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우리가 주워서 쓸 거니까
366. 우리가 주워서 쓸 거니까
황제가 탄 대형 마차가 번쩍번쩍 빛나는 근위대 멕 나이트의 호위를 받으며 관문 도시 가베스를 통과했다. 그 뒤로도 의전과 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실은 화물 자동차와 마차들이 길게 따라왔다.
필센 제국처럼 도로가 잘 포장된 곳에서는 황제가 자동차를 타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우로라 대륙은 나라마다 도로 사정이 다른 데다 멕 나이트들이 짓밟고 다닌 바람에 도로가 엉망인 경우가 많아 차라리 마차가 더 편했다.
그러나 사실 황제가 마차를 타게 된 이유는 황제의 위엄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크면서도 편안한 자동차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마차는 신하 여러 명과 함께 회의를 할 수 있는 이동식 집무실로 사용될 만큼 내부 공간이 넓으면서도 어지간한 진동은 흡수할 만큼 충격 완충 장치가 잘 갖춰져 있었다.
도로가 완전히 파이고 울퉁불퉁하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황제의 마차라도 다니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 필센군 공병대가 70만 동방군의 보급을 위해 길을 보수한 덕에 황제의 마차는 그리 어렵지 않게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가베스를 지난 황제의 행렬은 부르가스와 바르나 왕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근위대장이 타고 있던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대규모 행렬이 연쇄적으로 정지했다.
황제의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호위하던 근위대 기사가 달려와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인지 물으십니다, 대장님.”
“글쎄······.”
경비대장이 국경 초소와 감시 망루를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우리 군이 바르나 왕국을 점령했다 해도 국경을 지키고 있는 경비 초소를 너무 허술하게 방치하고 있군. 전에 지나올 때도 그랬었나?”
“그때는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기합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도록 근무한 게 아니었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바르나를 우리 군이 장악하고 있는데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까?”
“그렇겠지요.”
근위대장은 자신이 과민 반응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노바에서 일어난 황궁 점령 사건.
여전히 그 실체가 의심스러운 일이 후방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도 모두 의심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의심스러운 구석은 비어 있는 국경의 경비 초소만이 아니었다.
동방군은 기동 부대만 20개가 넘고 점령지 치안 유지를 위한 보병 사단도 수십 개에 이르렀다.
이들을 먹여 살리고 무장시키기 위해 보급 물자와 무기, 마나 연료와 멕 부품 등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그뿐 아니라 점령지 백성들에게도 식량과 생필품을 나눠 주어야 했다.
그래서 황제 행렬이 서쪽으로 오는 동안 수송 부대를 쉴 새 없이 마주쳤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길에서 수송 부대를 만나지 못했다.
‘바다 사정이 안 좋아 배가 본토에서 출발을 못 했거나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근위대장은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가 이렇게 국경 경비 초소가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황제 폐하를 모시고 진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장님, 폐하께 뭐라고 보고할까요?”
근위대장이 마땅한 핑계를 떠올리고 있을 때 가까운 멕 나이트에서 근위대 파일럿이 놀란 표정으로 내려 달려왔다.
“대장님!”
“무슨 일이야?”
황제 호위 중에 함부로 멕 나이트에서 내리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방금 전에 긴급한 마나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음? 누가 보낸 건가?”
“정체를 밝히기 전에 끊겨 확신할 수는 없으나 누군가로부터 공격받는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였습니다. 추측해 보건데 부르가스에 주둔해 있던 우리 군의 파일럿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남방군이 부르가스에 상륙해 주둔해 있던 아군을 공격하고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답니다! 저 앞에서 폐하를 해치기 위해 매복해 있으니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말한 뒤 비명을 지르고는 통신이 끊겼습니다!”
근위대장은 털이 쭈뼛 섰다.
저 멀리 시바스 왕국과 싸우고 있어야 할 남방군이 갑자기 부르가스를 차지했다는 내용이나 매복해 황제 폐하를 공격하려 한다는 말은 비상식적인 이야기였으나 그는 바로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되었던 것이다.
아우로라 연합군 특작 부대에 의해 황궁이 점령되었다는 오베론 공작의 보고, 늘 마주치던 수송 부대를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없게 된 일, 방치된 국경의 초소, 그리고 아마도 부르가스에 주둔하고 있다 남방군에 의해 공격을 받아 마지막 순간 간절한 마음으로 아군에게 통신을 보내고 쓰러진 이름 모를 파일럿까지!
이 모든 일들이 마침내 일목요연하게 하나로 이어졌던 것이다.
‘오베론 공작이 남방군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켰구나!’
애초부터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좀 더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주변을 정찰한다! 그동안 근위대는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라!”
“알겠습니다!”
기마 정찰대와 멕 나이트 두 대가 국경을 넘어 부르가스 땅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황제의 행렬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마차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광경을 고지에서 지켜보던 남방군 정찰병들이 거울로 빛을 반사해 남방군 본대에 신호를 보냈다.
빛 신호를 수신한 남방군 장교가 바트에게 보고했다.
“정찰 병력만 이쪽으로 들어오고 본대는 그 자리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언제든 동쪽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마차 방향을 돌린 채로 말입니다!”
바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이동식 마나포를 이용해 근위대를 압살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온 황제를 무사히 놓아 보낼 수는 없었다.
“황제 행렬은 멕과 차량들이 뒤섞여 있고 황제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 우리 기동 전단은 동쪽으로 달려가 황제를 잡아라! 만약 생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여도 좋다!”
“······!”
“전 부대에 전해! 당장!”
“네! 알겠습니다!”
바트의 호위 겸 서브 파일럿인 기사가 멕 나이트 통신기로 전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숲속에, 언덕 뒤에, 마른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방군 멕 나이트들이 일제히 나타나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트도 서브 파일럿을 내리게 하고 직접 멕 나이트에 올라탔다.
다른 때라면 대형 거미에 타고 작전을 지휘하겠지만, 대형 거미가 고장이 났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남방군 기동 전단 뒤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자 포진해 있던 이동식 마나포 부대도 정렬하여 기동 부대가 멀어져 가는 동쪽으로 줄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남방군이 황제를 잡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마나포 부대는 뒤로 크게 처진 채로 따라가는 중입니다!]
전투 거미 1호가 바쁘게 움직여 루산에게 소식을 전했다.
[알았습니다. 계속 지켜보며 통신하세요!]
[네, 대장님!]
루산은 대기하고 있던 변경 파일럿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 지금 즉시 이동해 남방군 마나포 부대를 격파합니다!]
그동안 루산이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도 설명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자 불만이 쌓여 있는 파일럿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전투 투입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나 좀 압시다! 아무리 지휘관이라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오? 남방군 멕이 우리보다 훨씬 성능이 좋고 수도 많다는 건 다 알고 있는데 다짜고짜 전투에 투입하겠다고 하니 어디 발걸음이 떨어지겠소?]
[맞아! 부려 먹더라도 말 좀 해 주고 부려 먹어야지!]
루산이 한 차례 인상을 쓰고는 빠르게 설명했다.
[지금 남방군 기동 부대가 황제 폐하를 잡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동식 마나포 부대는 멕 나이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뒤에 처진 상태죠. 서두르면 피해 없이 궤멸시킬 수 있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우리와 계속 여기에 함께 있었잖아!]
루산은 아라드 변경에서 온 부대와 전투 거미의 존재를 밝힐 수는 없었다.
[우리를 돕는 다른 부대가 있어요. 마나 통신으로 전장 상황이 들어옵니다.]
지휘관이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리 말을 해 줘야지! 혼자만 알고 있으면 어떡해? 불안해서 어떻게 싸우겠어?]
[조력 부대를 믿고 너무 마음을 놓을까 봐 그런 겁니다. 조력 부대는 전투력이 없어요. 정찰한 내용을 통신으로 알려 주는 것뿐입니다.]
[음!]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는 피해 없이 남방군 마나포 부대를 전멸시킬 기회를 놓치게 되는데 계속 따지고만 있을 겁니까?]
[쳇!]
[여러분은 동원 기간 중에는 필센 제국군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현장 지휘관의 권한으로 어떤 처벌이든 내릴 수 있습니다!]
루산은 싸우기 전에 단단히 군기를 잡았다.
미덥든 못 미덥든 이번 작전은 이 변경 파일럿들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공을 세우면 그에 상응하는 공적을 기록해 상을 주고 명령을 어기면 벌을 내릴 겁니다. 알겠습니까?]
[알았시다! 잔소리 좀 그만 하쇼! 우리 단장보다 잔소리가 심하네.]
[크크크!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웃음으로 넘기려는 몇몇 파일럿들 덕에 분위기가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 멕 나이트 126대가 남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남방군 멕 나이트는 이미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떨어진 낙엽을 밝고 말라가는 덤불숲을 쓸며 무질서하게 달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속도였기에 루산은 일일이 나무라지 않았다.
변경 부대의 거의 모든 멕 나이트가 낡은 아이언 워리어였기에 루산의 우르사와 시에나가 탄 003이 무척이나 두드러져 보였다.
변경 파일럿들은 대부분 훈련을 따로 하지 않아 체력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한때 제국군에 몸담았던 파일럿들도 마찬가지였다.
들키지 않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떨어져 숨어 있었기 때문에 남방군 마나포 부대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곳까지 전력으로 질주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전투 능력이 노바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변경 파일럿들보다 좀 더 나을 뿐 변경에서 괴수나 때려잡던 생활인들인 것이다.
[헉! 헉!]
[후하후하!]
통신기로 들려오는 파일럿들의 거친 숨소리에 루산은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시에나, 적 선두 부대가 포구를 돌리지 못하도록 헤집어!]
[네, 대장님!]
시에나의 003이 변경 부대에서 이탈하여 엄청난 속도로 쭉쭉 뻗어나갔다.
[와 씨! 겁나 빠르네! 헉헉!]
통신기로 전해지는 중간 지휘관들의 무의미한 감탄을 무시하고 루산이 명령을 내렸다.
[마나포 정면으로 맞으면 강철 몸체도 뚫린다는 걸 명심하고 최대한 빠르게 적을 쳐부숩니다!]
[후헉! 알았소!]
[마나포를 부수는 게 아니라 마나포를 운반하고 발포하는 멕 워커를 부수도록 하세요!]
[왜······?]
[마나포는 우리가 주워서 쓸 거니까!]
[응?]
[헉헉! 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쏘는 거요?]
자꾸 귀찮게 묻는 변경 파일럿들을 향해 루산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남방군 멕 나이트와 맞붙어 싸우든가! 닥치고 달려! 달려서 부수라고!]
[······!]
여태 큰소리를 내 본 적이 없는 얌전한 지휘관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통신기들이 잠잠해졌다.
[쓰벌, 귀청 나가겠네······! 알았소!]
마침내 먼 거리를 달려온 변경 기동 전투 부대 멕 나이트들이 개활지로 나왔다.
동쪽으로 행군하던 남방군 마나포 부대가 그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딱 봐도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무식하고 저돌적인 돌격을 해 오는 멕 나이트 부대!
- 적이다! 포구 틀어!
이동식 마나포 부대 지휘관들이 부랴부랴 방렬 명령을 내렸다.
멕 워커들이 다급히 포구를 돌렸다.
그때 변경 부대에서 떨어져 나간 003이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나 선두에서 나아가던 마나포 운반 멕 워커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양 떼 속에 뛰어든 표범 같았다.
마나포를 짊어지고 이동하는 멕 워커, 마나포를 조준하고 발사하는 멕 워커들 가운데 어떤 기체도 003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대열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고 달아나는 기체들이 속출했다.
003이 마나 진동 대검으로 멕 워커들의 다리와 팔을 수수깡 자르듯 베어 나가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변경 파일럿들이 메뚜기 떼처럼 후미의 마나포 부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