이트 전투 파일럿들을 규합해 남방군을 제압할 것이오.”
변경 군단 동원령의 취지에 대해 설명한 수도 군단 사령관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본토에 남아 있는 멕 나이트 전투 파일럿에는 변경의 파일럿도 포함이 된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라오.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 명단에 적혀 있는 파일럿들은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별도로 배속될 것이오.”
군무부 작전 장교가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배속될 파일럿들의 명단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변경 군단 지휘관들은 자기 구역에서 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 파일럿들이 명단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부에서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는 여기 있는 변경 8군단 2전단장 루산 보름스 자작이 지휘하게 될 것이오.”
변경 지휘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산에게 쏠렸다.
다른 변경 구역 사람들도 8구역의 루산 보름스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멕 나이트 조종 실력, 멕 나이트 전투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그가 평범한 변경 파일럿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여 전단장과 시장 그리고 본부 간부직을 겸하면서 세금 징수권을 포함,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변경 파일럿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인 것이다.
‘저렇게 생겼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데?’
전단장, 시장 등을 맡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어쨌든 모든 변경 구역에 소문이 좍 퍼져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루산의 온몸을 훑어 나갔다.
그때 루산이 말했다.
“수도 군단 사령관께서 말씀하셨듯이 변경 군단의 임무는 아군의 수가 많아 보이도록 하여 적의 진군 속도를 저지하는 것입니다. 실제 전투는 치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도 군단에서 멕 나이트 제식 훈련을 지도할 훈련관이 파견될 것입니다.”
“무엇을 훈련한다는 말이오?”
“열을 맞추고 전진, 후진, 정지 동작을 동일하게 맞추는 훈련이죠. 오합지졸로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변경 지휘관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 정도 훈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변경 군단의 사기 진작을 위해 동원된 기간만큼 수입이 감소하는 부분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연구 중이니 수도 군단 휘하에서 복무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이야기에는 변경 지휘관들의 표정이 불만에서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변경 파일럿은 군인이 아니다.
동원령에 의해 전투에 나서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한데 그것을 무상으로 하라고 하면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변경 파일럿들의 마음을 아는 루산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율리안을 통해 정부에 건의한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배속되는 파일럿들은 동원 기간 동안 제국군 파일럿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을 파일럿들에게 말해 주시고 돌아가시면 파일럿들을 곧바로 이곳으로 보내 주세요.”
이후 부대 편성, 보상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변경 1구역부터 변경 8구역까지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배속되는 파일럿의 수는 모두 126명.
변경 8구역 인원이 제일 적었고 변경 5구역과 7구역에서 차출된 인원이 많았다.
변경 8구역은 단기간에 급성장을 해서 많은 파일럿들을 새로 고용했지만, 마침 그 기간이 대전쟁 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새로운 파일럿들의 수준이 크게 떨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변경 파일럿들이 위력 과시를 위해 제식 훈련만 받는 것과 달리 변경 기동 전투 부대 파일럿들은 수도 군단 3전단 멕 나이트 훈련장에서 야전 훈련을 받았다.
그렇다 해도 루산은 급조한 이 부대가 수도 군단만큼의 전투력을 발휘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수도 군단 파일럿에 육박할 만큼 뛰어날지 몰라도 5년, 10년, 15년 동안 변경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파일럿들이 제국군 파일럿과 같은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일럿들을 한데 모은 자리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복잡한 전술 훈련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대신 단순한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개별 전투력 향상을 위한 훈련이나 소수 전술 훈련을 아예 생략했다.
일자 방어 훈련
일자 전진 훈련
U자 포위 훈련
삼각 돌파 훈련
오직 전단 단위의 집단 전투 훈련에만 몰두했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오고 5년 동안 실전을 치러 온 남방군과 싸워서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력은 어디까지나 제국군.
변경 군단은 최대한 버티며 생존력을 높이고, 적을 쳐부술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 최소한의 전투 수행 능력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속한 파일럿들은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어차피 전투에 투입되게 된다면 수도 군단 파일럿 못지않게 싸워서 공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변경 파일럿이라고 무시당해 온 과거, 혹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여 부끄럽게 여겨 온 지난날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변경에서 올라온 멕 나이트 1,500여 대 가운데 일부는 진형 훈련 나머지는 제식 훈련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가을이 점점 깊어지던 어느 날 해군으로부터 긴급 소식이 노바로 전해졌다.
“시바스 왕국을 떠난 남방군이 본토로 오지 않고 방향을 틀었답니다!”
“뭐라고! 어디로?”
본토 방어 준비에 몰두하던 수도 군단과 군무부가 발칵 뒤집혔다.
***
오베론 해운의 수송선과 시바스 왕국이 지원한 배들을 타고 시바스 왕국을 떠난 남방군 대병력은 큰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이왕 거사를 결심하고 군을 움직였으니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바다 위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남방군 참모들과 지휘관들은 필센 본토 공격 작전을 수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시간을 단축시키려면 브레머 항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노바와의 거리도 가깝고 항만 시설도 충분하여 상륙에 걸리는 시간도 짧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필센 해군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을 것이오. 상륙하기도 전에 많은 배가 가라앉고 말 텐데 그곳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요.”
“그렇다고 브레머를 피해 다른 지방에 상륙하면 노바까지 언제 도달한단 말입니까? 노바에 시간을 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추가 병력이 없으나 노바는 새로운 군대를 편성할 수도 있고 아우로라 대륙에 있던 병력이 본토를 구하러 올 수도 있으니까요.”
양측 모두 일리가 있었다.
묵묵히 지휘관과 참모들의 논쟁을 듣던 바트가 문득 중얼거렸다.
“지금 꼭 노바로 가야 하나?”
“네?”
“우리의 일차적 목표가 굳이 노바여야 하느냔 말이야.”
“당연히······.”
“황제를 잡으면 되잖아.”
그 말을 들은 참모와 지휘관들은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본토 상륙을 목표로 하면 문제가 생겨. 최대한 빨리 노바를 접수하기 위해 브레머 쪽으로 가면 필센 해군에 당하겠지? 그렇다고 브레머 남쪽이나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상륙하면 노바까지 가는 데 너무 오래 걸려. 방어할 시간을 주는 셈이지. 그 사이 황제가 군대를 데리고 돌아올 수도 있고. 어차피 황제를 잡으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야?”
“그렇습니다!”
“동방군은 병력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대륙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 북방군은 너무 멀어서 소식이 전해졌는지도 모를 상황이고. 네세베르 공략군은 이제 못 빼. 루한뿐 아니라 시바스도 상대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노바를 구원할 병력은 황제의 근위대뿐이지. 우리가 황제와 근위대를 잡아 버리면 노바로 천천히 돌아가도 되는 거야. 본토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봐야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황제가 이미 본토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기는 쉽지 않아. 페르보 제국 깊숙이 들어간 황제가 부르가스의 항구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거든. 게다가 근위대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수송선이 늘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그곳은 아우로라 해군 함선들이 필센의 배를 격침하기 위해 자주 출몰하기 때문에 임무를 마치면 곧바로 이동하니까. 우리가 더 빠르다! 부르가스에서 황제를 잡는다!”
“알겠습니다!”
본토를 향하던 남방군 수송 함대가 항로를 북쪽으로 틀어 부르가스에 상륙했다.
부르가스 인근을 순찰하던 필센 제국 해군이 깜짝 놀라 막았으나 시바스 왕국 해군이 수송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해 오고 이동식 마나포 수백 문이 수송선 위에서 발포하는 바람에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황제와 근위대를 잡으면 우리의 승리다!”
항만 시설이 잘 갖춰진 부르가스 항에 남방군의 아이언 워리어 Ⅱ들이 줄줄이 상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