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어떻게 제거하지?
370. 어떻게 제거하지?
목적을 달성한 루산으로서는 이대로 부르사 왕국으로 돌아갔다가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 가장 깔끔한 결말이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킨 남방군의 공격으로부터 황제를 구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근위대 생존자들과 황제의 사체를 수습하고, 남방군 포로들을 체포해야 했다.
“남방군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살아남은 근위대 기사들이 황제의 죽음을 알고 눈이 뒤집혀 남방군 파일럿들을 죽이려 했다.
루산은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두시오.”
“뭐? 너희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 두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기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근위대 1전단 생존자들이 변경 부대가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탓을 해도 루산은 같이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나서지 않았으면 근위대는 더 빨리 전멸했을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입은 피해도 상당하니 모욕적인 말은 삼가시오.”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남방군을 상대하다 사상자가 30여 명이나 발생했고, 나중에 나타난 아우로라 연합 멕 나이트 부대에 의해 멕 나이트 50여 대가 파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대 자체가 완전히 와해된 근위대 기사들이 보기에는 코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피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기서 남방군 포로들을 베면서 분풀이를 하는 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오. 황제 폐하의 승하 소식을 서둘러 본국에 알리고 제국의 통치 공백을 없애야 한단 말이오. 아직 남방군은 멕 나이트 기동 부대가 두 개, 마나포 부대 한 개, 지원대와 보병 부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소. 그 많은 병력을 처리하지 않으면 동방군과 네세베르 공략군은 보급에 크나큰 차질이 생겨 제국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걸 모르겠소? 본국 귀환 문제, 남은 남방군 처리 문제를 고심해도 모자를 판에 뭐 하자는 것이오?”
맞는 말이라 근위대 파일럿들은 대꾸할 말이 모욕과 조롱밖에 없었다.
“변경 파일럿 주제에······.”
“변경 파일럿도 아는 걸 근위대 파일럿들이 모르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
“뭣이!”
근위대 기사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뻗었다.
그때 근위대장이 근위대 기사들을 제지했다.
“그만하라!”
“하지만, 대장님!”
“저이의 말이 맞다. 황제 폐하의 유체를 수습해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우선이다. 어차피 체포된 반란군에 대한 처벌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근위대장이 이번에는 루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방도가 있는가?”
루산은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우리 부대는 부르사에 상륙해 부르가스로 넘어왔기 때문에 역순으로 부르사로 가서 본토로 귀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러면 너무 늦기 때문에 마지막 방법으로 생각할 만합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부르가스로 가서 남은 남방군의 항복을 받고 부르가스 항에서 배를 타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죠. 한 달 이상 차이가 생길 겁니다.”
“뭐! 남방군의 항복을 받아낸다고?”
근위대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렇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황제 폐하를 해하려 한 놈들이야!”
그러나 루산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말이 안 될 것도 없지요. 오베론 공작은 노바 감옥에 갇혀 있고, 남방군을 이끌던 그의 큰아들은 조금 전에 죽었습니다. 남방군의 남은 병력이 무얼 위해 반란을 계속하겠습니까? 그들로서는 오베론 가문에 대한 의리로 마지못해 따랐을 뿐인데 이제 따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으음······!”
“여기서 황제 폐하와 근위대를 직접 공격하던 자들과는 또 다릅니다. 남은 자들은 바트 오베론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근위대장께서 그들의 죄를 없애줄 수는 없겠지만, 항복한다면 남은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 싸울 경우 죄를 감면해 준다고 약속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항복할 것입니다.”
오베론 공작이 체포되고 바트 오베론이 사망한 마당에 남은 남방군 병력은 반란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가족은 모두 필센 제국에 남아 있다.
“나더러 반란군에게 죄를 감면해 주겠노라고 약속하란 말인가?”
황제를 지키지 못한 근위대장으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남방군도 필센 제국의 군대입니다.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아군으로 품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근위대장이 고심했다.
“남방군 잔존 세력이 이대로 부르가스를 점령하고 있으면 따로 진압 부대를 보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남방군 잔당 역시 살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방군과 네세베르 공략군에 대한 보급은 지장을 받게 되겠죠. 군사적으로나 대국적으로나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자명합니다.”
루산의 말을 듣고 있던 근위대장과 근위대 기사들은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반란을 일으킨 남방군 때문에 황제를 잃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우로라 연합군 기동 부대의 출현에 갑자기 황제가 사망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제를 잃은 뒤에 남방군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황제를 지키지 못한 근위대장에게.
그러나 루산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남방군을 여기서 회유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더 큰 피해를 막는 것이다.
“알았다. 사절을 보내도록 하지.”
“대장님!”
근위대 기사들이 소리쳤다.
그러자 근위대장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트 오베론이 죽었다. 반란을 일으킨 주범이 죽었어. 오베론 가문을 따르던 고위 지휘관들이야 용서할 수 없지만, 나머지 장병들을 다 죽이는 것은 제국의 힘을 꺾는 일이다.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더 말하지 말라.”
근위대장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황제의 시신을 흙과 함께 밑에서 통째로 거두어 수습하고는 근위대 2전단장을 부르가스 항으로 파견했다.
부르가스 항에는 남방군 기동 부대 2개 전단과 이동식 마나포 부대 1개 전단이 지키고 있었다.
부르가스 전역에 퍼져 있던 남방군 보병 사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멕 나이트 부대가 핵심이기에 이들이 항복하면 보병 사단도 항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바트 오베론과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남방군 잔존 병력은 크게 동요했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바트 오베론의 뒤를 이어 부르가스를 점령하고 필센 제국과 아우로라 연합 사이에서 새로운 세력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오베론 가문이 망하여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트의 사망과 함께 이미 거사는 물 건너간 것이다.
“문서로 확실히 보장을 받아야겠소!”
근위대장은 문서로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최대의 내용을 약속해 주었다.
<황제 폐하를 직접 공격한 병력을 제외한 남방군 1군단에 대해서는 아우로라 연합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충심을 다해 복무한다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필센 제국에는 죄수 부대라는 것이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기사들을 죽을 때까지 전쟁터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위대장은 이러한 약속에 대한 부담감이 다소 줄었다.
남방군 파일럿들 대부분도 애초에 아우로라 연합군과 싸우던 사람들이라 근위대장이 내건 조건이 특별히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방군 병력은 근위대장에게 항복했다.
근위대장은 남방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있던 부르가스 주둔 동방군 병력을 풀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남방군 잔존 병력을 감시하게 했다.
남방군 장병들은 본국에서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방군 잔존 병력의 항복은 받았으나 곧바로 노바로 건너갈 수는 없었다.
“부르가스 앞바다는 시바스 왕국 해군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본토로 건너간단 말이오?”
근위대장이 루산에게 물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눠 보니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저들은 우리 필센 해군이 부르가스 탈환을 위해 습격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 바다를 지키고 있을 뿐 육지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모를 것입니다.”
근위대장이 항구를 지키고 있던 남방군 지휘관에게 확인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여 해군 지휘관을 불러들이는 것이죠. 우리가 그쪽 배로 가도 좋고 말입니다.”
“그다음은?”
“시바스 왕국 해군 지휘관을 사로잡는 것이죠. 해군 병사가 기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몇 명만 승선에 성공해도 끝날 것입니다.”
기함을 잡은 뒤에는 기함에서 연락선을 타고 다른 배로 가서 계속 제압해 나가면 된다.
“들키면 승선하기 전에 끝장이 날 터인데······.”
“남방군 파일럿들에게 이 임무를 맡기십시오. 어차피 충심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배신하면?”
“우리의 귀환이 늦어지겠죠. 그리고 배신한 남방군 파일럿들의 가족들이 죽을 테고 말입니다.”
“음!”
근위대장은 루산의 말을 알아듣고 즉각 남방군 파일럿들을 소환해 시바스 해군 제압 명령을 내렸다.
남방군 파일럿들은, 보급에 대해 논의할 이야기가 있다며 시바스 해군 사령선으로 연락선을 타고 건너갔다.
오랫동안 남방군과 전쟁을 해 온 시바스 군은 남방군에 호의를 갖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동맹이나 다름없었기에 별 의심 없이 그물 사다리를 내려 연락선에 탄 사람들을 배 위로 올라오게 했다.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점도 그들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배에 올라탄 기사들의 무력은 해군 병사들이 대응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해군 지휘관을 붙잡은 뒤 나머지 병력을 죽이거나 항복을 받아 냈다.
그 이후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시바스 해군 복장으로 연락선을 타고 다른 배로 건너간 남방군 기사들이 차례로 해군 함선을 쓸고 다녔다.
멕 나이트에 타지 않고 맨몸으로 무기를 들고 피를 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검을 수련해 온 기사들은 해군 병사들에게는 멕 나이트보다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변고를 알아차리고 전투에 돌입하거나 달아난 배들도 있었지만, 남방군 기사들은 하룻밤 사이에 시바스 해군을 피로 물들이고 임무를 마쳤다.
근위대장은 반란죄를 씻고 살아남기 위해 악귀로 변한 남방군 기사들의 싸움 결과보다 루산에게 더 놀랐다.
“이제 떠나면 되는 것이오? 과연 남방군이 동방군의 감시 속에서 잠자코 있을지 걱정이 되는군.”
“걱정한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닙니다. 남방군이 다른 마음을 품기 전에 떠나시죠.”
“······!”
“저들도 항복하기는 했지만 마음속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앞일은 예측하기 어려우니 황제 폐하의 유체를 모시고 서둘러 귀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허!”
근위대장은 루산에 대해 더욱더 감탄하면서 부하들에게 탑승 명령을 내렸다.
근위대와 변경 기동 전투 부대는 황제와 바트 오베론의 사체를 싣고 시바스 왕국 수송선에 올라타고 부르가스 항을 떠났다.
***
뱃머리에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차갑게 뺨을 때렸다.
그러나 루산은 물보라를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뱃머리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현실의 그 무엇이 아니었다.
시에나가 다가왔다.
“대장님, 바람이 차가워요. 뭘 그리 생각하세요?”
루산이 고개를 돌려 시에나를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글쎄, 권력의 무상함 같은 거?”
“아! 그렇긴 해요.”
루산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권력의 무상함에 대한 생각도 잠시 스쳤으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과거 자신이 짓밟은 자들 - 그 후손들에 의해 - 에 의해 짓밟혔다.
애초에 원한을 살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일을 하지 않는 권력자가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권력을 놓고 평범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도 답이 될 수는 없었다.
루산 역시 이미 가진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산은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매우 현실적인 고민을.
‘황태자를 어떻게 제거하지?’
차가운 물보라가 루산의 얼굴을 연신 때렸다.
보다 못한 시에나가 루산의 팔을 잡아끌고 선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