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권한을 갖게 되신다면
371. 권한을 갖게 되신다면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황제의 유체가 돌아오자 필센 제국 황실과 정부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루산은 근위대장을 비롯한 근위대 지휘관들과 함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황제를 지키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남방군과 갑자기 출현한 아우로라 연합군 기동 부대의 공격에 근위대는 멀쩡한 멕 나이트가 한 대도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맞섰다.
변경 기동 전투 부대 역시 필센 정규군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남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30여 명의 사망자와 70대 이상의 멕 나이트 파손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선에서 계속해서 날아오는 소식들로 인해 근위대와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책임을 묻기가 어려웠다.
“적들이 동방군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동방군 후방에 출몰하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보고입니다!”
루산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페르보 제국의 대반격 작전이 시작되면서 황제를 죽인 멕 나이트 부대가 아우로라 연합의 군대임을 뒷받침하는 사건들이 줄줄이 보고된 것이다.
“네세베르 공략군이 강한 반격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남방군이 시바스 왕국을 떠나자 여력이 생긴 시바스 왕국군이 루한 왕국군과 합쳐 네세베르 공략군을 공격하고 있고, 주변의 다른 아우로라 연합국들도 병력을 대거 동원하여 네세베르 공략군을 측면에서 압박하고 있어 머지않아 포위될 상황이라고 합니다!”
남방군이 빠진 틈을 노린 시바스 왕국군이 네세베르 공략군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네세베르 공략군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동방군 차례였다.
그것은 필센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진다.
근위대와 변경 부대의 책임을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군무부 전쟁 상황실에서 네세베르 공략군을 구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르가스에서 근위대장이 항복을 받아낸 남방군 2개 기동 전단과 마나포 전단에 감시를 붙여 즉시 네세베르 방면으로 파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는가? 보고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시간, 이곳의 명령이 저쪽까지 닿는 시간을 고려하면 네세베르 공략군의 상황이 이미 최악으로 치달았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군무대신의 말에 전쟁 상황실장이 말했다.
“현재 본토에서 생산된 멕 나이트를 생존한 근위대 파일럿들에게 지급하여 네세베르로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생존한 근위대 파일럿을 파견한다?”
“네, 각하! 본토에 남아 있는 병력 가운데 근위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부대가 없습니다. 지금은 노바에서 딱히 할 일이 없을뿐더러 황태자 전하도 무사히 모셔 와야 하고 항복한 남방군도 감시해야 합니다. 근위대를 파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근위대는 현재 황제의 사망으로 할 일이 없어졌다.
황제를 무사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벌 아닌 벌을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황태자를 무사히 데려오면 황제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다소 덜게 되겠지만, 황태자마저 데려오지 못한다면 지금의 근위대는 그야말로 존재 가치가 없게 된다.
불명예를 씻기 위해 근위대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야.”
결국 근위대는 새로 생산된 멕 나이트와 수도 군단, 근위대에 남아 있던 미사용 기체 - 수리에 들어가 있다 나왔거나 오래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던 기체 - 를 지급받고 노바로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다시 부르가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남방군 잔존 병력과 함께 네세베르로 이동할 것이다.
근위대로서는 고난의 기간이었지만, 네세베르 공략군을 구원하고 황태자를 무사히 노바로 호위함으로써 황제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근위대가 그렇게 떠나자 변경 부대에 대한 책임론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외부 접촉이 차단된 채로 조사를 받던 루산도 풀려났다.
“부장님, 몸은 좀 어떠세요?”
율리안이 군무부 조사실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루산을 위로했다.
황제 사망이라는 중대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 보니 황족이라 해도 접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산은 자신을 걱정하는 율리안을 보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율리안의 얼굴이 전보다 푸석푸석해 보였다.
“군무부에서 제공해 주는 침상에서 잠 자고 꼬박꼬박 나오는 식사를 해서 괜찮습니다.”
루산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율리안이 루산의 옆에 가까이 붙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변경 파일럿들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원······. 다 이긴 전쟁이라고, 금방 끝난다고 했는데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모든 전선이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네요.”
루산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노바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황제 폐하의 사고 소식에 무척 어수선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난리도 아니죠. 공식 발표를 해야 할지 말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그럴 만했다.
황궁 점거 사건, 오베론 공작 반란 사건에 이어 황제 사망 사건이 터지면 노바와 필센의 백성들이 받을 충격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군무부 전쟁 상황실에서 며칠 만에 근위대를 네세베르 공략군 구원과 황태자 귀환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만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산이 궁금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막심 황자께서는 어떠십니까?”
“충격이 크시죠.”
“···물론 당연하지요. 그러나 어쨌든 통치 공백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노바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안 계십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막심 전하께서는 제국을 통할해 오셨고 지금도 그 일을 잘 수행하고 계신데 얼마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부친을 여읜 슬픔과 통치권을 잃게 되는 허무함에 혹시라도 나랏일에 소홀하게 되시지는 않을지 우려가 되는군요.”
“음······.”
“우리 제국은 현재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제대로 수습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혼란에 빠진 관리와 백성들을 휘어잡아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하고 계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렇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듣고 보니 걱정이 되는군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네세베르 공략군과 함께하고 계시던 황태자 전하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다음 순서로 막심 전하께서 황제가 되십니다. 그런데 막심 전하께서 과연 이 위기를 헤쳐 나가실 수 있는 분인지 걱정입니다. 사실 오베론 공작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는 막심 전하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견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루산이 말하는 내용이 위험 수위에 근접한다고 판단한 율리안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그러나 루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평시라면 다소 능력이 부족하거나 경험이 부족한 황제도 유능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으며 시행착오를 거쳐 성장해 나가겠지만, 지금은 필센 제국의 국운이 걸린 위기 상황입니다. 수십 년 동안 통치와 관련된 교육이나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막심 전하께서 과연 이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끄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크흠!”
율리안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음에도 루산은 기어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쳤다.
“이반 황제께서도 천명하신 것처럼 이 나라는 황제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법 앞에 평등합니다. 그런데 황제와 백성들의 힘은 결코 동등하지 않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황제이고 백성들은 그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백성의 운명을 결정짓는 황제, 그러한 황제를 서투르고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만하시죠, 부장님! 막심 전하의 능력은 아직 증명되지도 않았습니다.”
율리안이 언성을 높였다.
율리안이 타고 온 자동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 기사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루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죠. 반면 율리안 님의 통치력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변경 8구역의 번영으로 말입니다.”
“그건······!”
루산 보름스, 바로 당신이 한 일이 아닌가!
하고 말하려던 율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루산의 제안한 일을 허락하고 더 큰일을 하도록 지위를 높여 준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루산의 제안을 기각하고 지위를 높여 주지 않을 힘이 자신에게는 있었고, 만약 그렇게 했다면 변경 8구역은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통치란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
그런 정도의 능력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덩치가 다를 뿐 변경 8구역을 그렇게 발전시켰다면 필센 제국 또한 그렇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지럽기로 따지면 변경만큼 어지럽고 폭력적이고 욕망이 들끓는 곳도 없는데, 그런 변경을 문명과 질서가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면 이미 문명과 질서가 갖춰진 제국은 더욱 번영된 세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통치라는 것은 직접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상품을 팔고,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하라고 하면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남의 말을 잘 듣고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여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신 있었다.
이미 수년째 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은 하고 계시라는 겁니다. 위기에 빠진 제국,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모른 체하는 것이 결코 올바른 일은 아닐 겁니다. 그게 황족으로서의 책임이 아닐까요?”
“······.”
밤베르크 가문에서 제공한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내내 율리안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루산 역시 입을 다물었다.
처음 꺼내는 말이 아니었다.
흰 천에 염색을 하는 것, 멕 나이트에 도색을 하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한 번 염색하고 한 번 도색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계속 칠하는 것이다.
율리안이 침묵한다는 것은 자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봄으로써 물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줘야 했다.
율리안이 타고 온 차로 다가가자 경호 기사가 루산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율리안을 위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루산은 반대편으로 가서 율리안 옆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차가 출발했다.
밤베르크 가문에서 온 운전기사도, 조수석에 앉은 율리안의 경호 기사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율리안의 눈치를 보느라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잠시 후 루산이 적막을 깼다.
“율리안 님.”
“···네.”
“네세베르 공략군이 무너지면 우리 제국은 정말로 크나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
루산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율리안 님께서 군무부에 제안을 해 주십시오.”
“···뭘 말입니까?”
“가프 마법 연구소에는 레오파드를 테스트하고 실전 경험 자료를 축적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용병단이 있지 않습니까? 가프 용병단 말입니다. 아마 군무부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프 용병단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해도 이미 아라드 왕국과 북부 전선에서 활약한 바 있기 때문에 군무부에서도 약간은 알고 있으리라 보았다.
“그런데요?”
“가프 용병단을 네세베르 공략군 구원에 투입하자고 제안해 주십시오. 아라드와 이스타드에서의 활약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율리안이 깜짝 놀라 말했다.
“부장님! 부르가스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전쟁터로 가겠다는 말씀인가요?”
“우리 제국은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형편입니다.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해 봐야죠.”
율리안은 자신에게 황위를 노리라고 부추기는 루산에 대해 살짝 반감이 들었으나 이럴 때 보면 정말 존경스러웠다.
전쟁터로 가야 할 의무가 없음에도 자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애국자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산이 덧붙였다.
“만약 율리안 님께서 권한을 갖게 되신다면 가프 용병단에 속한 파일럿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든 모두 용서해 주시고 필센 제국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묘한 말이었다.
권한을 갖게 된다면이라는 조건도 걸렸고,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든이라는 단서도 걸렸다.
그러나 제국의 명운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결국 율리안은 어떤 권한을 갖게 될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루산은 과거 반란에 가담한 구귀족파 기사들이 양지에서 살아갈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디까지나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연합의 대반격을 모두 분쇄하고 율리안이 황제가 되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가로놓여 있었지만, 루산은 그 길을 기꺼이 갈 생각이었다.
오베론 가문이 망하고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복수가 끝난 것이 아니다.
멕 나이트에 짓밟혀 형체도 남지 않은 황제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튼튼한 성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루산은 다시 전쟁터로 가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황태자가 있는 네세베르로.